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6.01.05 07:16

[김윤석의 드라마톡] 육룡이 나르샤 27회 "정몽주에 대한 과감한 재해석, 먼저 정창군을 찾아가다"

무명을 함정에 빠뜨리는 정도전, 길선미를 쫓다 이방지 어머니를 만나다

▲ 육룡이 나르샤 ⓒSBS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육룡이 나르샤. 위험하다. 그동안 여말선초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적지 않았다. 작품에 따라 역사는 물론 인물 개인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도 더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거의 금기이다시피 건드리지 않던 인물이 하나 있었다. 정확히는 건드릴 수 없었던 부분이었다. 바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이성계(천호진 분)등과 맞서 마지막까지 왕조와 운명을 함께 했던 충신 정몽주(김의성 분)의 충절이었다.

상징과도 같았다. 잦은 외침에 권문세족들의 가혹한 수탈로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삶을 이어가던 이 땅의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한계에 이른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 위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 했던 대의는 무척 옳았다. 하지만 그 고려왕조야 말로 자신이 나고 자란 나라였으며, 또한 자신이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했던 대상이었다. 이성으로야 당연히 정도전(김명민 분)의 혁명이 더 옳았다 인정하면서도 정작 사람의 감정이란 마지막까지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지키고자 했던 정몽주의 비장한 최후에 이끌리고 마는 것이다. 마침내 정몽주의 죽음과 함께 그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고려왕조도 끝나고 말았다.

고려왕조의 멸망과 조선왕조의 창건이라는 역사의 중심에 바로 정몽주가 있었고 그의 죽음이 있었던 것이었다. 정몽주가 죽으며 그와 함께 고려왕조도 끝이 났고, 정몽주의 죽음을 딛고 이성계와 정도전은 비로소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정몽주의 마지막이 비장했기에 고려라고 하는 한 왕조와 그 시대 역시 비감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새로운 시대를 위해 완결될 수 있었다. 누구도 정몽주가 죽고 난 이후의 고려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런데 심지어 그런 정몽주의 충절마저 드라마를 위한 재해석과 재구성의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재해석들이 무척 흥미로우면서 상당히 타당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유자라 불리우는 이들의 본성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탓이라 여겨진다. 종교란 근본적으로 영원을 추구한다. 죽음이란 것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내면에는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가 잠재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그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그래서 천국이 만들어지고, 극락이 만들어지고, 발할라가 만들어졌다. 윤회전생에서 벗어나 영원한 소멸로 가는 길도 제시했다. 역사는 그렇게 유학자들이 찾아낸 영원에 이르는 또 하나의 통로였다. 역사가 기록되고 또 전해지는 한 역사와 함께 개인의 이름 역시 후세의 기억과 의식 속에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유학자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죽음도 아니었고, 멸족도 아니었다. 역사에 기록될 석 자 이름이었다.

충신으로 남고자 한다. 반역자로 기록되지 않으려 한다. 정도전과 이성계를 설득하면서도 정몽주는 역사에 기록될 그들의 이름을 그 중요한 이유로 내세우고 있었다. 반역자로 기억될 것이다. 찬탈자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고려왕조에 대한 한결같은 충심은 정몽주의 유학자로서의 신념이자 이상인 동시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자신의 이기이기도 했다. 고려를 지키고 고려왕조를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성계가 무섭다고 아버지가 보고 싶다며 자신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작고 어리기만 한 왕의 모습에 정몽주는 실망을 넘어 절망감마저 느낀다. 고려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려왕조의 충신이 되고자 하는 자신을 위해서는 더 강하고 더 현명한 왕이 필요하다. 정몽주가 먼저 이후 공양왕이 될 정창군 왕요를 찾아가 만나는 장면은 파격을 넘어선 경이라 할 수 있었다. 정몽주가 폐가입진의 명분을 내세워 창왕을 폐위하고 정창군 왕요를 공양왕으로 옹립하는 과정이 정몽주의 아집과도 같은 유자로서의 신념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아주 잘못된 해석은 아니지만 무언가 미묘하다. 그래도 정몽주는 충신인가.

무명의 실체를 밝히려 함정을 판다. 정몽주를 이용하기 위해 자신들을 동굴로 불러모았듯 양전을 방해하려는 무명의 의도를 이용하여 무명의 인물들을 미리 계획한 장소로 유인하여 함정에 빠뜨린다. 다른 무엇보다 우선해서 무명의 실체를 밝혀야 한다. 그들의 의도와 정체를 알아내어 괴멸시켜야 한다. 분노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정몽주를 이용하려 자신과의 사이를 이간질시켰다. 누구보다 믿고 존경하며 의지하던 정몽주와 적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무명의 의도가 무엇이든간에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먼저 그들을 제거하여 최악의 상황을 막아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애초의 목표였던 토지개혁까지 이루려 한다. 의도를 가지고 이방지(변요한 분) 등을 뒤쫓다가 어느새 자신들이 함정에 빠진 사실을 길선미(박혁권 분)가 알아냈을 때 묘한 배신감에 전율마저 느껴야 했었다. 길선미들은 물론 시청자마저 그 순간까지 그들이 함정에 빠진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어째서 고려인 채로는 안되는 것인가. 어째서 고려여야만 하는 것인가. 마지막까지 서로를 설득하겠다. 바로 이상과 신념의 차이인 것이다. 구체적인 개혁의 내용에 대해서는 정몽주 역시 정도전이 그동안 연구하고 준비한 것들에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반기고 있었다. 이대로만 된다면 고려도 전혀 새로운 나라가 될 수 있다. 전혀 새로운 질서를 이 나라 위에 세울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고려여야만 한다. 고려의 신하이고 고려의 백성이어야만 한다. 

사소하지만 그러나 결코 넘을수도 좁힐 수도 없는 간극인 것이다. 같은 개혁이라도 언제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누구를 위해 누구에 의해 누가 추진하는가에 따라 그 입장이 전혀 다르게 갈리고 만다. 그 와중에도 서로를 증오하거나 적대하는 대신 자신이 설득하여 상대를 바꿀 것을 선언하고 있었다. 오로지 지식과 명분을 앞세우는 유자의 싸움이란 바로 이런 것일 터다.

역사에 부끄러운 이름으로 기록되지 않으려 한다. 단지 지금을 살아가는 지금의 백성들만이 자신에게는 의미가 있다. 후세에 누가 자신을 일컬어 무어라 말하든 결국 가치있는 것은 지금의 자신이고, 자신의 행위이고, 그로 인해 울고 웃고 화내고 슬퍼할 지금의 사람들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내가 인지하고 내가 의식할 수 있는 백성들만이 나의 백성들이다. 한 편으로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이상적이다. 나와 당장 상관없는 존재들마저 의식하여 자신의 행동을 구속당한다. 

어쩌면 의도된 대비라 할 수 있다. 딱 그 가운데 정도전이 있다. 정도전에게 인지할 수 없는 현실의 백성으로서 분이(신세경 분)와 이방지, 연희(정유미 분)가 항상 주위에 함께 있다. 이상을 위해 현실을 돌아보지 않고, 현실을 위해 이상마저 수단으로 여기고 만다. 정몽주와 이방원의 만남이 흥미롭다. 첫만남부터 그들은 서로 파국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들은 결코 서로를 용납할 수 없다. 홍인방과 하륜(조희봉 분)등과는 달리 이방원에게 그는 자신의 정반대편에 있다.

드디어 이방지가 십수년만에 어려서 헤어진 어머니를 만난다. 길선미가 숨어든 어느 산속의 절에서 우연히 무명의 지시를 전하던 늙은 여인을 부축해 가는 어머니와 마주치게 된다. 정도전도 그녀를 알아보고 있었다. 과연 자신들과 적대하는 조직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어머니의 존재는 이방지와, 그리고 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자칫 자신들을 낳아준 어머니와 적대해야 하는 상황마저 벌어질 수 있다.

복잡하게 얽혀간다. 기존의 이색(김종수 분)을 중심으로 모인 기존의 권문세족과 비밀에 가려진 무명, 그리고 정창군을 만나고 온 정몽주, 이방원마저 민제(조영진 분)의 집에서 하륜과 다시 만난다. 고려를 지키고, 고려를 무너뜨리고, 혹은 자신의 욕망만을 쫓으려 한다. 개인의 이상과 신념마저 욕망으로 뒤바뀐다. 이타라는 이기와 이기라는 이타가 서로 맞부딪힌다. 길선미는 자객이기도 했다. 신념과 의리가 살기를 띈다. 점점 더 빠져들어간다.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