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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7.13 07:39

스파이명월 "에릭과 한예슬이 들려주는 정신없는 수다"

소통을 거부한 그 촌스러움이 유쾌하다.

 
대개 들으라고 하는 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듣고 동의해달라고 하는 대화와, 다른 하나는 그냥 들으라고 하는 일방적인 수다. 이야기도 이 둘로 나뉜다. 동의를 바라고 세심하게 접근하는 이야기와 그냥 일단 들려주고 보는 이야기. 스파이명월은 이 중 후자에 속한다.

벌써 설정부터가 동의를 구하는 설정이 아니다. 북한사회에서 확산일로에 있는 한류를 단속하기 위한 한류단속반, 어쩐지 그럴싸 하지만 한 눈에도 북한 공작원 한명월(한예슬 분)과 한류스타 강우(문정혁 분)를 엮기 위한 작위적인 설정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아예 대놓고 고증이니 개연성이니 하는 것들은 한 쪽에 치워놓고 이야기 자체의 재미만을 추구하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그리고 이후의 전개도 그러한 처음의 선언에 충실해 이루어지고 있다.

하필 직속상관인 고위장성의 딸이 한류스타 강우의 팬인 탓에 명령까지 받들고 싱가포르로 콘서트를 보러 간 것까지는 그래도 그럴 수 있다 하겠다. 하지만 그 딸의 지시로 강우의 사인을 받으려 하루종일 그를 쫓아다니고, 더구나 그 과정에서 한명월이 보여주는 모습들이란 특수요원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어설픔이었다. 한명월의 몸짓 하나, 표정 하나까지 마치 수다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결국 강우를 쫓아 잠입해 들어간 경매장에서 강우를 습격하던 최류(이진욱 분)와 충돌하며 그것이 마침내 그녀가 독단적으로 남한사회로 잠입해 강우에 접근하는 이유가 된다.

확실히 이렇게 이어 놓으니 뭔가 딱딱 맞물리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 고위장성의 딸 때문에 싱가포르로 가고, 그래서 강우와 얽히고, 그러다 보니 최류와 충돌하고,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남한으로 잠입해 강우에 접근하고, 그런데 우연찮게 이런저런 사건들이 얽히며 오해가 겹치면서 강우와도 상당히 가까이 밀착하게 되고. 다만 문제는 그 우연찮게다. 과연 발단이 그러해서 결론이 그리 나온 것인가? 아니면 결론이 내려지고 그리 끼워맞춰진 것인가? 차이라면 각각의 과정에서 얼마나 개연성 있게 설득력을 가지고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는가? 없었다.

당장 80년대부터 잠입해 암약하고 있던 간첩 한희복(조형기 분)의 존재부터가 그렇다. 난수표로 암호를 해독하는데 워낙 안하던 일이라 머리에 쥐가 날 것 같다. 한명월이 입원해 있는 병실로 잠입할 때는 이게 과연 특수요원이 맞는가? 한명월만큼이나 어설프다. 뭣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아무리 30년 가까운 세월을 대한민국 정부의 안보망에 걸리지 않고 활동해 왔는데 그렇게 어설플 수 있을까? 더구나 그 한희복과 북한의 당국이 소통하는 통로인 라디오 사연은 어찌할 것인가? 한희복이나 북한당국이 보낸 메시지를 라디오DJ가 소개할지 안할 지 어떻게 알고.

한희복이 한명월의 붕대에 추적기를 달아 놓는 장면은 눈치를 못 채는 게 이상할 정도로 부자연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니까. 의문은 필요없는 것이다. 고위 군장성을 포섭하러 왔다가 복상사시키는 바람에 윗선과 연락이 끊겼다는 또다른 고정간첩 리옥순(유지인 분)역시 마찬가지다. 여성성이 거세되다시피 한 한명월에게서 여성성을 이끌어내야 하니 그를 위한 교관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그 교관은 여성성의 상징과 같아야 할 텐데, 그것을 아예 드라마는 복상사라는 아주 간결하면서도 확실한 키워드로 정리해 버렸다. 하기는 한희복과 리옥순이 나란히 앉아 자기 세대에게는 공작원에게도 낭만이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장면보다 더 이상한 장면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필 고등학생 팬으로 위장하고 잠입한 촬영장에서 가스가 폭발하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최소 20대 중반일 한명월을 강우를 비롯한 주위사람들 모두가 여고생으로 오해하고, 그러니까 강우가 계속해서 한명월을 자신을 쫓아다니는 팬이라 여기는 것이겠지. 여기에 한명월이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오해까지 더해지며 강우는 한명월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대해 납득하고 또한 동정함으로써 한명월이 강우의 주변에 머물 이유를 만들어 버린다. 아마 이 가운데 하나만 빠졌어도 강우와 한명월은 여전히 전혀 모르는 타인일 - 아니 한명월 입장에서만 강우가 가지고 있는 책을 노리는 관계에 있었을 테지만.

한희복이 보낸 암호가 DJ의 자진검열에 의해 잘못 전달되고 -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멍청한 스파이가 확실하지도 않은 라디오 사연을 암호의 수단으로 쓰겠는가 말이다. 마치 오래된 스파이물을 보는 듯한 허술하면서도 어쩌면 낭만적인 설정일 것이다. 아니 실제 작가는 오래된 스파이물에 대한 오마주로써 그런 설정을 넣은 것인지도 모른다. 한희복과 리옥순의 대화는 단순히 웃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가 자신의 소회인지도 모르겠고. - 아무튼 그로 인해 혼선이 오면서 한명월을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그것이 자신에 대한 공격의 빌미가 되는 것을 알고 고위장성 김영탁(김하균 분)은 다시 명령을 바꾸게 되고. 그렇게 두서없이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강우가 마침내 한명월과 키스를 하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역시 그 장면을 위해서.

아마 드라마에 대한 평이 갈리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원래 수다라는 것이 그렇다. 시끄럽거나, 아니면 왁자하니 재미있거나. 수다란 개연성을 따지지 않는다. 논리성도 따지지 않는다. 그냥 떠드는 것이다. 듣고 있는가도 고려치 않는다. 그냥 늘어놓는다. 그냥 떠든다. 과연 그것을 그냥 듣고만 있는가. 거기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하고 반박하려 드는가?

반박한다는 것은 동의하려 한다는 것이다. 어떤 동의할만한 것을 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수다를 떠는 당사자가 그다지 생각이 없다. 자기 이야기에 취해 들어주기만을 바랄 뿐. 어쩌겠는가? 들어주는 것이다. 그저 생각없이 귀를 열고 이야기하는 바를 따라 정신을 놓는다. 말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어느샌가 상대에게 동의하게 된다. 웃게 된다.

장면 하나하나가 중요하다. 시퀀스 하나하나가 중요하다. 전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정통코미디다. 전체적인 이야기란 각 장면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웃음을 주기 위한 설정에 불과하다. 전체적인 짜임새나 구조라는 것은 웃음과 웃음의 연속에 불과하다. 포르노를 떠올려 보면 되겠다. 포르노에서 시나리오란 어떤 역할을 하는가? 블록버스터 영화 가운데서도 사실상 시나리오를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 작품들이 많다. 중요한 것은 진정 보여주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에릭(문정혁)의 매력이면 되었다. 한예슬이 갖는 매력이면 충분했다. 더불어 그들의 들려주는 수다면 될 것이다. 확실히 에릭도 한예슬도 말이 많다. 입으로 하는 말도 많지만 표정과 몸짓으로 하는 말도 많다. 들어달라고. 듣고 웃어달라고. 자기가 하는 말에 바빠서. 오로지 자기 말만 하고 있다.

아마 재미없게 느낀다면 그같은 수다가 피곤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이고. 혹은 논리와 구조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재미있게 보았다면 그런 것 상관없이 그저 들려주는 이야기로만 만족할 수 있는 것일 터다. 필자의 경우가 그렇다. 에릭과 한예슬은 수다를 참고 들어주기에 충분한 매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작가와 감독의 입담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궁금하다. 에릭이 보여줄 앞으로의 모습들이. 한예슬이 들려줄 끊임없는 수다가. 이진욱과 조형기, 유지인 등 등장인물들이 다채롭게 펼쳐나갈 수다들이. 기꺼이 들어줄 준비가 되었다. 그만한 매력들이 있다. 그만한 재미가 있다. 입담이 좋다. 입담이 좋으면 어지간한 수다도 즐겁다. 물론 그럼에도 수다 자체가 싫다면 어쩔 수 없을 테지만 말이다. 말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수다다.

아직까지는 합격점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코미디의 원점일 것이다. 전체적인 내러티브나 구조보다는 장면장면의 웃음과 재미를. 입담이란 그 장면장면을 어떻게 묘사하는가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허풍이란 그것이 논리적이나 사실적이어서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분명 거짓말인 것을 알면서도 귀기울여 듣게 된다. 그런 힘이 있다. 다만 자칫 그런 정직함이 촌스러움으로 비치지는 않겠는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드라마는 꽤 촌스럽다. 주인공들의 세련된 외모에도 그렇다. 해결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그 촌스러움에 웃기도 하지만 그 촌스러움에 얕잡히기도 한다. 얕잡히는 것 또한 웃음의 이유겠지만 말이다. 감안하며 본다면 충분히 재미있지 않을까. 만족하며 보았다.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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