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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04.23 09:20

직장의 신 "그 노예 한 번 해 볼 수 있을까 해서 버티는 거라구!"

우리의 미래는 미스김이 아니라 봉희언니야!

▲ 사진제공=KBS 미디어, MI INC.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계약직이라서만은 아닐 것이다. 회사에 일이 많고 그래서 모두가 정신없이 바쁜 와중이라면 정규직이라도 눈치때문에라도 하루 쉬겠다는 말을 하기가 그리 어렵다. 혹시라도 상사의 눈밖에 나지는 않을까? 그로 인해 인사고과에 안좋은 영향이 가지는 않을까? 주위의 동료들은 자기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게 될까? 앞으로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러고도 괜찮을까? 그러고도 아무 문제 없을까?

잠시 몇 년 다니고 말 직장이 아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보아야 할 얼굴들이고 함께해야 할 사람들이다. 자기가 몸담게 될 직장이다. 아무리 급한 사정이 있더라도 이후를 생각한다면 보다 자신을 양보할 필요가 있다. 조금 더 인내하고, 조금 더 손해보고, 중요한 일이 있더라도 조금만 더 뒤로 미룬다. 차이라면 당장 실직이라는 현실의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계약직과는 달리 정규직의 경우 고용이 보장된 상태에서 이후의 직장에서의 자신의 위치나 모습에 대한 나름의 궁리인 경우가 많다는 점일 것이다. 보다 편하게 주위로부터 인정받으며 나아가 모두로부터 인정받는 자리에까지 오르고 싶다. 만족한 직장생활을 하고 싶다.

물론 개인이란 독립된 단위일 것이다. 존엄한 인격으로써 마땅히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써 존중받아야 하고 배려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고용된 상태에서의 개인이란 독립된 인격인 동시에 고용주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으로써 존재하게 된다. 노동력이란 수단이다. 개인은 수단으로써 자신의 노동력을 임금을 받고 고용주에게 제공하고, 고용주는 적당한 임금을 지불하고서 그 노동력을 산다. 그리고 그렇게 고융주가 사들인 개인의 노동력은 고용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의무가 주어진다. 개인으로서도 분명 보호받아야 할 테지만 그런 한 편으로 지불된 임금 만큼 고용주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 수단으로서도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수단이란 목적을 위해 존재하며 목적을 위해 봉사할 때 그 의미를 갖는다.

미스김(김혜수 분)이 정규직을 두고 '회사의 노예'라 말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면 미스김은 다른가? 몸이 아픈데도 회사에 일이 있으니 어떻게든 출근을 해야 한다. 도저히 회사에 나오지 못할 사정이 생겼어도 회사에 일이 급하고 중요하면 다른 일들을 미뤄두고라도 회사에 출근해서 주어진 일들을 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퇴근시간이 지났음에도, 업무시간이 끝나고 다시 개인의 일상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럼에도 회사의 일이 무엇보다 급하고 중요하기에 다른 일은 뒤로 미뤄두고서라도 회사일을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으면 안된다. 개인의 시간이 없다. 개인이 자신을 위해 할애할 시간이란 것이 없다. 어쩌면 그런 것이 불과 얼마전까지 아니 지금도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미스김은 그같은 너무나 당연한 직장인의 현실에 대해 단호히 반기를 들려 한다. 퇴근시간 이후에 그녀에게 일이란 없다. 점심시간과 업무 이외의 시간은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시간으로써 회사와는 전혀 별개로 존재한다. 회사사람들과의 관계조차 이 시간 동안에는 철저히 거부하고 거리를 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같은 자신의 원칙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미스김은 몸조차 가누기 힘든 아픈 몸을 이끌고 회사에 출근해야 한다.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조차 그녀는 회사에 출근해 일을 하려 한다. 정주리(정유미 분)로 인해 회사의 일에 차질이 생기자 그녀는 심지어 오토바이를 뺏어타고 정주리가 면접을 보려는 곳까지 직접 달려가 비밀번호를 알아오기까지 한다. 이율배반이지 않을까?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어차피 직장에서 개인이란 수단이다. 개인이란 인격이 아닌 노동력으로서 존재한다. 누구를 위한 노동력인가? 누구를 위한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인가? 기업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다. 회사와 자신은 동등하다. 동등한 주체로써 대등하게 계약을 맺는다. 미스김 자신이 하나의 기업이다. 미스김 자신에게 있어 미스김이란 자신이 일을 해야만 하는 목적 즉 고용주다. 자신이 고용하고 자기가 일을 하니 그 관계란 매우 엄격하다. 자기가 자신을 배신하고 기만하는 순간 미스김이라고 하는 자신의 정체는 붕괴되어 버리고 만다. 회사일이 걱정되어 아픈 몸을 끌고 회사에 출근한 장규직(오지호 분)처럼 그녀는 미스김이라고 하는 자신의 고용주를 위해 기꺼이 아픈 몸에도 회사에 나가 일을 하려 한다.

미스김이 정주리에게 유독 야멸차도록 냉정하게 대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회사에 정식으로 고용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직은 임시일 뿐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오로지 자기가 책임지지 않으면 안된다. 주어진 일들에 대해서도,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확실하게 책임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어진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더구나 정규직이 되고 싶다 말하면서도 회사가 필요로 할만한 무엇도 스스로 갖추려 하지 않는다. 그저 기대고 눈치보고 구걸하듯 바라기만 할 뿐이다. 그런 주제에 이번에는 또 다른 더 좋은 조건을 찾아 면접을 보기 위해 회사일마저 내팽개치고 있다. 정주리에게 자신이란 수단조차 아니다. 목적은 더욱 아니다. 그녀는 대체 무엇인가?

그럼에도 결국 드라마를 보는 입장에서 정주리에게 자신을 이입하고 마는 것은 자신도 역시 정주리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자각 때문일 것이다. 자신을 수단으로 여기고 싶다. 차라리 회사라고 하는 목적을 위한 도구이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한 단지 수단이거나. 하지만 정작 회사는 자신을 봐주지 않는다. 자신을 수단으로 도구로 여기지만 그렇다고 수단으로서도 도구로서도 봐주지 않는다. 공구상자에 가득 들어있는 못 가운데 하나를 특정해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란 그다지 없다. 정주리가 아니어도 된다. 아니 장규직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수단이라는 목적마저 잃는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자기가 더 가치있는 존재일 수 있는 다른 곳을 찾아나서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경험이 역시 한 번 쯤은 있을 것이다. 더 나은 직장을 위해 회사에 거짓말을 하고 면접을 보러 간다. 더 나은 조건을 찾아 회사를 잠시 뒤로 하고 여기저기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다닌다. 계약직이야 말할 것도 없다. 3개월뒤 그들이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될 지 아무도 모른다. 다시 계약이 끝나 다른 계약자를 찾아나서게 되기 쉬울 것이다. 더 안정된, 더 나은 조건의 직장은 그들이 바라는 모든 것이다. 지금의 직장이 자기에게 원하는 것이 그런 것인데 굳이 더 좋은 기회를 놓아버릴 이유는 없다. 노예조차 되지 못하는 자신에게는 노예의 비참한 처지조차 그저 부러울 뿐이다. 정주리는 분노한다. 처음 미스김의 일갈에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자리를 비키던 계약직 5년차 박봉희(이미도 분)처럼.

어쩌면 모두에게 꿈이었을 것이다. 모두가 바라는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직장의 신>이다. '신'이란 인간의 인지 너머에 존재하기에 신인 것이다.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 저 너머에 존재하기에 그는 신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땅에 발을 딛고 인간 가운데 살아간다. 차라리 분노하고 만다. 신이 될 수 없음에. 인간일 수밖에 없음에. 그래서 다시 신은 인간이 된다. 사실은 신도 인간과 다르지 않았다. 그토록 완벽해 보이는 미스김조차 사실은 정주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위로가 되었을까? 무정한(이희준 분)의 배려에 정주리는 다시 힘을 얻는다. 그녀가 자신을 위한 목적이나 수단이 되었는가는 아직 모른다. 다만 다시 한 번 꿈을 꿀 수 있게 된 것은 맞을 것이다. 아직 어리다. 아직은 순진하다.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회사에 거짓말까지 해가며 면접을 보러갔던 정주리의 손에 들린 홍삼세트가 매우 디테일하다. 굳이 자세한 내용을 풀어 설명하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납득해 버리고 만다. 다단계였다. 흔한 수법이다. 그리고 흔하게 그에 속아넘어가는 모습일 것이다. 허튼 희망과 그런 자신에 대한 환멸과 혐오. 그럼에도 꿋꿋하게 일어난다. 무엇도 확정된 것이 없다. 그녀는 강하다. 우리들 자신들의 모습 만큼이나.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녀가 주인공일 것이다. 미스김이라는 신을 경배하면서도 그를 질투할 수밖에 없는 평범한 인간인 그녀가 주인공일 것이다.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약하면서도 강하고 여리면서도 독하다. 자기에 끊임없이 실망하고 분노하면서도 끝내 그런 자신을 부여잡고 앞으로 나간다. 때로 넘어지고, 때로 실수도 하고, 때로 전혀 엉뚱한 길로 들어섰다가도, 그러나 어느새 다시 길을 찾아 앞으로 나간다. 아직은 한심하고 우스운 처지에 몰골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꿋꿋하게 오늘을 살아간다. 내일을 바라보며.

미스김과 장규직이 닮은 이유일 것이다. 장규직은 회사를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그 회사를 위해 기꺼이 아픈몸을 이끌고도 회사에 출근할 수 있다. 차리라면 장규직에게 그 대상이 회사라면 미스김에게 그 대상이란 자기 자신이라는 것. 동종증오일 것이다. 회사와 자신이라는 미묘하지만 큰 차이가 그들에게 동질성과 함께 서로를 밀어내려는 혐오와 경멸의 감정을 갖도록 만든다. 하지만 사랑의 반댓말은 무관심일 것이기에. 그들은 결코 서로에 대해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미스김이 그것을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애써 무심으로 자신을 가리려 한다. 역시 이 드라마는 로맨틱 코미디다.

일을 쉬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너무 아팠다. 너무 힘들었다. 그러나 끝내 그 말을 하지 못했다. 버려지고 싶지 않았다.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고 싶지 않았다. 나름 필사적이었다. 노예라지만 그조차 되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필자 역시 노예라도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기에.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드라마가 아니다.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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