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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4.08 08:21

<로열패밀리>한지훈, 마침내 선악과를 따다!

지성있는 존재의 비극적 딜레마...

 
어쩌면 지식인이기에 갖는 비극일 것이다. 아니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피할 수 없는 비극일 것이다. 차라리 모른 체 넘어갈 수 있었다면. 알더라도 모르는 체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고 납득할 수 있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제 일 가설 조니가 찾으러 온 건 엄마가 아니다. 가지고 온 사진도 엄마 사진이 아니다.”

“제 이 가설 조니는 엄마를 찾으러 왔다. 사진 또한 엄마 사진이다. 그러나 알고 보니 조니의 엄마는 김여사와 닮은 사람이었다.”

“제 삼 가설 조니는 엄마를 찾으러 왔다. 엄마는 김여사다. 그리고는 조니는 떠나려고 했다. 엄마의 행복을 위해서. 그러니까 조니가 죽을 이유는 없는 거다.”

그렇게 여긴다.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타협한다. 흔히 인지의 부조화라 하는 것이다. 믿고자 하는 진실과 존재하는 사실이 서로 충돌할 때 존재하는 사실을 진실에 맞춰 재해석하는 것이다. 결론에 맞추어 취사선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그렇게 납득해 간다.

그래서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 최소한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진실을 마주하지 않아도 될 것이므로. 굳이 몰라도 되는 사실을 알 필요가 없을 터이므로. 항상 보고 싶은 것만, 듣고 싶은 것만, 믿고 싶은 것만, 그것은 인간이 최초로 발견한 낙원과도 같다.

“조니의 죽음과 김여사는 아무 관계도 없다. 내가 아는 김여사가 아들을 죽일 확률은 제로니까.”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래서 떠오르는 의혹들을 애써 무시한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래서 떠오르는 의혹들을 애써 무시한 채 결론을 내린다.

“그래, 다음 의문은 없어! 그게 다야! 그게 다! 그게 다!”

그것은 자신을 속이기 위한 주문이다. 납득하지 못하는 자기를 납득시키기 위한 주문이다.조증과 울증은 같이 온다. 조증과 울증은 같다. 때로 사람은 웃기 위해 울고, 울기 위해 웃는다. 웃어야 할 때 울고, 울어야 할 때 웃는다. 북받치는 감정을 참을 수 없어서. 치밀어 오르는 그 격정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어서.

“내친 김에 해외로 뜰까? 어? 몰타나, 아니, 아니, 아니, 지중해의 코르시카 섬... 거긴 진짜 대박인데, 내가 꼭 가보고 싶은 데거든. 아름다운 성당에서 키스도 해 보고, 왜 그런 데 가면 없던 애정도 솟구치고 같이 있는 사람도 그냥 막 사랑스럽고 그런 게 아닌가?”

그것은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그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단계에서 머문다. 이미 있는 사실마저 무시한 채,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생각을 멈춘다. 오로지 믿을 뿐이다. 믿고 납득할 뿐이다. 납득할 수 있도록 이해할 뿐이다. 이해란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가장 안전한 탈출구다. 이해할 수만 있다면 문제될 것도 없다.

“다음 의문은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이기에. 이성을 가진 인간이기에. 그 이성은 끊임없이 단련해 온 지성인이기에. 그는 그 자리에 머물지 못한다. 낙원으로부터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비극이다. 끝내 의심하여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던 오르페우스와 이자나기의 비극이기도 하다. 왜 굳이 사랑하는 연인을 의심하여 프쉬케는 에로스를 잃고 선량한 나무꾼은 사랑하는 아내가 여우로 바뀌는 것을 보아야 했을까?

하와는 창조주를 의심함으로써 선악과를 따먹었다. 수많은 유럽의 사상가들이 종교의 신성에 도전함으로써 마침내 인간의 시대를 열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처럼 신성으로부터 독립한 인간의 앞날이 그다지 순탄치만은 않았다. 단지 신의 뜻을 쫓으면 되었던 것이 이제 스스로 사유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이 제시한 길만을 쫓으면 되었던 것이 스스로 길을 찾고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혼란과 파괴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아마 그래서 지금도 많은 이들이 종교에 의지한 채 종교가 주는 안돈에 머물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대로 믿고 의지할 수 있다면. 여전히 믿음을 간직한 채 그 자리에 머물러 만조할 수 있다면.

그러나 그럴 수 없기에 인간이다. 그러기 위해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한 것이다. 스스로 고민하고 스스로 체험하고 스스로 사유하여 스스로 결론을 내리라. 주어진 진실에 충실하라. 보이는 사실에 솔직하라. 믿음이란 결국 자신의 나약함이 만들어낸 우상에 불과하다. 진리란 존재 그 자체인 것이다. 구원도 존재 그 자체에 있다.

“그래, 당신하고 나 사이에 있는 진실, 그리고 당신이 무죄일 수밖에 없는 증거, 그걸 내 손으로 꼭 찾아내겠어.”

진실이란 반드시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희망차고 밝은 것만도 아니다. 진실은 때로 추악하고 고통스럽다. 잔인하고 냉정하다.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증오도 원망도 분노도, 마찬가지로 그 어떤 동정도 기대도 애정도 없는 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외면한 구원은 구원이 아니다. 진실을 외면한 채 단지 머물고만 있을 뿐인 안돈은 거짓된 기만에 불과하다. 그리 믿고 여기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항상 사람들은 진실을 찾아 헤맨다. 진실이란 진리로 이르는 출구다. 구원에 이르는 통로다. 때로 아프고. 때로 추악하지만. 차마 감당할 수 없이 더럽고 몸서리치게 무섭지만. 그래서 이만하면 되겠다. 이정도면 충분하겠다. 더 이상은 무리다. 그런 가운데서도 스스로를 헤집고 찢어가며 진실을 찾아 떠돈다. 나아간다.

그것은 고통으로 가는 문이다. 굳이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혼돈 속으로 자기를 떠미는 행위다. 그러나 그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리에 이를 수 없다. 진리에 이르지 않고서는 구원에도 이르지 못한다. 김인숙(염정아 분)이 한지훈(지성 분)이 진실에 다가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막으려 하기보다 오히려 한지훈에 의해 자신의 죄를 단죄받고 싶어하는 것도 그래서다. 죄를 끌어안고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속죄를 통해서만이 구원을 받는다.

그래서 한지훈은 죄의 증거이며 속죄의 사자인 것이다. 그래서 김인숙은 한지훈 앞에서 잊고 있던 순수를 - 인간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다. 오로지 한지훈 앞에서만 행복하다 말할 수 있다. 오로지 한지훈 앞에서만 진심어린 웃음을 지을 수 있다.

과연 한지훈이 알아가는 진실이란 김인숙에게 있어 파멸인가? 아니면 또다른 구원인가? 그것은 지금 김인숙을 내몰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답이 있을 것이다. 빈곤인가? 아니면 신분상의 한계인가? 그도 아니면 과거의 어느 시점에 두고 온 인간으로서의 김인숙 자신인가? 지금도 조금씩 떼어 어딘가 묻어버리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김인숙 자신인가? JK를 소유하게 되면, JK라고 하는 욕망의 정점에 올라 야심을 이루게 되면 그녀는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한지훈이 모든 것을 모른 체 묻어둔다면 그것으로 그녀는 행복할 것인가?

“행복하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엄마라면! 정말 모르는 거야?”

조동진(안내상 분)의 아내 임윤서(전미선 분)에 대한 감정이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힌다. 알고 있었다. 집사장 엄기도(전노민 분)와 아내 임윤서와의 관계를.

“어머니, 유언장 바꾼 것 있는지 알아봐. 어떻게든 해봐. 엄집사를 움직이든...”

어쩌면 JK패밀리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가 바로 공순호(김영애 분)회장의 첫째아들 조동진이다. 하긴 그래서 공순호 회장의 눈밖에 난 것일 테지만. 당당한 척 하면서도 끝내 분에 못이겨 술잔을 집어던지는 모습이 그래서 오히려 인간답다.

물론 그렇다고 조동진 역시 JK라고 하는 괴물의 마력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한심해지려고 해. 선배는 오로지 김인숙이라는 단어만을 입력해 놓은 GPS고, 나는 JK라는 단어만을 입력해 놓은 GPS야.”

사실은 한지훈에 대한 절망을 이야기한 것이지만 조현진(차예련 분)의 이 한 마디는 조동진을 비롯한 JK패밀리, 나아가 임윤서를 포함한 로열패밀리 전체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만에 하나 JK 김인숙에게 경영권 넘기게 되면 언니는 결혼생활 제고해보도록 해. 아버지 때야 우리가 그쪽 힘이 필요했으니까 JK와 공조를 했지만 지금은 솔직히 매사업마다 부딪히잖아? 나도 언니 솔직히 거기 있는 거 부담돼. 사돈이라고 뭐 하나 힘되는 것도 없고. 형부하고 언니 불화 온 재계에 다 퍼져 있고. 잘 나올 생각을 해봐. 휘청하게끔 하고 나오면 우리가 고맙지.”

연수기 기술을 임윤서가 빼돌렸다고 의심하면서도 그것을 내색 않는 조동진이나, 더 이상 구성에 이익이 되지 않으니 차라리 JK를 휘청이게 하고 나오라고 하는 임윤서의 동생이나. 올케인 조현진을 상대하기 위해 동맹을 맺으려는 김인숙과 임윤서. 역시 김인숙과 한지훈을 배제하려는 조현진은 그것을 들으며 자신의 현실을 깨닫게 된다. 가족은 없다. 인정도 없다. 인간도 없다. 한지훈에게 한 저 말은 그런 현실에 대한 인정이며 순응인 것이다.

공포가 지나치면 오히려 짐승은 사나워진다던가? 어설프게 때리면 죽음의 공포에 몰린 짐승은 살기 위해서라도 사람을 물 수밖에 없다. 살기 위해 배반을 선택한다. 어찌 보면 김인숙도 그런 경우였을 텐데. 김인숙에 대한 공순호의 가혹한 행동이 도리어 임윤서의 불안과 공포를 자극하고 말았다. 더구나 짓밟힌 존엄에 대해서도. 구성이 JK 앞에 아뭇소리도 못할 하찮은 존재였다면 눌러버릴 수도 있으련만. 누구나 JK를 두려워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항할 힘이 있다면 차라리 물어뜯으려 한다. 공순호가 가진 약점이며 김인숙이 물어뜯으려는 부분이다. 김인숙의 힘이다. 인간. 그 욕망과 죄에 대해서.

내가 <로열패밀리>를 좋아하는 이유다.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인간의 죄에 대해서. 인간의 상실과 증명에 대해서. 속죄와 구원에 대해서. 어떻게 보면 상당히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모성의 자궁을 상징하는 듯한 김인숙의 기도실이 보여주듯. 자식을 낳고, 자식을 기르고, 죄를 낳고, 그 죄를 기른다. 그리고 파멸을 기다린다. 파멸은 구원일 것인가?

그 독한 욕망의 향기가 좋다. 그 추악한 죄의 향기가 매혹적이다. 그러면서도 은은하게 깔리는 구원의 메시지. 단순한 욕망의 이야기이지만 인간이란 바로 욕망의 존재이기에 인간의 이야기가 그 가운데 있다. 단지 선과 악으로만 단정지을 수 없는 인간의 존재가.

과연 김인숙은 악녀인가? 사회봉사활동에 나선 김인숙의 모습은 단지 위선이고 가면에 불과한가? 그런 김인숙을 괴롭히는 공순호의 존재는? 그녀는 악인가? 선인가? 조현진은? 임윤서는? 한지훈은 어떤가? 김인숙이 김마리가 되듯. 과연 누구를 선으로 누구를 악으로 구분지을 수 있는가? 단지 존재한다면 인간, 그리고 인간의 욕망. 더불어 인간의 양심. 죄. 죄는 선도 악도 아니다. 단지 죄에 불과하다. 욕망 또한. 인간이는 존재 또한.

끝이 보이려 한다. 감추어져 있던 진실이 드러나고 한지훈은 그 진실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김인숙과 한지훈 사이에 가려져 있던 과거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며 한지훈과 만난다. 반드시 알아야 했지만 그러나 몰라도 되었던 진실을 마주하는 한지훈의 자세는? 분노할 것인가? 원망하고 증오할 것인가, 아니면 연민하여 용서할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엄기도가 아직껏 결혼하지 않고 있는 것은 조동진의 생각처럼 임윤서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김인숙 때문이었을까? 맞지도 않는 하이힐과 그것을 바라보던 엄기도의 모습. 단지 동정이라기에는 김인숙에 대한 그의 희생이 얼핏 한지훈을 보는 것 같다.

“김인숙씨를 마음에 두고 계신 겁니까?”

동류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무리이기 때문에. 엄기도 역시 같은 마음이기 때문에. 그래서 누구보다 빨리, 조현진이 한지훈을 사랑하기에 한지훈의 감정을 눈치챘 듯. 엄기도 역시 한지훈의 김인숙에 대한 감정을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이리라. 억측일까?

반전에 또 반전. JK를 둘러싼 욕망의 레이스가 점입가경을 이루고 있다. 김인숙을 둘러싼 진실과 다시 JK를 중심에 둔 김인숙의 싸움. 어느새 한지훈이 한 걸음 물러선 가운데 그 추악한 욕망의 진흙탕 속에서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마지막 순간에 한지훈과 죄와 마주하게 될 김인숙은 그녀의 뜻대로 당당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전개되어 갈 것인가? 아니 어느새 벌써 12회다. 이제는 어떻게 마무리 지으려 하는가를 물어야 할 때일 것이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여전히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말이다. 설레임의 시간이다. 다시 일주일의 기다림은. 아직 모르겠다.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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