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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2.09 13:26

정부의 게임규제정책에 대해 "우리 사회는 아직 그것들을 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가?"

게임이 있기 전에 폭력성은 있었다. 보다 근본적인 대안과 고민을 요구한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포르노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사회적 해악이 도사리고 있다. 다름아닌 인간과 인간의 성에 대해 대상화하고자 하는 경향이다. 인간의 성에 대한 극단의 묘사는 인간 자신은 물론 성에 대한 욕망조차 대상화하여 소비하도록 만든다. 더 이상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된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포르노를 보고 나면 그와 같은 충동에 사로잡히는가? 결코 아니다.

당장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법적으로는 포르노가 금지되어 있지만 인터넷이라고 하는 열린 공간을 통해 암암리에 많은 사람들이 포르노를 접하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그 포르노를 보고서 포르노에 나온 장면을 따라하고 싶어하는가? 아니 그것을 따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그다지 없다. 어째서일까? 그것이 나쁜 행위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학습된 이성과 훈련된 양심이 그것을 거부하도록 만든다.

당연한 것이다. 포르노란 인간이 갖는 성적 욕망의 산물이다. 인간의 당연한 성적 욕망마저 자본주의에 의해 사물화되어 나타난 것이 다름아닌 포르노라고 하는 매체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 자신의 성적 욕망과 싸워왔다. 종족번식과 일정 영역에서의 쾌락을 위한 성에 대해서는 허용하지만 그 이상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통제한다. 그 역할을 맡은 것이 도덕이고 각종 사회규범이고, 무엇보다 인간의 이성과 양심이었다. 왜 안되는가? 어째서 안되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인류의 오랜 화두 가운데 하나였다. 포르노 역시 그 연장에 있다.

과연 폭력성이란 게임으로부터만 비롯되는가? 아니 그 이전에 폭력 또한 인간의 본능적 충동 강누데 하나라는 것이다. 태초의 자연상태에서부터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폭력성을 유전자 레벨에서 체화해 왔다. 다만 과연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문명을 이룩해가는 과정에서 폭력성을 그대로 내버려두어도 좋은가? 고민이 이어졌고 그에 따른 대안이 나타났다. 최초에는 폭력이 곧 권력을 의미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폭력은 야만의 자리로 떨어지고 말았다. 게임이란 그러고 난 아주 최근에서야 인간의 본능적 충동 가운데 하나로써 폭력을 구체화하고 있을 뿐이다.

한 마디로 폭력의 문제인가? 아니면 폭력이라고 하는 본능적 충동을 억누르지 못한 개인의 나약함의 문제인가? 법이란 어째서 존재하는가? 교육이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선량한 사람을 위해 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선량하지 못한 사람들을 선량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법은 존재한다. 바르고 성실한 학생들을 위해 교육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학생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이끌기 위해 교육은 존재한다. 게임의 폭력성과 그조차도 감당하지 못하고 물들고 마는 개인의 나약한 이성과 양심, 어느 쪽이 더 문제일까? 하물며 그것이 교육과 관련한 정책이라면 더 그렇다.

학교폭력의 가해자들이 한결같이 변명처럼 하는 말이 있다. 필자는 그 말을 매우 진지하게 듣고 있다. 그럴 줄 몰랐다. 설마 그렇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심지어 왕따를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왕따인가도 모르는 아이들마저 있었다. 그저 놀아주고 있었을 뿐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피해자는 그 사실을 영혼에 새겨도 가해자는 아예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어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한 행위가 아닌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별 생각없이 그런 상황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별 문제가 아니겠거니.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교육이라는 게 얼마나 좋은 대학에 얼마나 많은 학생을 들여보내느냐가 전부가 아니다.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겠다고 무균실에만 가둬 놓으면 오히려 사람의 몸만 약해질 뿐이다. 병균은 병에 걸리는 그 순간까지 병에 대한 저항력을 길러준다. 과연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사람이 폭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가? 폭력이란 인간이기에 갖는 당연한 본능이고 충동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 폭력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무분별한 성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자고 아예 가둬두려고만 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말이다. 적절한 성교육은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성에 대해 책임지는 방법을 가르친다.

이번 정부의 게임에 대한 규제일변도의 대책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과연 그와 같은 강력한 규제정책을 채택하고 있지 않은 사회에서는 전혀 게임으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아무런 고민도 인식도 없어서 그러는 것일까? 상당히 하드코어한 - 매우 극단적인 일탈을 담은 내용의 포르노조차 합법화될 수 있는 것은 다름아닌 신뢰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이성과 양심, 무엇보다 그것을 강제하고 유도할 교육과 공공의 규범에 대한 신뢰다. 이런 정도는 충분히 사회가 감당할 수 있다. 충분히 그런 것들을 누릴 자격과 권리가 구성원들에게는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째서 그런 것들이 허용되지 않는가? 게임의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굳이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필자 역시 게임을 무척 즐겨하는 입장에서 게임이 개인의 생각과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았던 터라 그에 대해서도 충분히 동의할만한 여지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어차피 텍스트로 이루어진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다. 다만 그럼에도 그러한 영향들로부터 일상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일상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사회가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도대체 우리 사회의 무엇이 문제인가?

다시 말해 어차피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똑같이 즐기고 있는 게임이다. 오히려 어떤 나라에서는 우리나라에서보다 더 수위가 높은 표현들도 게임상에서 구현되고 있다. 그럼에도 정작 우리 사회에서만 게임을 강력하게 규제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강한 폭력성이 나타나고 있다. 게임이 문제인가? 아니면 그러한 게임이 주는 자극으로부터 스스로 저항할 힘을 갖추지 못한 우리 사회의 청소년들의 문제인가? 그렇다면 그 문제는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가? 그런데도 단지 게임만을 규제해서 얼마나 크게 효과를 볼 것인가? 무모해 보이는 것이다.

보다 교육이라고 하는 본질로부터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니겠는가. 스스로 책임질 수 있도록 가르친다. 폭력성이란 외부로부터 주입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내면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다스려야 하는 때가 온다. 아예 없는 것처럼 외면하려고만 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에 대해 고민하고 대책을 마련할 때다.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어른이 된 의무다. 사회의 책임이다. 만일 게임에 대한 규제가 그 일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적극 찬성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니 문제인 것이다. 너무 쉽고 빠르다. 그렇게 쉽고 빠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게임산업의 규모나 경제적인 이익에 대해서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교육이란 단지 경제로만 헤아릴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따라서 그 한 가지 의도에 대해서만 물으려 한다. 그것이 최선인가? 그것으로 좋은가? 그렇게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답답해지는 까닭이다. 쉽지 않다.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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