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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2.02 09:52

해를 품은 달 "왕 앞에서 할 말 다 하는 액받이 무녀, 비극의 답답함이 보이지 않는다."

세자빈에서 액받이 무녀로의 영락, 그러나 너무나 당당한 연우에게서 비극이 희석된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현명하다는 것은 자기가 놓은 상황과 처지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왕이다. 그 왕의 몸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그 왕이 지금 분노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앞에서 한낱 무녀가 따박따박 변명을 하며 자기 입장을 밝히고 있다. 과연 가능한 일인가?

순간 긴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왕이 없다. 무녀도 없다. 단지 한 남자와 한 여자만이 있을 뿐이다. 남자는 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여자는 무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더 이상 못할 말이란 없다. 눌러야 할 것도 감추어야 할 것도 없이 일단 하고픈 말은 다 토해내고 만다. 비록 그것이 왕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과연 무녀라는 것이 왕을 위할 주제나 되는가?

양명군(정일우 분)과 왕대비 윤씨(김영애 분)가 만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말이 좋아 왕의 서형이고 종친이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왕위를 노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는 언제든지 역모로 몰려 죽임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입장이다. 하물며 그의 주위에는 그를 떠받들려는 사람들이 들끓고 있다. 더욱 몸을 사려야 한다. 원작에서도 그래서 양명군은 깊은 한을 가슴에 묻어둔 채 세상을 속이며 평생을 바보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양명군이 감히 왕위를 논하며 왕대비를 위협하고 있다. 죽여달라는 뜻일까?

당금의 국왕인 이훤(김수현 분)이 워낙 사람이 좋고 양명군을 깊이 신뢰하고 있기에 그가 여직 살아있는 것이다. 아니 설사 국왕이 양명군을 믿어서 굳이 상관하려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국왕의 주위에 재대로 된 충신이 단 한 명만 있었어도 양명군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더욱 인내하고 자신을 감춘다. 자신을 감추고 또 인내하고 인내한다. 거기에서 양명군의 비극이 드러나는 것이다. 양명군의 비극을 더욱 연민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심지어 왕대비 앞에서조차 전혀 가리고 감추는 것 없이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없이 다 할 수 있어서야. 물론 그조차도 참고 또 참은 결과겠지만, 그럼에도 그의 속에는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켜켜이 썩어 부스러지도록 쌓여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너무 경솔했다. 그 작은 꼬투리 하나로도 그는 물론 그의 어머니까지 화를 당할 수 있다. 당장은 후련할지 몰라도 전혀 아무런 위기감도 느껴지지 않는 그같은 행동은 이후 크게 터뜨려야 할 양명군의 비극을 가려버린다.

어느새 심지어 국왕의 앞에서까지 속에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마는 연우(한가인 분)의 모습에 힘이 빠지고 마는 이유였다. 당당한 사대부의 딸로서 무녀가 되었다. 장차 국왕이 될 세자의 빈으로까지 간택되었다가 죽은 사람이 되어 비천한 무녀의 신분이 되어 온갖 수모를 견뎌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지금은 왕이 된 세자의 사랑을 당시 한몸에 받았었지만 이제 그녀에게 그에 대한 기억마저 남은 것이 없다. 그렇다면 그러한 연우의 영락에 대해 대비를 통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연우가 처음부터 무녀의 신분이었다면 상관이 없다. 무녀인데 당당하다. 무녀인데 왕앞에서도 당당히 제 할 말을 한다. 하나의 매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가 액받이 무녀로까지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이미 그 자체가 비극인데 정작 비천한 무녀가 되어서도 왕 앞에서 하고자 하는 말을 가리지 않고 다 할 수 있어서야 무슨 비참함이 있고 억울함이 있겠는가 말이다. 왕대비와 윤대형(김응수 분)의 악의에 의해 그같은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는데 여전히 그녀는 당당하고 자유롭다. 비극이 머물 자리조차 사라진다.

보다 대비하여 강조해 보여줄 필요가 있다. 연우가 얼마나 비참한 처지로 전락해 있는가? 왕대비와 윤대형의 음모에 의해 여주인공 연우가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했으며 그로 인해 어떤 아픔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연우가 겪는 비극이야 말로 장차 악역인 왕대비와 윤대형을 몰아내야 하는 가장 큰 동기가 된다. 연우의 비극에 동정할수록 더욱 그들의 몰락을 바라게 될 것이고, 왕대비와 윤대형 등 악역들의 몰락을 바라는 만큼 연우가 행복하기를 바라게 될 것이다. 더욱 드라마에 이입하며 몰입해서 볼 수 있는 장치가 되어준다. 연우가 겪는 비극의 깊이가 깊을수록 장차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되었을 때 그에 따른 기쁨 또한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벌써부터 찔끔찔끔 차곡차곡 쌓이고 있어야 할 연우의 한을 흘려보내고 있으니. 그것은 현명하고 당당한 연우의 원래 캐릭터와도 맞지 않는다.

연우가 어머니 신씨(양미경 분)와 엇갈리고 마는 장면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어째서 거기에서 연우는 굳이 어머니 신씨와 마주치고 그러면서도 서로 알아보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말았는가. 비극을 쌓기 위해서다. 안타까움을, 안쓰러움을, 아쉬움을, 연우와 어머니 신씨의 한을 시청자가 느끼는 답답함 속에 쌓아가는 것이다. 거기에서 만일 신씨가 연우를 알아보고 연우가 살아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연우는 차라리 신씨를 알아보는 쪽이 나았을 것이다. 바로 지척에 있으면서도 살아있다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상황.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비극이 한 순간에 해소되었을 때 그 희열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지만 드라마가 너무 친절하다. 너무 친절해서 시청자가 답답해 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너무 답답해서 시청자 스스로 간절히 바라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워낙에 시청자를 우선해 생각하다 보니 그러기 전에 드라마가 먼저 나서서 대충의 상황을 수습한다. 굳이 거기에서 신씨나 심지어 중전 윤보경(김민서 분)까지 연우의 꿈을 꾸고 있을 것이 무언가? 연우가 밀실에 갇히고 그녀의 위기에 중전과 신씨는 나란히 그녀의 꿈을 꾸고 있었다. 더구나 그 꿈으로 인해 중전은 불길함을 느끼고 왕과 월이라 이름하게 된 연우의 사이를 의심하게 된다. 너무 공교롭다.

의문이 있으면 풀어주고, 답답한 것이 있으면 틔어주고, 혹시라도 이해하는데 지장이 있을까 하나하나 상세하게 풀어서 설명해준다.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굳이 필요하지 않더라도 보편적인 코드 - 클리셰에 의존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드라마가 둥글어진다. 모난 것은 깎이고 급한 것은 완만해지고 흔히 볼 수 있는 무난한 모양을 갖추어간다. 상당히 매력적인 소재인데 이제는 과연 최초의 소재 이외에 남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이훤과 윤대형을 중심으로 한 외척과의 싸움은 자못 흥미롭기는 하지만 그러한 무난함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그나마 이훤과 연우의 사랑마저 이런 식으로 미리 김을 빼 놓는 탓에 그 비극과 비장함이 제대로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더 비극적이고 더 비장해야 두 사람의 행복에 대한 간절함도 커질텐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재미있다. 충분히 비극적이고 충분히 비장하다. 답답하고 화나는 것이 있다. 왕대비 윤씨와 윤대형은 이미 필연적으로 몰락해야 하는 악 그 자체로 그려지고 있다. 바로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훤과 연우의 처지 역시 안타깝기 그지 없을 정도다. 더구나 무녀가 되어 연우가 겪어야 하는 온갖 수모와 고초는 그녀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든다. 반드시 악인을 응징하고 연우가 이훤과 행복할 수 있기를.

다만 그럼에도 한 걸음만 더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는 것이다. 더 극적으로, 더 간절하고 안타깝게, 그래서 더욱 드라마의 비극에 몸서리쳐지도록 공감하며 이입할 수 있도록. 드라마란 격정이다. 격정이 크고 깊을수록 드라마도 더 재미있어진다. 기대도 커지고 희열도 그만큼 더 커지게 된다. 그런데 그 바로 앞에서 움츠러드는 느낌이다.

하기는 미니시리즈일 것이다. 매주 드라마가 끝나면 그 결과는 시청률로써 계량된다. 시청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더 친절하게. 더 싹싹하게. 마지막까지 기다려 보는 재미란 사치일지도 모른다. 드라마의 시간은 일주일 단위로 흘러간다. 말하지만 지금도 재미있다. 약간의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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