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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1.25 08:29

빛과 그림자 "양담배 단속의 이유, 이게 제정신이 박힌 나라냐고!"

장철환이 누구보다 정의롭고 도덕적인 이유...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독재란 독선의 다른 말이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하는 말과 행동에 대해 반드시 어떠한 필연적 이유가 있으며 거기에는 어떠한 잘못도 없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것을 관철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권력이라는 것이다. 권력이란 그래서 항상 가장 정의롭고 가장 도덕적이다.

"야 이 허세는 무슨... 담배 하나 마음대로 못피게 단속하는 놈들이 미친 거지! 담배만 단속해? 머리도 마음대로 못 기르지, 옷도 하나 마음대로 못 입지, 이게 이게 미친 놈의 나라지 제정신이 박힌 나라냐고!"

아마 이제는 신정구(성지루 분)의 저 말이 그다지 와닿지 않는 세대가 더 많아졌을 것이다. 70년대 중반 이후 출생이라면 이야기로나 들었지 그다지 실감은 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고작 양담배 피는 것으로 경찰까지 나서 단속하는가? 그러나 시대가 그랬다.

80년대까지도, 아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흔히 하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향락과 퇴폐, 사치였다. 검약과 성실이야 말로 미덕이고 개인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악이다. 마땅히 개인은 국가가 제시하는 올바른 가치를 쫓아 살아야 하고, 국가는 그것을 관리감독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과연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그렇게 억지로 통제한다고 통제가 되는 것인가?

그래서다. 개인이 국가가 제시한 기준에 못미치거나 혹은 엇나갔을 때 그것은 국가가 개인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 빌미가 된다. 국가의 권력이 개인의 일상에 대해서까지 관여하며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도덕과 정의라고 하는 가치는 그를 위한 명분이 되어준다. 그로부터 벗어났다면 불순하고 부도덕하며 불온하다. 철저한 응징과 배제를 통해 개인들은 국가의 권력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두려워하고 복종하게 된다. 일탈하지 않은 자신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순사가 잡아간다!"

아마 이전에는 '호랑이가 물어간다'라는 말이 쓰이고 있었을 것이다. 필자 역시 아주 어려서 말 안듣고 말썽을 피울 때마다 어머니께 이 말을 들으며 자랐다.

순사라면 일제강점기 경찰의 직급 가운데 하나다. 한 마디로 경찰이다. 도대체 경찰이 남의 집까지 찾아와 아이들 말 안듣고 말썽피우는 것까지 관여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차라리 호랑이가 외딴집 울타리를 넘어 들어와 아이를 물고간다면 전근대의 조선사회에 있어 현실성 있는 위협이고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당시 식민지 조선의 인민들에게 있어 순사란 무소불위의 권력이었고 예측할 수 없는 일상의 침탈자였다. 식민지 조선의 인민들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그들의 감시 아래 있었고 언제든지 그들의 자의에 의해 체포되고 처벌될 수 있었다.

군사독재정권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불평 몇 마디 했다는 이유로 쥐도새도 모르게 국가권력에 의해 연행되어 고문당하고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비상식이 일상으로 이루어지던 시절이었다. 그것을 정당화하던 것도 역시 정의와 도덕이었다. 국가라고 하는 정의와 그 정의에 의해 정의된 질서라고 하는 도덕적 의무였다. 그것을 담보하는 것이 바로 장발과 미니스커트, 양담배에 대한 단속이었다. 사치와 향락, 퇴폐, 나아가 비애국이라고 하는 불순하고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당연한 통제이고 감시이고 단죄였다. 국가는 정의롭다. 국가가 하는 일은 항상 정당하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생각한다. 법을 지키지 않았으니 악하다. 지키라고 있는 법을 어겼으니 도덕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문제가 있는 것이다. 법은 누가 정하는가? 그리고 그 법이 옳은 것은 누가 증명하는가? 그러나 그것이 이미 법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어 정의되었으므로 마땅히 개인은 그것을 따를 의무가 있다. 그것이 옳다.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정의라는 것도 다르지 않다. 과연 그것이 옳은가? 그것들을 기준으로 사람을 단정짓고 단죄하는 것이 타당한가? 그 전에 그러한 기준을 제시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기준이 다수에 의해 동의를 얻고 확정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근거로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그로부터 벗어날 경우 폭력이 행사된다. 연좌는 기본이다. 때로 개인에 대한 공격이 그 가족이나 주위사람들에게까지 미치게 된다. 조금이라도 그에 우호적인 발언이나 행동을 하게 되면 그 또한 공격의 대상이 된다. 2010년 당시 타블로 사태를 보며 어느 기자가 방송에 나와 한 말이 있었다. 과거 권력이 하던 일들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배운 것이다.

사실 비슷하다. 머리를 기르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양담배를 피고, 얼마전 배우 한채영 역시 고가의 스포츠카를 탄 사진을 새해인사와 함께 올렸다가 정의로운 네티즌들의 공격을 받았다. 모두가 살기 어려운 요즘인데 그같은 호사가 가당키나 한 일인가? 자기가 벌어 자기가 산 집에 대해서도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고 비난을 퍼부어댄다. 어차피 개인사에 불과한 일들을 가지고서도 집중적인 비난이 퍼부어지며 그에 대한 어떤 해명이나 변명도 거부한다.

양담배는 비애국이다. 당시는 전매청이 있어서 국가에서 담배를 독점해서 팔았다. 담배를 팔아 얻어지는 수입은 국가의 중요한 재원이었다. 담배농가도 있었다. 그리고 양담배를 피움으로써 유출되는 외화도 있었다. 그래서 양담배를 금지했다. 같은 시기 학교에서는 잡곡을 섞지 않고 도시락을 싸왔다고 선생님들에 의한 폭력이 공공연하게 어린 학생들에게 가해지고 있었다. 체벌을 당하거나 아니면 다른 학생들이 보는 앞에 공개적으로 망신당해야 했었다. 역시 비애국이다.

정의란 야만의 다른 이름이다. 오로지 하나뿐인 도덕이란 곧 야만이다. 장철환(전광렬 분)이 저리 오만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는 매우 정의로운 사람이다. 그리고 도덕적이다. 다만 그의 정의는 권력이라고 하는 정의다. 그의 도덕은 권력이라고 하는 도덕이다. 권력이 곧 정의이며 도덕이다. 그래서 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에 대해서는 충성을 말하면서, 그로부터 권력을 나누어받은 자기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 강기태(안재욱 분)와 이정혜(남상미 분)에게는 야만적인 폭력성을 드러낸다. 이정혜에 대한 독점욕은 애정이 아닌 이성에 대한 정복욕이며 그녀를 모욕주고 지배하고 싶은 왜곡된 자의식이다. 그 누구도 권력을 쥔 자신을 거역하거나 거부해서는 안된다.

사실 그것은 조명국(이종원 분)도 마찬가지다. 차수혁(이필모 분)도 역시 다르지 않다.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거래를 말한다. 진심을 전하고 이정혜의 마음을 얻으려 하기보다 권력을 앞세워 이정혜를 협박하고 강기태를 압박한다. 노상택(안길강 분)이나 조태수(김뢰하 분)이나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단지 장철화과 다른 점이라면 그들의 위에는 장철환이라고 하는 또다른 권력이 있다는 점일 것이다. 스스로 정의를 세우기보다 권력이 정의이기에 장철환의 정의를 따른다.

법도 의미가 없다. 보편의 상식이나 가치와 같은 것도 전혀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는다. 누가 권력을 쥐었는가? 누가 힘을 가졌는가? 그 힘은 필연 폭력을 동반한다. 과연 권력의 의지에 따라 자의적으로 법을 집행하는 경찰을 공권력이라 부를 수 있는가? 권력의 의지를 쫓아 원칙없이 휘둘러지는 법이라고 하는 것을 사회보편의 규범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법대로 단속이 이루어지는데 오히려 그 뒤에 숨은 권력의 불순한 의도부터 읽어낸다. 과연 그런 것을 정상적인 사회라 할 수 있겠는가? 강기태조차 어쩔 수 없이 중정의 김재욱(김병기 분) 부장과 술자리를 같이 하며 권력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결국은 어쩔 수 없이 <빛과 그림자>도 권력이라는 당시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권력을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공연예술인 - 즉 연예계와 쇼비즈니스에 대해 다루고 있으면서도 권력이란 또한 중요한 한 축을 이룰 수밖에 없다. 아티스트가 대중의 눈치를 보기보다 먼저 권력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영화감독이 영화의 완성도를 생각하기보다 먼저 권력의 의중을 살펴야 한다. <빛과 그림자>의 비극이 곧 시대의 비극이다.

금욕이란 억압이다. 절제란 통제다. 스스로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하는 것이 아닌 금욕과 절제란 강제일 뿐이다. 자발적인 것일 때는 미덕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타율이 되면 폭력이 된다. 스스로 마음이 내켜 하는 기부는 미덕이지만, 다른 누군가의 눈치가 보여 하는 기부는 강탈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정의도 뭣도 아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기부를 하게 되었으니 옳다. 그것이 독선이다. 그것을 공식적으로 행하는 것이 독재다. 개인이거나, 아니면 특정한 집단이거나, 그도 아니면 불특정한 다수이거나. 대중도 독재를 한다.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입맛이 쓴 것은 비단 그것이 과거 실제 있었던 일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바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현재의 이야기인 때문이다. 현재란 과거의 연장이다. 40대 이상은 그 시대를 직접 경험하고 교육과 미디어 등을 통해 그런 것들을 몸으로 체화한 이들이다. 40대 이하는 그러한 앞세대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지금까지 왔다. 반성이 없는 한 모든 사고와 행동은 그대로 고착된다. 양식화된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도 그 시대를 그리워하며 아름답게 추억하고 있다. 어느 한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특정한 세대의 문제라기보다, 그보다는 우리 사회가 그동안 거쳐온 누적된 결과인 셈이다. 우리 사회의 유전자다.

참 기분나쁜 드라마다. 얼핏 상당히 낭만적이고 화려할 수도 있는 소재를 가지고서도 이렇게나 어둡고 칙칙한 드라마로 만들고 말았다. 소재도 많은 텐데. 마도로스 박 박노준(박준규 분)나, 혹은 단지 이름만 단지 나오고 있을 뿐이지만 하춘화, 문주란, 장계현, 그 시대만의 분위기가 있다. 빅토리아의 쇼무대 역시 최근의 공중파의 무대와는 다른 맛이 있다. 그런데도 굳이 불편한 길을 가려 한다. 그래서 한때 외면하려 했던 드라마를 굳이 챙겨보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고작해야 두 남녀가 만나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남자는 3류 쇼단의 단장이고, 여자는 이제 갓 영화판에 얼굴을 비추기 시작한 신인배우다. 그런데도 권력을 의식해 그것이 이루어지네 마네. 심각하고 비장하다. 차라리 코미디같다. 코미디같은 현실이다. 웃고 만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언제까지 개인의 삶이란 이렇게 진지하고 심각하고 비장해야 하는 것일까?

어쨌거나 드라마의 시간적 배경은 1974년 이후인 듯하다.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이 이때 나왔다. 대마초 파동이 있고 '미인'이 금지곡이 된 것이 1975년, 이후 가요정화운동까지 장철환과 연계되어 이어지게 될 듯하다. 물론 드라마는 상당부분 허구의 실제의 경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에 없는 중정부장 김재욱이나 비서실인지 경호실인지 알 수 없는 실장 장철환처럼. 신정구의 저 대사처럼 후련하게 당시의 시대를 묘사해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재미있다. 재미있다기보다는 분통이 터진다. 상식이 상식이 아니다. 가치가 가치가 아니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문제인가? 거대한 권력이 있다.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권력이다. 개인의 인격이나 역량따위 전혀 상관이 없다.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시대다.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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