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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3.31 06:05

로열패밀리 - 겁먹은 짐승이 사람을 문다.

겁먹은 작은 여우의 도피...

 
겁먹은 고양이가 사람을 문다.

고양이는 작다. 그리고 약하다. 사람에 비하면 정말 작고 약한 동물이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사람에게 덤빌 때가 있다. 겁먹었을 때다.

궁지에 몰리고 나면 고양이도 사람을 문다. 물고 나서 어떻게 되는가는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 제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물고 보는 것이다.

세상에 잔인한 것은 항상 슬픔을 동반한다. 가난에 못이겨 아이를 버리고, 심지어 아이를 죽이고, 갓태어난 아이가 쓰레기통에서 죽어간다. 감당 못할 슬픔이 사람을 잔혹함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김인숙(염정아 분)이라고 과연 그러고 싶었을까? 설마 그렇게 되리라고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궁지로 몰리다 보니 본능적으로 물게 되었고, 그것이 상처가 되어 한 사람이 죽었다. 그녀 자신에게까지 상처가 될 그 사람이 끝내 죽고야 말았다.

그야말로 단지다. 단지 살려 했을 뿐이었고, 살기 위해 보다 높은 자리에 오리려 했을 뿐이었다. 단지 행복하려 했기에 행복을 위협할 수 있는 대상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난 이번엔 아무 짓도 안했어요. 정말 난 안 죽였다구요.”

물론 그녀도 예감하고 있었다. 단지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 외면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제발 살아있다고 얘기 좀 해 주세요. 아저씨가 일부러 어디다 숨겼다고 제발 얘기 좀 해 주세요. 아저씨...”

그래서 찾으려 한 것이었다. 혹시나 조니 헤이워드가 살아 있어 힘들게 이루어 놓은 행복을 빼앗아갈까봐. 혹은 그녀의 불길한 예감대로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을까봐. 겁먹은 눈으로. 겁먹고 불안한 표정으로. 허우적거리며. 행복을 손에 넣고 인간임을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과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끈을 놓고 싶지 않은 본능적 욕구일 것이다.

그렇다. 그녀는 사냥꾼에 쫓겨 궁지에 내몰린 작은 여우였다. 상처투성이의.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자기를 지킬 아무 수단도 없는. 잔인함은 그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었다. 가장 영광된 순간에 찾아온 그녀를 다시 나락으로 내몰 그 존재가.

그것은 후회일 것이다. 아니 후회조차 아니다. 항상 사람은 궁지에 몰려 겁에 질린 채 일을 저지르고 지나고 나면 후회한다. 스스로 궁지라 여기고 일단 일을 저지르고 본 다음 나중에 다시 한 숨 돌릴 수 있을 때가 되면 그제야 후회라는 것을 한다. 후회라는 이름의 타협을 시도한다.

“울어도 돼. 차라리 제발 울기라도 해라.”

“제가 무슨 자격으로 울어요. 울 수 없어요.”

“울지 못하는 고통보다 더 한 게 뭐가 있겠니?”

“울고 나면 또 살 길 찾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지 할 텐데요? 늘 그래왔잖아요?”

“그래, 그게 사람이다. 그걸 알면서도 울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야.”

“울지 마세요, 아저씨. 아저씨도 절 위해서 울지 마세요, 이제. 지금 내가 울면 그건 거짓 눈물밖에는 안 돼요. 악어의 눈물. 견딜 수 없어서 우는 게 사람이라면, 그래도 벗어날 수 없는 게 사람이라면, 이제는 사람임을 포기할 거에요.”

사람이 우는 것은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서다. 화내고 웃고 울고 원망하고, 감정이란 스스로 납득하기 위한 감정이다. 눈물을 흘림으로써 납득을 한다. 눈물을 흘림으로써 비로소 타협을 한다. 이만하면 되었다. 이만하면 좋다. 그것이 사람이다.

양심이란 눈물을 흘리고 눈물로써 자기와 타협한다. 그렇게 타협하고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같은 일을 저지를 수 있다. 아니라 여기면서. 아닐 것이라 믿으면서. 그리고 후회하면서. 후회하는 자신에 만족하면서.

그것이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는 사람이기를 포기한다 말하고 있다. 인간임을 증명하려던 그녀가. 그리고 행복의 정점에서 사람임을 포기하려 하고 있다. 그것은 그녀 나름의 사람으로서의 고집이며 선언이기도 하다. 사람임을 포기함으로써 그녀는 스스로 사람임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마치 인간임을 포기해가면서 인간으로써 자기를 증명하고자 그동안 발버둥을 쳐왔던 것처럼.

“왜? 왜 다 빼앗아가는 거야? 왜 한 번도 단 한 번도 제대로 살아볼 기회를 주지 않는 거야. 당신은, 당신은 안아보기라도 했잖아? 당신 아들의 죽음을!”

차라리 원망할 수라도 있으면. 하늘을 원망하고 신을 원망하고 운명을 원망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을 원망하고. 이제껏 그래왔기에 그녀는 더 이상 그러지 않겠다 말하고 있다. 최악의 궁지는 그녀로 하여금 마지막 남은 인간으로서의 모습까지 앗아가 버리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저버린 그녀에게 남은 것은 탐욕을 향한 브레이크 없는 질주 뿐. 돌아오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네가 도망가자고 할 때 도망갈 걸. 그지?”

그녀가 항상 앉아 있던 십자가가 있는 좁은 방은 그녀가 다시 태어나기 위한 자궁이다. 그 안에서 고뇌하고, 그 안에서 갈등하고, 그 안에서 고통스러워하면서, 그녀는 자궁으로부터 다시 태어난다. 예고편대로라면 이제 드디어 공순호(김영애 분)와의 한 판 승부가 남아 있을 텐데. 그녀는 마침내 굴레를 벗어버리고 탐욕과 파멸을 향해 달리는 롤러코스터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것은 그녀 나름의 눈물을 흘리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이미 저질러진 행위들에 대해.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일들을 저지른 자기 자신에 대한.

또 한 번의 반전이다. 그나마 김인숙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가 싶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공순호는 그 사이에도 김인숙을 무력화시키고 쳐낼 준미를 하고 있다. 역시 만만치 않다. 이제 와서 그대로 당해주기에는 잃은 것이 너무 많다. 잃은 것이 너무 많기에 지켜야 할 것들도 많다. 김인숙은 싸워야 한다. 자기가 저지른 행위들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도.

보는 내내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심오하면서도 냉철한 성찰이었다. 조니 헤이워드를 만나고 그로 인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김인숙의 모습. 알면서도 모르는 척, 알고 있으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그리고는 끝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아 허튼 믿음에 매달린다. 남을 탓하고. 거짓이라도 납득할 수 있기를 바라고. 눈물의 의미에 대해 말한다. 실컷 신과 운명을 저주하고 자기 자신을 저주하며 눈물의 의미에 대해서 사람임을 포기하며 들려준다. 인간의 욕망이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추악한 본성이란.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가엾음도. 그 잔혹한 슬픔과 그 처절한 절망에 대해서. 사냥꾼에 쫓겨 궁지에 이르면 어떤 짐승들은 새끼를 물어뜯고 자기 자신을 물어뜯는다고 한다.

“다 거짓말이야. 절대 안 와, 기쁨의 날 같은 건...”

조니 헤이워드가 시체로 발견되고, 한지훈(지성 분)의 친구 강충기(기태영 분)가 그 사건을 맡게 된다. 강충기를 보조하는 검사시보로 이유선(이다희 분)를 배치한 것은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 그녀의 좌충우돌하는 단순명쾌함은 보다 이야기의 흐름에 가속을 더한다. 자칫 강충기와 한지훈과의 관계로 인해 멀리 돌아갈 뻔한 이야기가 바로 직구로 최단거리를 찾아간다. 긴장이 높아지고 이야기에 밀도가 더해진다. 더구나 누가 범인인가를 알기에 어느새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검찰과 김인숙과 한지훈의 관계가 궁금증과 호기심을 더한다. 이미 결과가 정해진 이야기에서 그 사이에는, 그 배경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있을 것인가?

수사드라마가 아니다. 검찰이 나서서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드라마가 아니다. 드라마의 주는 어디까지나 JK와 김인숙과의 관계다. JK라고 하는 부와 권력의 정점에서 김인숙이 스스로 싸우고 쟁취해가는 과정이다. 보다 김인숙 자신과 그 주위와 그 이야기들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오늘은 분명 보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갈 것이다. 공순호와 김인숙, 두 예고된 숙적의 겨룸이. 김인숙을 쳐내고자 하는 공순호와 살아남기 위해 공순호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김인숙. 그리고 그 끝에 기다리고 있을 파멸에 대해서.

“정 관두고 싶으면 그때는 내가 끝내줄게. 그림 좋게...”

한지훈이 김인숙으로부터 받은 곰인형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장면은 그래서 매우 인상적이다. 15년 전의 살인현장에서 발견된 찢기고 더렵혀진 곰인형과 다시 조니 헤이워드의 시체에서 발견된 피묻은 곰인형, 그리고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곰인형.

그것은 한지훈의 김인숙에 대한 감정이기도 하다. 김인숙을 위해서라면 김인숙마저 포기할 수 있다. 조현진(차예련 분)의 고백을 듣고, 그리고 김인숙에 대한 감정을 깨닫게 되면서, 그러나 김인숙은 한지훈이 절대 사랑해서는 안 되는 상대다. 그것은 지금의 김인숙 때문에도 그렇고 과거의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유들 때문에도 그렇다. 김인숙에 대해 깊어지는 감정 만큼이나 짙어지는 의혹들. 그때는 자기가 끝내주겠다고 하는 말은 무의식이며 어떤 예감이었을 것이다. 가장 불행한 결말은 어쩌면 가장 숭고한 그만의 사랑의 방식이 아닐까. 나란히 앉아 있으면서도 어쩐지 메울 수 없는 거리가 느껴지는 그 모습처럼.

어쨌거나 모두가 예상한대로 조현진이 한지훈에게 고백했다. 과연 그녀가 말한대로 한지훈은 조현진 - 아니 김인숙을 위해 야망을 일깨울 것인가? 인간에 한 발 다가온 조현진과 어쩌면 불길함을 내포하고 있는 한지훈. 그래도 하나 정도는 좋은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유신아(최윤소 분)은 집사장이 확보하고 있는 CCTV와 관련해 사건에 단서를 제공하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무엇 하나 허투루 그냥 버리는 게 없는 드라마다. 조현진과 한지훈과의 관계도 앞으로를 위한 장치가 아닐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는 것은 그만큼 작가가 방심할 수 없게 절묘하게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기 때문이다.

도무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독기에. 그 독기의 이면에 존재하는 잔혹한 슬픔에. 냉혹한 절망과 처절한 발버둥에 대해서도. 사람이란. 산다고 하는 것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이야기는 펼쳐질 것인가. 쉬어가는 화라 하더니만.

깊이를 일깨운다. 불길함을. 참혹함을. 그럼에도 냉정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을. 김인숙은 우리 자신이다. 다름아닌 나 자신이다. 십자가 앞에 허튼 기도를 하는 그 모습처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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