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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1.20 09:38

해를 품은 달 "양명이 이훤을 비난한 이유와 이훤이 왕인 까닭, 또 하나의 비극의 단초..."

첨예한 정치논리와 애절한 사랑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다. 힘을 느낀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아마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일 것이다. 이훤(김수현 분)은 세자였다. 장차 왕위를 이을 고귀한 신분이었다. 그리고 왕이 되었다.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비극의 또 한 이유였다. 민화공주(남보라 분)는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했고, 이훤은 그것을 너무 잘 알았다.

양명군(정일우 분)이 허연우의 죽음을 알고 바로 이훤을 찾아와 따져물은 바로 그것이었다. 과연 이훤이 자신의 왕위를 걸었다면 어땠을까? 자신의 세자라고 하는 자리를 걸고 대비(김영애 분)와 맞서 허연우(한가인 분)를 지키려 했다면? 비록 양명군이라고 하는 대안이 있다고는 하지만 적장자로서 세자가 갖는 명분과 정통성은 제아무리 대비라고 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왕조 600년 역사 가운데 이미 봉해진 세자가 폐해진 예는 태종 때의 양녕대군과 영조 때의 사도세자로 더 유명한 장헌세자 뿐이었다. 인조 때에도 적장자인 소현세자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요절하는 바람에 그를 대신해 왕위에 오른 효종은 죽어서까지 서인으로부터 그 정통성을 의심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정치란 창칼없는 전쟁이다. 논리와 명분은 정치라는 전쟁에 가장 중요한 무기다. 그런데 과연 적장자라고 하는 정치적 명분을 함부로 포기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세자가 세자의 자리를 포기하려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로 인한 정치적 부담은 고스란히 대비 윤씨와 외척인 윤대형(김응수 분)에게로 돌아간다. 물론 세자라고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대비 윤씨와 윤대형이 그러한 세자의 요구를 받아준다면 세자는 그들에게 크나큰 정치적인 빚을 지게 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세자에게 헤어날 수 없는 굴레이며 족쇄가 될 것이다. 다만 과연 세자인 이훤에게 있어 허연우란 어떠한 의미였는가? 그만한 댓가를 치를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였는가?

그래서 이훤은 세자였던 것이다. 이제는 왕이 되었다. 왕이란 무척 외로운 자리다.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많을 뿐만 아니라 크기까지 하다. 당장 허연우를 살리려 대비 윤씨와 윤대형 일파에 고개를 숙이게 되면 장차 왕위에 올라 그들의 전횡을 막을 방법이 없다. 그들의 월권과 전횡을 막지 못한다면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피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의 거칠 것 없는 탐욕은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하고, 나라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동량들을 죽이거나 내치게 될 것이다. 필연적으로 나라는 쇠약해지고 마침내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의 선조인 세조가 왕이 왕으로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를 단종의 신하들을 통해 훌륭히 보여주고 있지 않았는가 말이다. 단종에 충성을 다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후손조차 남기지 못했다.

허연우는 작다. 아무리 왕으로서 마음깊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더라도 그것이 세자의 자리와 바꿀 정도는 아니다. 왕의 자리와 바꿀 것은 더욱 아니다. 이미 세자로 책봉된 이상 세자로서의 의무가 인간 이훤의 욕망보다 우선한다. 장차 왕위를 물려받을 존귀한 신분으로서의 책임이 개인 이훤의 감정에 우선할 수밖에 없다. 결정적인 순간 이훤은 그렇게 허연우를 놓아보낸다. 왕(안내상 분) 역시 마찬가지다. 왕 또한 그래서 자신의 아들인 양명군의 원망을 한 몸에 받아가며 그를 내치려 하는 것 아니던가 말이다. 부모자식의 당연한 정리보다 우선하는 것이 바로 왕이라는 자리다.

그런 점에서 왕이 된 이훤과 그의 비가 된 중전 윤보경(김민서 분)과의 첨예한 긴장과 대립은 매우 사실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조선의 왕 가운데서도 부부간에 금슬이 좋았던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조차도 처음 그들이 맺어진 것은 철저한 정치논리에 따른 거래의 결과였다. 과연 누구로 하여금 지존인 왕의 가장 가까이에 머물게 할 것인가? 왕의 가장 가까이에서 다음대 왕위를 이을 아이를 잉태할 여성은 누구의 가문에서 나오는가? 왕에게 있어 그것은 장차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될 우호세력과의 권력을 나누는 자리이고,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장차 나라의 정치에 있어 주도권을 누가 쥘 것이냐의 문제다. 중전이란 바로 그러한 중대한 임무를 띄고 궁궐로 파견되는 일종의 정치사절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때로 그래서 중전의 자리에 - 아니 조선이 아닌 세계사적으로도 신분이 높은 이에게 있어 배우자란 정치적 동지이며 또한 경쟁관계이기도 했었다.

선대왕 때에는 윤씨의 세력이 강했다. 그래서 그들에 의해 왕의 비까지 멋대로 정해졌다. 중전 윤씨란 그러한 윤씨의 세력이 대궐 깊숙이 받아 놓은 그들의 영화의 증거다. 중전 윤씨 또한 그것을 안다. 누가 그녀를 중전으로 만들었고, 누가 그녀로 하여금 중전으로 떠받들어지도록 하는가. 물론 중전이란 왕의 비를 두고 일컫는 호칭이지만 그녀의 지금일 있게 하고 그녀의 배후가 되어 주는 것은 대비와 아버지 윤대형이다. 자신의 가문이 건재해야 왕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다. 이 또한 절박함이다. 이훤이 자신의 왕권을 위해 치열하게 대비와 윤대형과 싸우고 있다면 중전 윤씨 또한 자신을 위해 싸운다. 궁궐이란 바로 그러한 첨예한 정치적 대립의 장이다.

하기는 어쩌면 이훤의 허연우에 대한 사랑 역시 그런 맥락인지도 모른다. 허연우의 아버지인 허영재(선우재덕 분)는 아버지의 친신으로 장차 이훤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면 든든한 그의 후원자가 되어 줄 인물이었다. 그의 아들인 허염(송재희 분)은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낸 뛰어난 인재로서 그의 친신이 될 인물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딸이며 누이인 허연우야 말로 이훤에게 있어서도 최고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다만 그런 과정에서 허연우라는 한 여성에게 호감을 느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왕으로서의 치열한 고민과 냉혹한 계산의 결과였을 수 있다. 사랑을 얻어 좋고, 또한 왕으로서 든든한 우군을 얻을 수 있으니 또한 좋고. 그는 왕이다.

궁궐에는 괴물이 산다. 아니 권력이 있는 곳에는 그 권력을 먹고 사는 괴물들이 살아간다. 이훤이라고 아닐가? 그래도 부부이고 몇 년을 부부로서 함께 살아왔는데 자신의 부인에 대한 이훤의 너무나 매몰찬 태도는 그가 결국 왕일 수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허연우를 대신해서가 아니었다. 허연우를 잊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윤보경의 출신이 어디인가를 잊지 않아서다. 그녀의 아버지가 누구이고 그녀로 인해 누가 이익이 되는가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로맨스의 달콤함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이 또한 드라마를 이루는 한 축이다. 왕으로서 이훤은 허연우를 사랑하는 것과 동시에 대비 윤씨와 윤대형과도 싸워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잠깐 드러난 이훤의 왕으로서의 모습이 허연우를 떠나보내며 흘리던 눈물 만큼이나 차고 매섭다. 왕 자체다. 살벌하다.

아무튼 드라마는 미스테리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서대로 풀어가는 대신 허연우의 기억을 가두어 버렸다. 이중의 장치를 해 놓은 것이다. 이훤이 과거의 비밀을 밝혀가는 과정과 그러한 와중에 허연우가 제 기억을 되찾게 되는 것에 대해서. 다만 이 경우 시청자가 보다 이훤과 허연우에 이입하며 허연우가 기억을 찾아가는 것을 자기 일처럼 공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권력을 사이에 두고 왕인 이훤과 권신인 윤대형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이훤과 허연우의 사랑은 과거의 잔혹하고도 슬픈 비밀과 함께 하게 된다. 현실이 냉혹하고 비극이 처절할수록 사랑은 더 깊어진다. 역시 어떻게 묘사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아직은 보여진 것이 없어 판단을 미룬다. 어쨌거나 허연우가 여전히 기억을 잃은 채라면 - 아니 그조차 트릭으로 반전을 위해 준비되었을 수 있다. 역시 지켜본다.

문득 보이는 격구 장면이 무척 흥미롭다. 격구에는 마상격구와 보격구가 있는데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것이 바로 보격구다. 마상격구는 흔히 생각하는 말 위에서 채를 이용해 공을 치는 지금의 폴로와 같은 경기이고, 보격구는 그것을 말을 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도록 간략화시킨 골프에 가까운 운동이다. 사실 골프가 격구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를 하거나 할 때 워낙 마상격구만을 떠올리는 탓에 설명하기가 곤란한 경우가 많았는데 훌륭한 참고자료가 되어준다. 매우 고증이 상세하다. 과연 세종 또한 그렇게 궁궐 안에서 종친과 궁인과 대신들과 보격구를 즐겼을 것이다.

다만 이것이 또한 고증과는 그다지 맞지 않는다는 것이, 조선왕조실록에 세조 이후로 보격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세종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왕들도 궁궐 안에서 직접 격구를 즐기고 했었지만, 그러나 왕이 너무 유희에 빠져드는 것은 문제라 해서 유학자들이 들고일어나는 바람에 세조 때는 왕은 단지 옆에 격구를 지켜보는 관람자의 자리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조차도 성종대에 이르면 격구란 원래의 의미인 무과의 한 과목인 마상격구만을 가리키게 된다. 원래 이성계가 변방인 함경도에서 개성으로 올라와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린 것이 바로 격구를 통해서였는데. 당시 격구선수에 대한 대중의 인기는 요즘의 프로스포츠선수 그 이상이었다. 도대체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언제인가? 물론 허구라는 것은 알지만 궁금해지는 이유다. 조선초기 이후 기록에서 사라진 보격구를 직접 대신들과 행하는 젊은 왕이라니.

어쨌거나 보는 재미가 있어서 좋았다. 신기하기도 했다. 기록으로야 접했지만 실제 보격구를 즐기는 모습을 본 것은 필자도 처음이었다. 이런 재미가 바로 사극의 재미다. 단편적으로 전해지는 기록들을 구체화시켜 보여준다. 가상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이기에 더욱 거리낌없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보여줄 수 있다. 때로는 발칙하고 때로는 상세하다. 재미있다.

조정의 주도권을 두고 왕 이훤은 권신 윤대형과 대립한다. 궁궐 안에서는 대비 윤씨를 정점으로 음험한 암투가 펼쳐진다. 그런 가운데 이훤과 허연우의 사랑이란 진흙탕에 핀 연꽃처럼 해맑게 아름답지 않은가. 선 굵은 정치드라마도, 애절한 사랑이야기도, 그리고 어쩌면 이질적일 수 있는 요소들이 가슴 저미는 비극과 함께 하나로 녹아든다. 아이들의 순수가 시청자의 마음을 녹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성인연기자로의 교체가 마치 반전처럼 희망을 예고한다. 모두가 잘 풀리리라.

성공적인 출발이었다. 김수현은 무척 매력적인 배우다. 한가인은 아직 불안요인이 있다. 그러나 어느새 윤대형을 욕하며 이훤과 허연우를 응원하는 자신이 있다. 제대로 몰입해서 보고 있다. 부디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윤대형도 망하는 모습도 보고 싶다. 간절한 바람이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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