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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1.16 17:15

빛과 그림자 "시대의 클리셰, 진부함과 당연함의 경계와 비극을 보다!"

뻔하지만 뻔할 수밖에 없는 시대를 통해 그럴 수밖에 없는 당연함을 이해하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사실 필자는 MBC의 월화드라마 <빛과 그림자>에 대해 썩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첫회를 보는 순간 어느 정도 읽혔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어떻게 진행되겠다. 배신과 복수, 그리고 시대의 부조리가 얽혀든 낭만과 추억, 아마도 역시 이번에도 비슷한 느낌의 드라마가 되리라.

실제 드라마의 내용도 필자가 거의 생각한 그대로였다. 조금 덜 처절하고 조금 더 낭만적인 것은 있지만 결국 그 시대는 그렇게밖에는 그리지 못하는 것일까? 너무 뻔하다. 고도성장기에 대한 향수와 아니면 불의의 시대 대한 울분, 그러나 생각해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시대니까. 시대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이를테면 작년 종영한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모처럼 김승유와 이세령이라는 허구의 인물을 내세워 거대한 서사 속에 가려한 개인의 비극을 묘사하려 했지만 오히려 더 많은 대중들은 경혜공주가 겪어야 했던 세조의 찬탈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세조의 야망과 단종의 비극이라는 그동안 수도 없이 반복되어 온 소재가 이번에도 역시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오히려 주인공은 드라마와 겉돌려 하고 있었다.

장희빈에 대해 새로운 역사적 해석을 시도하려 했을 때도 시청자의 반발이 있었다. 장희빈은 단지 시대의 희생양일 뿐이라는 역사적 해석은 요부 장희빈이라고 하는 기존의 관념을 극복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김혜수의 장희빈도 그래서 요부 장희빈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뻔하지만 그러나 익숙함으로 돌아간다. 장희빈이란, 그리고 인현왕후 민씨란, 숙종이란 그런 의미다. 그런 시대다.

그런 시대였다. 정의로우면 무모했다. 선하면 어리석었다. 도덕이란 답답했고, 윤리란 거추장스러웠다. 권력이 정의였고, 이익이 곧 선이었다. 몇 년 전이었을 것이다. 한 설문조사에서 무려 17%에 이르는 청소년들이 10억이라는 큰 돈만 벌 수 있다면 감옥 정도는 얼마든지 갔다올 수 있다는 대답을 내놓아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과연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힘만 있으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하고 다른 사람의 삶을 망가뜨리는 것도 상관이 없다. 왕따를 저지르는 아이들도 문제지만 그것을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학교나 오히려 그것을 옹호하려 드는 학부모들도 문제다. 그것은 또한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단지 몇몇 아이들이, 그 학부모들이 인간적으로 문제가 있어 그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런 점에서 비상하게 조명국(이종원 분)과 차수혁(이필모 분)의 캐릭터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볼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구성원들 자신을 볼 수 있었다. 누군가는 이익을 위해 대세를 쫓아 태연히 배신을 저지르고, 또 누군가는 이익을 위해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묵인한다.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장철환(전광렬 분)이라고 하는 절대권력이다. 법 위에 군림하며 법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 그 앞에 주인공 강기태(안재욱 분)이 겪어야 할 비극따위 사소한 것이다. 어리석고 무모하다. 오히려 진실을 알게 된다면 가엾어질 뿐이다. 그들이 곧 선이고 정의다. 그리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추억하는 이유일 것이다. 분명 누군가는 강만식(전국환 분)처럼 무고하게 끌려가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강기태처럼 자기가 당했는데도 당했는줄도 모르고 여전히 조명국과 차수혁을 믿고 불운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신정구(성지루 분)처럼 아예 좌절하여 포기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남의 일인 것이다. 내 일이 아니다. 내가 겪은 일들이 아니다. 더 많은 사람들은 조명국처럼, 혹은 차수혁처럼, 노상택(안길강 분)처럼, 안태성(김희원 분) 그러한 현실에 순응하고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더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었다. 양심에 눈을 감은 댓가는 그렇게 달콤했다. 그 앞에 강만식과 강기태, 신정구의 불행 따위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빛나라 쇼단이 겪을 어려움 따위 그저 그들이 어리석고 못난 탓일 뿐이다.

그래서 조명국은 배신을 하는 것이다. 차수혁도 그러한 배신에 동의한다. 장철환은 거리낌없이 그들의 배후에서 배신을 사주하고 조종할 수 있다. 당연히 그러하리라 믿고 노상택 역시 신정구를 협박한다. 강기태가 진실을 아는 것이 꺼려지기는 하지만 오히려 강기태가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후회하게 만들어줄 자신이 있다. 역천의 시대, 반역의 시대다. 정의와 불의가 바뀌고, 선과 악이 뒤집히며, 윤리와 도덕이 제자리를 이탈한다. 그것이 정당화된다. 꿋꿋하게 양심을, 상식을 지키려 한 이들은 도태되거나 그들에 의해 떠밀려난다. 다치기도 한다. 정의로우면 다친다.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바르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다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타협하라고 말한다. 영합하라고 말한다. 방관하라고 말한다. 아니 적극적으로 이용할 것을 주문한다. 그것이 영리한 것이라고. 그것이 현명한 처신이라고. 고도성장기에 대한 향수는 그러한 역천과 반역에 대한 기억과 함께 한다. 당연히 누군가는 배신을 하고, 그로 인해 억울해하는 이가 있고, 그럼에도 그 억울함을 하소연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 아마 강기태가 장철환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도 송미진(이휘향 분)과 그녀의 배후의 중정의 김부장의 힘을 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가난은 낭만이 되고 비겁은 미학이 된다. 물론 강기태와 신정구는 다르다. 다만 강기태 역시 주인공으로서 시대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무의식이다. 시대가 그러하다고 하는 동의다. 그래서 그 시대는 그렇게밖에 그려질 수 없다. 배신과 복수, 그리고 낭만과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가 얽혀든다. 태연히 연예인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마치 그들을 도구처럼 이용하려 들고, 아니 인간이 인간이 아니었다. 권력 앞에 인간은 단지 대상이며 수단으로 소모될 뿐이다. 물건을 감정하듯 품평하고 그 가치를 따지고 이용하려 든다. 가치가 없으면 당연하게 버려진다. 버려지도록 만든다. 강기태의 아버지 강만식이 그렇게 당했다. 신정구도 당했고, 유채영 역시 자신의 뜻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최고의 인기스타임에도.

하기는 지금이라고 다를까? 결국은 현재란 과거의 연장이다. 연예인을 딴따라라 치부하며 그들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당시의 권력과 지금의 권력이 된 대중은 무엇이 다른가? 자기 동네를 찾은 쇼단의 여자연예인들을 희롱하고, 변두리 극장을 찾은 배우를 모욕주고, 그럼에도 너무나 당당하다. 아마 의도적일 것이다. 그러한 건달의 양태야 말로 지금의 대중의 그것이다. 단지 돈이 있고 권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장난감처럼 불러내어 함께 하는 그것이 지금 대중의 모습과 닮았다. 여전히 연예인이란 딴따라다. 인간이란 대상이며 수단이다. 건달들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 들고, 지금의 대중은 자신의 도덕과 정의감을 과시하려 든다. 폭력이 상식을 지배한다. 폭력이 양심을 대신한다. 인간이란 그 앞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제다.

뻔하다 여기면서도 그래서 어느새 울컥하며 젖어드는 것이 있었다. 분노하며 불끈 주먹을 움켜쥐고 몰입하며 보게 되었다. 그럼에도 동의하게 만드는 진정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드는 보편의 의식과 무의식이 있다. 그런 시대였다. 그런 시대를 살아가던 인생들이었다.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차수혁은 어쩌면 그 가장 큰 희생자일 것이다. <공주의 남자>에서의 신면처럼 그는 시대에 휩쓸려 어쩌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것들을 떠내려보낸다. 후회하고 갈등하면서도 끝내 자신의 선택을 따를 수밖에 없다. 어느새 그 후회조차 잊게 되리라. 방관자가 되거나, 적극적인 동조자가 되거나, 아니면 그 중심에 서거나. 시대는 그것을 강요한다.

소소하게 젖어들며 지금에 이르고 말았다. 에이 설마 하다가 지금에 이르러 푹 빠져들고 말았다. 그 시대의 한가운데 있는 것 같다. 김추자와 하춘화, 문득 다방에서 들려오는 박인수의 '봄비'가 있다. 통행금지와 국기하강식과 지금과는 전혀 다른 화려한 버라이어티 쇼가 있다. 물론 태연히 무고한 사람을 잡아다 빨갱이로 만드는 권력이 있다. 가장 쉽다. 빨갱이라 낙인찍히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이 사회에 발붙일 수 없는 죄인이 되고 만다. 그 가족마저 사회로부터 용납되지 못한다. 아마 이 또한 지금도 다르지 않을까? 최근 인터넷에서는 '빨갱이'를 대신해 '비호감'을 응징하는 것이 당위가 되어 있다. 과거이며 현재이고 현재이며 과거다. 지금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높은 시청률의 이유가 있다.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럴 수밖에 없음을. 그것이 시대임을. 그것이 대중이 동의한 무의식임을. 촌스럽지만 그조차도 너무나 당연한 익숙함이다. 다만 지금은 사람들이 조명국과 차수혁을 비난한다. 당시는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역설일 것이다. 흥미롭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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