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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1.12 08:59

해를 품은 달 "영상으로 써나가는 훌륭한 로맨스 판타지, 원작을 살리다!"

소설의 문법을 드라마의 문법으로 훌륭히 해석해내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소설과 드라마는 다르다. 당연히 소설과 만화도 다르다. 소설은 언어다. 가장 자유로운 상상이다. 언어로 가능한 모든 상상이 소설에서는 이루어진다. 문자로 전달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소설에서는 가능하다. 그러나 드라마는 아니다. 드라마는 배우와 연출이라는 한계를 갖는다.

집요하도록 탐미적인 소설이다. 전지적 일인칭시점일 것이다. 작가가 스스로 작품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스스로 이훤(아역 여진구)이 되고, 허연우(아역 김유정)가 되고, 허염(아역 시완)이 되고, 양명(아역 이민호)가 된다. 깊이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을 자신이 되어 풀어내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소설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어떤 감독도 그렇게 디테일하게 작품을 보여줄 수는 없다.

더구나 필요한 만큼 얼마든지 수사로써 채워넣을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드라마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단지 배우의 연기에 불과하다. 배우의 심리에 대해 소설가는 몇 페이지에 걸쳐 묘사하고 설명할 수 있지만 배우는 단지 실제의 다만 몇 초 몇 분의 연기만으로 그 모든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보여주는 것도 문제지만 그 나머지도 문제다. 말로써 채워진 그 나머지를 어떻게 영상으로 채워 넣을 것인가? 원작은 오로지 왕 이훤과 왕비의 운명을 지닌 무녀 연우와의 관계에만 집중하고 있다.

처음 드라마를 보면서 처음 보는 이야기마냥 생경했던 이유였다. 원작에서는 궁궐에서 이훤과 연우가 만나는 장면도 없고, 연우와 장차 중전이 될 윤보경(아역 김소현)이 만나는 장면도 없다. 이야기의 시작도 한참 뒤 운명이 시키는대로 엇갈리게 되는 연우가 월이라는 이름으로 왕이 된 이훤과 다시 만나는 장면에서부터였다. 대비 윤씨(김영애 분)과 외척 윤대형(김응수 분)의 음모 역시 실체없이 간략하게 그려지고 있을 뿐이다. 특히 외척 윤대형은 단지 악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나 드라마는 다르다. 편지를 통해 서로를 인식하고 감정을 키워가던 세자 이훤과 어린 연우는 우연처럼 만나고, 필연처럼 오해하며, 운명처럼 서로를 인식해가게 된다. 훨씬 이해하기 쉽고 빠르다. 허염을 중간에 두고 편지만을 왕래하는 것보다 시각적으로 보이기에도 유리하다. 원래 작가가 채워넣었던 풍부한 수사들은 대신 더욱 풍부해진 관계가 채워나가게 될 것이다. 원작에 없던 의성군과 무녀 아리의 죽음이 드라마의 초반을 장식한 이유다. 대비와 윤대형은 악으로써 구체화되어야 하고 이훤과 연우는 더욱 강력한 운명으로 엮여야 한다. 드라마식 수사법이다.

그래서 윤보경이 이름을 갖게 된다.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심지어 이름조차 없이, 누구도 아는 이라고는 없이 쓸쓸히 죽어갔던 중전은 이름을 갖고, 성격을 갖고, 마침내 허연우와 대립하게 된다. 그녀는 허연우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허연우의 선량함을, 그리고 올곧음을, 그러함에도 비운의 운명을, 또한 그녀가 극복해야 할 대상일 것이다. 오롯이 왕과의 사랑만을 탐하던 원작과는 달리 드라마에서의 허연우 역시 사명을 부여받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게 된다.

훨씬 극적이다. 그래서 드라마다. 악은 더욱 선명해지고, 그에 따라 주인공이 놓이게 될 안타까운 운명도 더욱 극명해진다. 증오해야 할 적과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 더욱 구체화되며 인물들에게도 필연적인 이유와 사명이 따라붙는다. 단지 작가가 지시하는 바만을 따라가면 되는 소설과는 달리 드라마는 먼저 길을 보여주고 함께 갈 것을 권유한다. 소설이 언어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그것을 드라마는 영상으로 바로 보여주기에 가능한 것이다.

사실 필자는 그래서 원작이 있는 경우 영화든 드라마든 피하는 편이다. 원작의 재미를 제대로 살려 보여준 작품을 그다지 보지 못한 때문이었다. 아무리 영상으로써 잘 만들어 보여준다고 해도 언어를 통해 상상한 이상을 보여주지는 못하는 때문이었다. 그러나 때로 이번의 <해를 품은 달>과 같이 장르가 갖는 차이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맞게 완벽하게 재구성하여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들도 있다. 새삼 감탄하는 이유다. 소설이 드라마가 되면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 더욱 극적이고 더욱 긴장감이 넘친다. 흥미를 잡아끈다. 일주일을 기다릴 수 있도록 만든다.

배우들 면면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아역들도 원작 이상의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확실히 원작의 허연우는 그 나이또래와는 달리 너무 조숙한 면이 있었다. 사랑을 알기에는 조금은 이른 나이, 사랑을 깨닫기에도 이르다. 사랑의 감정을 편지에 적어 보내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른다. 어린 설(서지희 분)의 과격한 해석까지 더해지며 전혀 터무니없이 세자 이훤의 의도를 오해하고 그것이 또다른 운명을 예고하게 된다. 운명이 엇갈리듯 사람의 마음도 엇갈린다. 드라마상 이훤의 나이가 16, 연우의 나이가 13살이다. 사랑이라기에도 어쩐지 귀엽고 웃음이 난다. 그것을 운명으로 바꾸는 것이 바로 드라마일 테지만 말이다.

13살짜리 어린 연우에 목을 매는 16살 세자 이훤과 아마 그보다 한 살 많은 왕자 양명, 그리고 세자 이훤을 통해 연우 또한 이성에 대한 감정을 알아가게 된다.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일 것이다. 어린 윤보경은. 사랑을 알기에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기에도 그녀는 아직 너무 어리다. 민화공주(아역 진지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는 아직 아버지가 만들어준 세계 안에 있다. 마냥 갖고 싶고 마냥 두리고 싶다. 궁궐에서 정작 민화공주가 자신은 돌아보지도 않고 허연우만을 챙기고 있을 때 아버지 윤대형에게 달려가 칭얼거리는 모습이 민화공주가 아버지인 왕에게 떼쓰는 모습과 닮아 있다. 아주 밉다. 그런데 저 나이 또래는 때로 아주 밉게 보이기도 한다. 아이인 때문이다.

아무튼 복선이었을 것이다. 세자 이훤이 호감을 가지고 문학 허염의 동생 허연우를 청한다. 그러나 허연우는 지레 겁을 먹고 세자가 보낸 내관에게 자기의 이름을 부정한다. 그리고 그녀가 부정한 이름은 다시 윤보경에게로 돌아가 세자로 하여금 그녀에게 첫고백을 하도록 만든다. 허연우가 부정한 이름과 자기의 것이 아닌 이름으로 고백을 듣게 된 윤보경, 그리고 자신의 것이 아닌 고백을 허연우에게 전하고 허연우는 그것을 듣는다. 도무녀 장씨(전민서 분)이 예언한 왕비의 상이되 교태전의 주인이 될 수 없고, 왕비의 상이 아니나 교태전의 주인이 된다고 하는 운명은 거기서 드러난다. 그리고 마침내 탈을 쓰고 다가간 이훤에 의해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다.

왕(안내상 분)의 아들들에 대한 마음도 상당히 구체적이다. 그는 아버지이기 이전에 왕이다. 아들이기 이전에 세자이며, 또한 아들이기 이전에 왕위를 물려받게 될 세자를 위협할 수 있는 또다른 왕자다. 왕이 오로지 아버지로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정치적으로 아무란 역할도 못하는 딸 민화공주 앞에서 뿐이다. 오히려 양명군에 더 안타깝고 세자에게 더 매서울 수 있는 것이 그래서다. 아버지로서 다정하고 왕으로서 엄격하다. 왕이란 참 힘든 자리일 것이다. 안내상의 연기는 굳이 말로 더할 필요가 없다. 그는 진정 고뇌하는 왕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아쉬운 것이 있다면 국무 도무녀 장씨의 캐릭터일 것이다. 원작의 도무녀 장씨에게는 비극이 있었다. 김동인의 소설 '을화'의 주인공 을화처럼 그녀는 한 시대의 끝에 서서 그것을 마주하고 있었다. 조선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성수청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과 맞서려 한다. 아니 대비 윤씨에 기대어 어떻게 해서든 예고된 종말을 피하려 발버둥친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무녀로서 범해서는 안되는 죄를 범하게 만들고 평생을 그 죄속에 살아가도록 만든다.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 스스로 목숨마저 내던지는 그녀는 진정 한의 무녀였을 것이다. 누군가는 시대와 함께 죽어야 하는 이가 있다면 성수청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는 이는 바로 도무녀 장씨였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친구의 유명을 받들어 허연우를 지키려 하는 드라마의 장씨는 얼마나 단촐한가. 무게가 떨어진다. 물론 그것이 드라마이기는 하다.

잘 만들었다. 원작을 읽어 본 입장에서의 감상이다. 어쩌면 소설속의 허연우는 저랬을 수도 있다. 소설속의 이훤도 아마 저리했을 것이다. 소설이기에 그러할 뿐, 소설속에서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현실로 옮겨 풀어보니 저러하더라. 훨씬 극적으로. 훨씬 흥미롭게. 원작의 집요할 정도의 탐미적인 문장은 유쾌한 현대적린 로맨틱 코미디로 승화된다. 내관이 세자 앞에서 허연우의 머리구조를 설명할 때는 그자리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무척 즐거운 드라마다. 발칙하다.

비극을 예감한다. 아마 지금의 유쾌함이 있어 비극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원망할 이가 있어 비극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원망할 대상이 있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 있으니 희망과 기대도 생긴다. 무엇보다 보이는 모습들이 예쁘고 아름답다. 드라마는 눈으로 보는 것이다. 굳이 원작을 따로 읽지 않아도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드라마로서 훌륭하게 문장을 써내려가고 있다.

상당히 취향을 탈 수 있는 소녀취향의 로맨스판타지가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장르에 특화된 소설을 보편적인 영상으로 잘 녹여내 만들었다. 드라마의 문법으로 소설을 훌륭하게 해석해 써내려가고 있다. 누구나 즐겁게 볼 수 있도록 공들여 만들었다. 재미있다.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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