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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1.09 19:48

남자의 자격 "자신을 찾기 위한 자기로의 여행, 잊고 있던 자신을 돌아보다!"

다가올 새로운 시간들을 위해 방황하는 아저씨들을 위한 진심어린 조언을 듣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대부분의 언어에서 문장이란 주어와 목적어, 서술어 이 세 가지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누구인가? 무엇인가? 어쩌려는가? 언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보고와 명령의 체계를 갖는다고 전제할 때, 이러한 세 가지는 결국 개인이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단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세 가지가 항상 명확한가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전라도 사투리에서의 '거시기'와 같은 것이다. '거시기'가 '거시기'를 '거시기'했다. '거시기'에는 무엇이 들어와도 좋다. 대신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언어란 대상을 특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무엇도 특정하지 못한다. 혼란이 시작된다. 당장 공문서에서 중요한 사안에 대해 저와 같이 표기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사람이 갖는 혼란은 대개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누구인가? 무엇인가? 어쩌려는가? 내가 누구인가를 알고 싶고,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가를 명확히 하고 싶고, 그것을 어쩌려 하는가를 분명하게 밝히고 싶다. 그래야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 특정되지 않은 대상이나 행위에 대해 과연 이해하고 납득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어려서는 모든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1+1은 2다. 4x4는 16이다. 5에서 3을 빼면 2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아버지는 1+1은 3이라 말한다. 사랑하는 연인이 4x4를 13이라 하는데 그것을 부정하면 어쩐지 안될 것 같다. 직장상사가 5에서 3을 빼면 도로 5가 되지 않느냐고 한다.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나'라고 하는 명확한 주체가 '거시기'로 치환되고, 분명하던 대상이 역시 사람과의 관계에서 '거시기'로 불확실해진다.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걸리는 것이 많다. 당장 가족부터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도록 만든다.

말하자면 삶이란 혼란을 쌓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열역학 제 2법칙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아니 거꾸로다. 열린계에서 인간의 진실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사람을 만날수록, 사람과 부대낄수록, 그래서 그런 것들을 의식하려 할 수록 진실은 모호해지고 모든 것은 불확실해지며 혼란이 짙어진다. 바로 중년의 사춘기일 것이다. 이제까지 믿어 왔던 것들이 사실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현실의 여건도 전과는 전혀 다르다. 마치 짙은 안개에 싸여 있는 듯 그 실체를 알 수 없이 모든 것이 모호하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과연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떻게 하고 있는가? 1+1은 2기 맞는가?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언어란 바로 현재를 특정한다는 것이다. 과거시제란 자체가 모든 언어가 바로 현재를 기준으로 하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을 기준으로 과거의 일이다. 그것이 현재의 일이라면 현재형을 쓸 것이다. '나는 밥을 먹는다', 그것이 지난 과거라면 '나는 밥을 먹었다'. 미래를 예정한다면 '나는 밥을 먹을 것이다.', 이 모든 말의 주체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자신이다. 1+1은 과연 2가 맞는가? 과연 지금 자신은 2가 맞다고 생각하는가?

나를 깨닫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다. 먼 옛날의 내가 아니다. 먼 훗날의 나도 아니다. 바로 1초 전의 자신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의 나다. 문장에서 주어인 '나'는 누구인가? 그러면 목적어도 보인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목적어가 보이니 서술어도 보인다. 나는 무엇을 '어찌하고 있는가?', 혹은 '어찌했는가?', 문장이 완성된다. 불확실하던 카오스의 세계가 명확한 로고스의 세계로 바뀐다. 안개는 걷히고 길이 보인다.

종교의 역할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철학을 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철학이란 언어다. 종교도 말씀을 근거한다. 혼돈 속에서 말씀이 있다. 혼돈 속에서 그것을 정의하는 개념이 있다. 허공에 떠 있던 불확실한 것들이 언어에 갇혀 명확해지고 분명해진다. 물론 그조차도 사실은 혼란이다. 초단위밖에는 표기 못하는 시계에 있어 초와 초 사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초와 초 사이에도 시간은 존재하고 여전히 흐르고 있다. 아날로그의 시간과 디지털의 시계, 언어란 무한의 연속성 가운데 특정한 어느 지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전혀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원주율 파이(π)는 단지 3.14로 외워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말하자면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하는 것이다. 전략이란 상호적인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 내가 싸우고자 하는 적은 어떠한 존재인가? 어떠한 역량을 가지고 어떻게 싸우는 이인가? 그로부터 그 사이에 필연적 과정이 채워진다. 나도 모르고 대상도 모르는데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나도 없고 대상도 없는데 행위란 무슨 의미인가? 한때 일본에서 중년가장들의 증발이 사회문제가 되었던 것이 바로 그래서였다. 무의미하다. 가치가 없다. 판단할 수 있는 주체인 자신이 사라져 버렸다.

그를 위한 과정이었다. 실험카메라를 찍고, 심리테스트를 하고, 그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과연 나란 누구인가? 어떤 인간인가?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하려 하는가? 모든 것은 그로부터 시작된다. 대상인 '무엇'도 행위인 '어떻게'도, 최소한 내가 지금 어째서 이러고 있는가 알 수만 있다면 그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 볼 수도 있다. 스스로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다. 주위 또한 그것을 받아들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갈등이란 무지에서 생긴다. 무지에서 비롯된 불안이다. 어째서 저 사람은 나와 다른가? 어째서 저 사람은 나와 다르게 행동하는가? 혹시나 내가 틀린 것은 아닐가?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보수적이 되어가는 이유다. 두려움이 쌓이며 어느새 그것을 바로 보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진다. 그래서 외면하고 피하려고만 한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잘못 판단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애써 무시하고 이제까지 해 왔던 대로만 고집하려 한다. 믿어왔던 대로만 고집하게 된다. 역시 무지다. 알지 못하기에 두렵고, 두렵기에 불안하고, 그래서 자꾸만 도망치려 하게 된다. 그런데 과연 '나'라고 하는 실체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게 된다면 과연 그때도 마냥 두렵고 불안할까?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보게 된다. 납득할 수 있는 이유들을 찾게 된다. 화해할 수 있게 된다. 용서할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역시 종교의 영역이다. 그리고 철학의 영역이기도 하다. 인간은 그러한 구원을 얻기 위해 종교를 가지고, 철학을 고민하는 것이다. 그 출발은 곧 자신, 그 자신을 찾는 것이 바로 사춘기다. 아주 엇나가게 되면 어렸을 적 사춘기의 소년들이 그러하듯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갈 수도 있다.

필자의 이야기를 보았다. 필자 역시 한때 공황장애 비슷한 것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온몸의 피가 발끝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아마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면 그렇지 않을까? 모든 피가 빠져나가며 몸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심장은 거칠게 뛰었다. 금방이라도 멎어버리려는 것처럼. 당장 멈춰버리기 위해 있는 힘껏 달리고 있었다. 잠을 자려면 가슴이 답답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불꺼진 방안이 마치 커다란 관속과도 같았다. 물론 지난 이야기지만 지금도 역시 마치 환각과도 같은 고통 속에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때로 한다. 그냥 서럽고, 그냥 두렵고, 그냥 불안하고, 모든 것이 원망스럽고 증오스럽다. 말할 수 없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아마 그래서 반려동물이라 하는 모양일 것이다. 돌이켜 보면 고양이를 기르면서였다. 항상 필자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필자에 의존하는 녀석들을 보면서 더욱 강하게 필자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최소한 이 녀석들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이 녀석들에게는 나라는 존재가 의미가 있다. 가치가 있다. 사람은 자기가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서 살아간다. 이타란 오히려 가장 궁극적인 이기임을 깨달았다. 많이 나아졌다.

<남자의 자격>이 갖는 미덕일 것이다. <남자의 자격>은 <무한도전>이 아니다. <런닝맨>도 아니다. 그곳에는 남자들만이 있다. 한창 혼란스러운 나이의 중년의 남자들이 있다. 강해야 한다. 멋져야 한다. 훌륭해야 한다. 대단해야 한다. 남편으로써, 아버지로써, 친구로써, 동료로써, 선배나 혹은 후배로써, 그런 사회가 요구하는 남자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보여야 한다. 최소한 연기해서라도 보여주어야 한다. 여전히 <남자의 자격>에는 그런 요구들이 따라붙는다. 더 열심히 하라. 더 멋지게 잘하라. 하지만 <남자의 자격>이란 한창 혼란스러운 사춘기라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어째서 그래야 하는가? 굳이 그러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 않은가? 비겁하게 뒤로 빠지고, 나약하게 중간에서 포기하고, 한심하게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바로 남자 자신이다. <남자의 자격>의 멤버들 그들 자신이다. 그들에 이입하여 보고 있는 나 자신이기도 하다. 새로운 역할을 찾아간다.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것, 과거에 해 왔던 것들에 대해서, 자신을 찾고 스스로 나아갈 바를 찾는다. 그것이 <남자의 자격>이라 하는 것일 게다. 때로 한심해 보여도 그것이 바로 남자의 본모습이다. 그들의 현재다.

중간에 포기해도 상관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되면 포기하는 것이다. 도저히 안되겠으면 한 발 물러서는 것도 좋다. 이제 곧 그만둔다는 PD에게 새로운 피디에게 말이나 잘 해 달라며 부탁하는 이윤석의 비굴함이야 말로 비겁하지 않은 용기인 이유다. 이제는 그에게도 가족이 있다. 아내가 있다. 한 집안의 가장이다. 멋있게 폼잡으며 그만두느니 비굴하게라도 부여잡는 쪽이 가장으로서 자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할 수 있을 때 그는 진정 용기있는 사람일 수 있다. 사실 그러자는 실험카메라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또한 이윤석이다.

상처투성이에, 그 상처를 끌어안고 오히려 다른 이의 상처를 보려 하는 김태원이나, 강하고자 하는 강박에 당황스러운 상황에서조차 태연하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한 김국진이나, 이기적으로 보이지만 나름대로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려 애쓰는 전현무, 바보같을 정도로 한 마디도 못하는 윤형빈은 또한 필자 자신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필자 역시 회사로부터 해고통보를 받았을 때 그 자리에서는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다.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 지 알 수 없어서였다. 양준혁은 보이는 이미지 그대로 한 우물만 파는 올곧음이 그를 노총각으로 있게 만들었다. 과연 이경규가 어째서 이경규인가, 30년 넘는 세월을 어째서 그는 최고의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있었는가? 자신의 감정마저도 냉철하게 통제하려는 그 엄격함은 그의 공황장애가 다른 곳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게 한다. 참 피곤하게 사는 사람이다. 그 피곤함이 그를 최고로 만들었다.

모두가 자신이다. 김태원이고, 김국진이고, 이윤석이고, 양준혁이고, 윤형빈이다. 전현무이고 이경규다. 이제까지의 캐릭터보다 더 강력한 캐릭터였다. 어떤 부분은 일치하고 어떤 부분은 의외의 모습이다. 그 모두를 더해 이경규가 되고 김태원이 되고 김국진이 되고 이윤석이 된다. 전현무가 되고 양준혁이 되고 윤형빈이 된다. 그것이 시작이다. 그로부터 전제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하려 하고 어찌 하고 있는가? 어찌하려 하고 있는가?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다름을 납득하고 받아들인다. 비로소 세계는 넓어지며 확정될 수 있다.

한 번 쯤 필요한 과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병원을 찾지 않더라도 찬찬히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자기를 돌아보고 자신을 찾아간다. 부수는 과정이 필요하다. 부수고 부정하여 지우는 과정 또한 필요하다. 그리고 그 위에 새로운 자신을 찾아 쌓아간다. 나는 누구이고 지금 어디에 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전환기 다가올 이후를 생각헤 반드시 필요한 준비가 아닐까? 여행을 가려면 가이드가 필요하듯 삶에도 가이드가 필요하다. 자신이라는 가이드다.

의미깊었다. 어느새 필자도 그런 나이가 되었구나. 필자도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답을 찾을 나이가 되어 있구나. 그럼에도 사람은 살아간다. 치열하게. 당장에 충실하게. 그래서도 더욱. 나는 살아있다. 그 어떤 판단으로부터도 독립된 판단 이전의 자신이다. 나는 나다. 흔한 말이지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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