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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1.07 18:13

브레인 "위악의 반역자, 나쁜 남자 이강훈에 대한 강훈앓이의 이유..."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거스르며 욕망하는 인간이 있다. 그것을 보려 한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문득 생각한다. 왜 이리 통쾌한가? 그다지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욕심많고, 이기적이고, 계산적이고, 더구나 이번주 16화에서 조교수가 되고 난 다음의 모습들에서는 속좁은 편협한 뒤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강훈(신하균 분)이 잘되니 이리 기분이 좋은가?

이번주부터 <샐러리맨 초한지>라는 드라마가 드라마 <브레인>과 같은 시간에 SBS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어떤 드라마인가 한 번 보았다. 그리고 주인공 유방(이범수 분)의 캐릭터를 보면서 그 단초를 잡았다. 좋은 드라마는 때로 다른 드라마를 이해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드라마란 곧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추구는 작품과 작품을 넘어, 방송사와 방송사를 넘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빌미가 되어 주고 있다. 삶에 대한 체험과 추구가 갖는 동질성이다.

참으로 뻔뻔하다. 그다지 대단할 것 없는 부모와 별 볼 일 없는 집안 사정, 학벌은 더 별 볼 일 없다. 그런데 천하그룹이라는 굴지의 대기업을 목표로 한다. 회장의 아들인 호해(박상면 분) 앞에 서슴없이 무릎을 꿇고 개짖는 소리마저 낸다. 산업스파이가 될 것을 요구해 오자 그마저 기꺼이 받아들인다. 항우(정겨운 분)의 지시를 받은 한신의 제의에도 크게 고민하지 않고 응하여 그가 제공한 천하그룹의 입사시험문제를 이용해 수석합격의 영광마저 누린다.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도 천연덕스럽게 항우가 대신한 대답을 자기 대답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에게 양심이란 있을까?

하지만 과연 대한민국과 같은 엄격한 학벌사회에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 유방과 같은 삼류대학 출신에게 천하그룹이라는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입사시험에서 수석합격이라는 성적을 거두고 전략사업본부에 배치받은 그 날 사수인 번쾌(윤용현 분)은 말한다. 바로 유방이 앉은 자리에서 삼류대학 출신인 선배가 도저히 못견디고 회사를 그만두고 나갔다고. 책상서랍에는 그가 겪었을 마음고생이 살벌한 낙서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마음편하게 입시에만 전념할 수 없었던 유방의 처지에서 삼류대학도 감지덕지일 테지만 그가 가진 이른바 스펙으로서는 화려한 스펙을 지닌 다른 경쟁자와 경쟁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런다고 포기해야 할까?

다시 <브레인>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열심히 고재학 과장(이성민 분)의 손발 역할을 해왔다. 자존심을 굽히고, 허리를 숙이고, 오로지 고재학 과장의 입안의 혀처럼 최선을 다해왔다. 하지만 정작 조교수 임용에 있어 고재학 과장이 지지한 것은 그에게 충성을 바쳐온 자신이 아닌 병원장이 유럭시되는 내과장 서교수의 아들 서준석(조동혁 분)이었다. 하긴 예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강훈도 말하고 있었다. 서준석이 유학을 예정하고 있지 않았다면 대학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출발점이 다르다. 단지 같은 대학의 교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서준석에게는 그가 평생을 노력해도 안 되는 일들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

김상철(정진영 분)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국내 최고의 권위를 갖는 뇌외과 전문의다. 누구도 그의 의사로서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의 실력을, 그의 명망을, 그의 인품을 감히 무어라 토를 달지도 않는다. 오로지 그에게 거스르려는 사람이 있다면 주인공 이강훈 뿐이다. 여유를 가져도 된다. 굳이 더 많은 더 큰 것을 노리지 않고 현재에만 충실해도 그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서준석이나 김상철이나 그다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해도 모드 것을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런데 이강훈은 그런가?

사실 이강훈만이 아니다. 고재학 과장도 마찬가지다. 이강훈을 배신한 동승만(이승주 분)도 마찬가지다. 양범준(곽승남 분)은 물론 올곧은 이미지의 조대식(심형탁 분)조차 그토록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으면서도 이강훈이 주는 편합하고도 일방적인 기회를 고맙게 받아들인다. 이강훈에 대한 미운 감정은 미운 감정이더라도 윤지혜(최정원 분) 역시 이강훈에게 사정해야 하는 입장이다. 모두가 그렇게 절박하다. 그런데 단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막연히 기다리며 그들이 바라는 착한 사람을 연기하고 있어야 할까? 그러면 이강훈에게도 서준석과 같은 기회가, 김상철과 같이 여유를 부려도 되는 위치가 제발로 걸어들어오는 것인가?

물론 조교수의 자리에 그렇게 안달하지만 않는다면 전혀 문제될 것은 없다. 현재의 위치에 만족하고 그에 대해서만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임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묻게 된다. 그렇다면 이강훈과 같은 이는 조교수와 같은 더 높은, 더 영광된 자리를 처음부터 포기하고 있어야 하는가? 그것이 주어질 때까지 손놓고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가? 동기인 서준석이 조교수가 되는 것을 축하해주며, 혹시라도 누군가 자신을 인정해 줄 때까지 막연히 그 때만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겠는가? 아니면 상관없고? 이강훈에게 조교수란 처음부터 허락되지 않는 자리였을까? 그저 기다리고만 있으면 주어지는 그런 자리였을까?

이를테면 그것은 반역이었을 것이다. 그렇게는 못하겠다. 제아무리 고재학 과장이고 그동안 그의 손발이 되어 충성을 다 해 왔어도 그가 자신의 조교수 임용을 거부하고 방해한다면 그는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제아무리 김상철의 의사로서의 실력이나 권위가 대단해도 자기가 가려는 길을 막아선다면 그는 단지 적일 뿐이다. 동기도 상관없다. 서준석이 갖는 배경도 그에게는 전혀 아랑곳없다. 나는 조교수가 되고자 한다. 조교수가 되어 자신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를 막아서는 모두와 나는 싸울 것이다. 모두가 강요하는 현실에 순응하는 좋은 의사에 대해 이강훈은 현실을 뒤집어서라도 자기가 목표하는 바를 이룰 것이라 선언한다. 행동에 나선다. 차라리 천하대학병원을 그만두더라도 내가 욕망하는 바를 추구하겠다.

물론 과연 조교수의 자리에만 오르면 끝인가? 조교수의 자리가 그가 추구해야 할 궁극의 목표인가? 조교수라고 하는 자리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자리인가? 그러나 그것도 일단 한 번 직접 올라가 보고 판단할 일이다. 조교수가 되어 조교수가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자리라 하는 것과, 조교수도 되지 못한 처지에서 조교수란 어떤 자리라 말하는 것과는 전혀 천지차이다. 일단 조교수가 되고 나서 생각한다. 조교수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그때 다시 여유를 가지고 생각한다. 지금은 단지 스스로가 욕망하는 것에만 충실하려 든다. 지금에야 동승만의 방식을 동정하지만 당시에는 그 또한 동승만과 같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SBS의 수목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강채윤은 그리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소망하는 것 좀 갖겠다는데 그것이 그리 지옥이냐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강훈이 조교수가 되려 한다. 조교수가 되고자 기존의 질서와 맞서싸우기 시작한다. 질서를 흐트리고 가치를 거스른다. 욕심을 부리며, 이기를 챙기며, 철저히 계산적으로 이기를 위한 기회만을 노린다. 나쁜 사람이 되기를 거부하지 않으며 오로지 그 하나만을 추구하려 든다. 결코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세상이란 그저 착하게만 살려 해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은 법이다. 그것을 사람들도 안다. 이강훈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후련한 것이다. 그토록 궁지에 몰리면서도 이강훈은 자신의 욕심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소망하는 단 한 가지를 포기하지 않고 부여잡는다. 그를 위해 주위와 적대한다. 권력자인 고재학과 적대하고, 최고의 권위를 지닌 김상철과도 적대한다. 동기이고 하니 서준석과 친하게만 지낼 수 있다면 그의 아버지인 서교수도 그의 배경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강훈은 평생 서준석의 밑이다. 서준석을 기꺼이 경멸하고 조롱한다. 천상천하유아독존. 그는 욕망하는 인간이다. 욕망하는 것이 있고 그에 충실하려는 인간이다. 모두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고재학과도 서준석과도 김상철과도, 심지어 천하대학병원과도 싸워 조교수라는 승리를 쟁취해낸다. 그순간 이입하게 된다. 그래 세상을 때려부수고 도전하자.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승만이 이강훈이 될 수 없는 이유다. 같아지려 해도 두 사람은 결코 같아질 수 없다.그에게는 누구보다 강력한 무기가 있다. 의사로서의 그의 탁월한 실력이다. 바로 의사라고 하는 전문직을 소재로 한 드라마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세상에 다시 없을 형편없는 인간이라 할 지라도 수술대에 서는 순간 과연 사람을 살릴 수 있는가에 모든 판단과 평가가 집중된다. 어떤 신분에, 지위에 있어도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의사가 좋은 의사다. 그것만은 서준석의 배경도, 김상철의 권위도, 고재학의 권력도 어떻게 할 수 없다. 환자와 마주하는 순간 의사는 단지 혼자일 뿐이다. 그것을 이강훈도 깨달아야 한다. 환자는 조교수라는 자리가 아닌 의사 자신을 보고 믿고 의지한다는 것을.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강훈은 당당하다는 것이다.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동기 서준석에 대해서조차 당당하다. 거래를 하려는 상황에조차 그는 김상철에게 당당하게 자신을 주장할 수 있다. 물론 나름대로 계략도 쓰고 모략도 부린다. 틈을 노리고 비열한 수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담보하는 것은 그의 실력이다. 실력만으로 부족한 현실에 다른 수단을 빌어 보기도 하지만, 그러나 결국 마지막에 이르는 곳 역시 의사로서의 그의 뛰어남이다. 그것이야 말로 이강훈에게 있어 자기증명이라 할 것이다. 서준석보다도 뛰어나고 김상철보다도 당당하다. 이강훈이 머리쓰는 것이 거슬리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뛰어나며 당당하다. 그야말로 가장 멋진 반역자의 모습일 것이다.

다시 말해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이강훈이란 억압된 자신인 것이다. 착한 사람이기를 강요받으며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대신일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한 번은 거스르고자 했던 적이 있지 않을가? 정면으로 치받으며 이런 것 못해먹겠다 당당히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천하대학병원을 먼저 그만두고 있었던 이강훈처럼 이처럼 부당한 현실은 그저 받아들이고만 있지 못하겠다 주어진 현실을 거부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강훈이 아니었으니까.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드라마가 있다. 드라마를 보며 사람들은 열광한다.

서준석이란 기존의 기득권의 구조다. 김상철이란 그 구조를 지탱하는 논리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이강훈은 참 몹쓸 사람이다.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기존의 질서와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기의 욕망에만 충실하려 한다. 불경하게도 자신으 욕망을 위해 그것들을 무시하고 뒤집으려 든다. 반역자다. 아니 그래서 서준석 역시 알게모르게 이강훈을 동경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강훈을 부려워하고 있다. 그 또한 혜택받은 자신의 환경에서 비주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강훈이란 홍길동이고 임꺽정이다. 홍경래다. 알게모르게 느끼고 있는 시청자의 억압된 현실을 대신해 짓부수려는 반역자일 것이다. 위악의 존재다. 현실의 선을 부정한다. 도덕과 정의를 부정한다. 그것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그같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어느새 부수고 싶은 기존의 질서와 가치, 선과 정의, 성실함이라는 도덕적 판단과 맞서도록 만든다. 그것이 통쾌하게 여겨지도록 만든다.

<샐러리맨 초한지>에서 유방이 호해에게 무릎을 꿇듯 이강훈은 고재학에게 허리를 굽힌다. 그렇다고 유방이 호해에게 마음으로 굴복한 것은 아니다. 이강훈 역시 유방처럼 단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산업스파이가 되라는 것도, 그를 위해 천하그룹에 들어가라는 것도 그래서 유방은 기껍다. 이강훈 역시 그를 위해서라면 자기 환자를 버려두고 다른 병원에서 수술할 수 있다. 잘못되었는가? 그러면 이대로 포기하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제목이 <초한지>인 이상 이범수는 왕이 될 것이다. 이가훈은 조교수가 되었다.

같은 냄새를 맡았다. 전혀 다른 장르이고 다른 스타일의 드라마지만, 전혀 다른 유형의 캐릭터지만, 그러나 유방과 이강훈에게서는 <뿌리깊은 나무>에서 정기준이 말하고 강채윤이 말한 그 백성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욕망하고자 하지만 그러나 억압된. 그것을 반역이라고 말하는. 그래서 반역자면 어떠한가? 파렴치하고 야비하고 이기적이면 어떤가? 왕이 되고 조교수가 된다.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다.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그것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같은 시간대 경쟁드라마이기는 하지만 <샐러리맨 초한지>의 선전도 기대하게 된다. 유방은 과연 어떻게 형상화되어 보여질 것인가? 그는 이강훈과 같은 반역자일 것인가? 욕망하고 추구한다. 욕망하는 이기를 위해 기존의 질서와 가치를 부순다. 파천황이다. 그래봐야 이강훈이 보이는 파천황이란 지극히 국소적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조차도 과분하다. 그런 정도로도 충분하다

분명 이강훈은 인간으로서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다. 의사로서도 좋은 의사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에게 이입한다. 그를 동정하며 연민한다. 그를 응원한다. 어째서일까? 위악을 추구하는 대중의 욕망이 그곳에 있다. 바람과 추구가 그곳에 있다. 새삼 깨닫는다. 드라마란 삶이다. 그것을 본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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