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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1.05 13:27

해를 품은 달 "허구의 시간, 가상의 공간, 상상의 조선에서 판타지는 시작되다!"

오로지 운명적 사랑만을 위한 판타지의 세계, 새로운 로맨스 판타지를 기대한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문명은 중심과 주변부로 나눌 수 있다. 중심이란 생산자다. 주변부란 그 소비자다. 이를테면 소중화와 같은 것이다. 중국문명을 동경하여 어느새 중국문명을 닮고 싶어하고 그를 담보할 무언가를 자기 안에서 찾고 만들고 싶어한다. 그래서 중화이고 소중화인 것이다.

자본주의맹아론이 바로 그러한 한 예일 것이다. 아니 자본주의맹아론이 나오게 된 계기가 바로 구일본제국의 식민사관이 만든 정체론이다. 그 기준은 당연히 유럽이었다. 일본에는 유럽의 중세와 같은 봉건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는 없었다. 조선의 역사발전은 정체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도 인정했듯 그것은 오로지 유럽의 역사만을 모델로 한 시대구분이었다. 동아시아의 역사는 따로였다. 하지만 유럽이 문명을 주도하는 이상 유럽이 모든 것의 표준이 된다.

필자가 이른바 한국형 무협이라 일컫는 일련의 작품들을 무척 꺼려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중국의 무술과 조선의 무술은 분명 다르다. 일본의 무술과도 다르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그 구현하는 형태도 다르다. 중국무협에 나타나는 무공이란 바로 그러한 중국적 전통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기가 있고, 내공을 운용하고, 장풍과 검기를 쓰다. 그런데 그것이 워낙 그럴싸해 보이다 보니 어느새 우리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으면 하게 된다. 고구려가 나오고 단군이 나오고 어떻게든 중국보다 더 빨리 더 우수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음을 강조하려 들게 된다. 주변부다. 중국의 무공을 동경하여 어느새 한국무술의 전통마저 그에 끼워맞추려 드는 것이다.

과연 우리나라 역사물에서 언제부터 무녀라 하는 것이 중요하게 등장했을까? 더구나 그 무녀의 형태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무당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의 무당은 전통적으로 몸주를 섬긴다. 신을 직접 몸으로 받아들여 그 신통으로 예언을 하고 부정을 막는다. 그러나 최근 여러 형태로 한국의 대중문화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무녀의 존재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신통을 타고 났으며 주술을 통해 그것을 발현한다. 한국 전통의 무녀와는 사뭇 다르지만 상당히 익숙한 모습들이다. 과연 그들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드라마를 보다 말고 작가가 여성이겠구나 확신을 가지게 된 이유였다. 필자에게도 매우 익숙한 모습이었다.

더구나 판타지와 가상역사의 경계가 매우 모호하다. 가상역사란 비록 가상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라고 하는 사실에 근거한 거이다. 조선이라는 시대가 있다. 조선이라고 하는 사회가 있다. 조선의 사람과 조선의 문화와 조선의 삶이 그 안에 있다. 그 위에 나름의 작가의 상상을 더한다. 역사에 없던 새로운 왕을 만들고 그 왕의 치세를 만들고 그 왕의 치세에 어울리는 사건들을 만든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이상 그것은 조선이라고 하는 실재했던 실체 위에 쌓아 올린 허구의 구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사 기존의 조선을 부정하고 싶더라도 그것은 기존의 조선이라고 하는 실체를 전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오로지 작가의 상상력에 의지해 작품을 써갈 때 그것을 판타지라 부른다.

솔직히 굳이 조선이라는 우리 역사에 실재했던 나라의 이름을 빌려가며 드라마를 만들었어야 했는가 의문이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한 마디로 정의된다. 성리학의 나라다. 성리학을 배제하고서는 조선을 이야기할 수 없다. 유럽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기독교를 배제할 수 있는가? 아랍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정작 이슬람이 아닌 불교나 힌두교가 나타난다고 생각해 보라. 이슬람의 사원에서 우상을 섬기며 여제사장들이 아즈테카의 인신공양을 알라신께 올리고 있다. 과연 그것을 최소한 이슬람이 나타난 이후의 아랍을 배경으로 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조선에서도 궁궐에 무당이 출입한 기록이 아주 없지는 않다. 다만 그런 때마다 난리가 났다. 무당이란 미신이다. 성리학의 합리주의는 그렇나 미신을 철저히 배격했다. 그것은 유교가 철저히 금하던 괴력난신이었다. 도교식 제의를 올리던 소격서마저 용납하지 못했던 것이 유학자들이었다. 그런데 궁궐 안에 무려 무녀로 이루어진 성숙청을 차려놓고 공식적으로 점을 치고 부적을 쓰게 한다? 설사 반드시 필요해서 그렇게 설정했다손치더라도 최소한 성숙청을 반대하는 유학자의 움직임을 강력하게 묘사했으면 어땠을까? 과연 조선에서 성숙청이란 용납될 수 있는 존재던가?

성숙청의 무녀 아리(장영남 분)이 거열형을 당해 죽는 장면 역시 불필요하게 자극적으로 연출되어 있었다. 아마 극적으로 보이고자 굳이 거열형이란 가장 참혹한 형벌에 처했던 모양이었는데, 그러나 조선사회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처벌에 대해 그 수단에서 상당한 차등을 두었었다. 심지어 어지간한 일로는 여성의 경우 고문조차 잘 하지 않았다. 역모라고 하는 최악의 경우에조차 여성은 죽이기보다 관청에 노비로 삼아 배속시켰다. 하물며 고작해야 무녀에 불과한 아리를 그것도 전시효과를 노린 거열형에 처해 중인환시리에 죽인다? 신분이 천하면 천한 만큼 아무리 중대한 죄를 지었어도 조용히 흔적도 없이 지워진다. 차라리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게 소리소문없이 치워지는 쪽이 더 극적이었을지 모르겠다.

하기는 어린 연우(김유정 분)이 어린 이훤(여진구 분)이 만나는 장면부터가 확실히 판타지스럽다. 여성을 차별하여 바깥활동도 못하게 한다면서 과거급제자들을 축하하는 자리에는 어린 연우마저 참석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연회장에서 연우는 오라비 염(아역 시원 분)과 운(아역 이원근 분)을 당당히 훔쳐보고 있다. 역시 조선의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어떤 의도를 위한 작위적 설정이 보인다. 조선이라는 배경은 단지 수사일 뿐 그쪽이 더 중요한 것이다. 무녀와 운명과 사랑, 전근대적인 로맨스판타지에 그 배경으로서 조선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이 필요했을 뿐이다.

어쨌거나 이로써 정리되었다. 이 드라마는 판타지다. 배경이 굳이 조선일 필요는 없다. 단지 한국인에게는 조선이라는 배경이 더 편하다. 유럽의 왕궁이어도 좋고, 일본의 쿠게여도 상관없고, 중국을 배경으로 한 무협이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디에도 없는 시대, 어디에도 없던 공간이다. 없던 사람들이다. 허구의 시간과 공간 속에 오로지 작가의 의도에 의한 인물들과 관계들에 의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로맨스판타지다. 조선은 그저 편리하니 이름만 내걸 뿐이다.

물론 계속 안 좋은 쪽으로만 말하고는 있지만 역시 역사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탓에 짐짓 엄격하게 보아 그리 비판한 것이고, 사실 이런 발칙하고 무모한 시도가 한국대중문화에서도 필요하기는 하다. 역사란 그렇게 심각하기만 할 것이 아니다. 마음껏 가지고 노는 것이다. 다만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는 필요할 것이다. 기왕에 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이상 조선이라고 하는 사회에 대해서 보다 이해를 깊이 할 수 있는 설정이었으면 어땠을까? 조선은 이런 사회였다. 가상역사였다면, 아니 판타지였어도 결국 그러한 현실과 맞닿은 부분도 필요한 것이다. 아쉬운 부분이다.

로맨스로서 본다. 시공을 초월한, 정확히는 무시한 단지 궁정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판타지일 것이다. 다만 그것이 얼마나 남성시청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겠는가? 아직까지는 지나칠 정도로 여성취향이다. 얼마나 장르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남성시청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겠는가? 주연의 이름을 보니 어느 정도 설득이 될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충분하지는 않다.

일단은 보류다. 지켜본다. 그다지 흔한 장르는 아닌 만큼 얼마나 제대로 만들어지는가 지켜보고 판단한다. 출발은 많이 오글거린다. 클리셰가 많다. 익숙한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보인다. 보다 보편적일 필요가 있다. 더 친절해져야 한다. 시간이 필요하다.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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