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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5.11.26 08:09

[김윤석의 드라마톡] 마을 아치아라의 비밀 14회 "두 남자와 두 어머니, 모성부정의 이유"

어머니가 될 수 없는 처절한 외침 '그 아이 괴물이야!'

▲ 마을 아치아라의 비밀 ⓒSBS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마을 아치아라의 비밀. "그 아이 사람인 줄 알아요? 그 아이 괴물이야!"

흔히 여성의 모성을 본능이라고 말한다. 당연하게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라고. 그러나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이다. 어머니이기 이전에 여성 또한 인간이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오히려 끔찍한 기억만을 떠올리게 만드는, 자신이 원해서 낳은 것도 아닌 아이마저 어머니이기에 사랑해야 하는가? 증오하고 혐오해마지않는 상대의 아이조차도 어머니기에 사랑해주어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두 명의 서로 다른 어머니가 등장한다. 그럼에도 사랑한다. 그럼에도 자신이 낳은 딸이기에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버리려 한다. 차마 죽일 수 없기에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두려 한다. 그래도 나름대로 핏줄에 대한 - 아니 태어난 것 밖에 아무 잘못도 없는 그야말로 핏덩이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연민이고 동정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거두어 기르지 못할 것이라면 아무데라도 예쁨받으며 자랄 수 있도록 좋은 곳에 양녀로 보내자. 윤지숙(신은경 분)의 어머니(정애리 분)가 굳이 신생아 불법입양이라는 범죄에 손을 대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태어난 줄도 모르고 태어난 아이를 아무렇게나 버려둔 어린 소녀의 무심한 표정이 섬뜩하도록 애처롭다. 정작 김혜진(장희진 분)을 괴물이라 부르면서도 윤지숙은 오히려 울고 있었다. 거기서부터 틀어졌을 것이다. 어머니로서 자신이 낳은 아이를 사랑할 수 없었다. 오히려 끔찍해하며 거부해야 했었다. 어머니로서 자격이 없다. 그래서 더 간절히 아이를 바랐을 것이다. 어머니로서 자기가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아이를. 자기가 어머니임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줄 사랑스런 자기의 아이를. 어쩌면 딸 서유나(안서현 분)가 미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딸을 미워할 수 있다는 사실에 지레 놀랐던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은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그만큼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딸 서유나의 체온이 낯설기만 하다.

그나마 딸 가영(이열음 분)만이 그동안의 고통과 원망과 굴욕과 분노와 증오를 달래주는 가림막이었을 것이다. 딸이었기에, 그리고 어머니였기에 경순(우현주 분)는 어떻게든 자신의 딸을 지키려 모든 것을 잊고 묻으려 했었다. 딸만 행복할 수 있다면. 딸만 아무일 없이 잘 자랄 수 있다면. 자기최면이었을 것이다. 현실을 잊으려 한다. 가혹한 현실과 타협하려 한다. 그래도 자기에게는 딸이 남았다. 하지만 그 딸이 사라졌을 때 그녀에게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아니 하나 남았다. 딸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것이 기억하기도 끔찍한 그 남자가 남긴 이름도 생소한 유전병이었다. 김혜진을 죽음의 공포에 떨게 만들고, 이제 자신의 딸마저 죽게 만들었다. 멈춰두었던 감정이 봇물처럼 터져나온다. 딸의 시신을 증거로 그 남자를 신고하려 한다. 실제 처벌이 가능한가는 이미 뒷전이다. 그를 잡아야 한다. 그를 잡아 벌주어야 한다.

차라리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아니 아예 죄라는 자각조차 없다. 전혀 악의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피해자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려 했다는 아가씨 강필성(최재웅 분)의 말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인 양 행세한다. 자신이 폭력을 휘둘러 하마트면 목숨까지 위협해 놓고서도 오히려 상대가 자신을 무섭게해서 그런다며 불쌍한 표정을 짓는다. 김혜진과 가영의 불행한 출생의 원흉임이 밝혀진 대광목재의 남수만(김수현 분)은 과거 자신이 저지른 성폭행을 무혐의로 만들기 위해 아가씨 강필성의 도움을 받은 바 있었다. 자신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있다. 이제는 정말로 깨끗하게 새 삶을 살아가려 하고 있다. 이미 많은 마을의 여성들이 고통받고 여전히 고통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 무심한 악의조차 못되는 비겁함이야 말로 이 모든 불행들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죄는 남성이 짓는다. 그러나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은 항상 여성들이다. 정작 죄를 지은 남성들은 아무일없이 살아간다. 오로지 피해자여야 할 여성들만이 서로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하며 죄인이 되어 남은 시간들을 고통속에 살아가야 한다. 그나마 김혜진을 위해 제를 열고 어머니인 윤지숙을 보내 위로하게 하는 것은 같은 어머니이자 여성으로서 옥여사(김용림 분)의 배려였을 것이다. 남편인 서창권(정성모 분)은 이유따위 상관없이 그저 윤지숙을 욕하고 침뱉고 그녀를 경멸한다. 김혜진의 사정을 알면서도 그녀를 외면해야 했고, 그녀를 이용해야 했으며, 그녀를 밀어내야 했다. 살기 위해서다. 어떻게든 서창권을 붙잡으려는 윤지숙의 노력은 추하도록 비루하고 비참하다. 이해한다는 말도 필요없다. 어차피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반전을 예감한다. 아니 반전도 아닐 것이다. 이미 힌트는 충분히 주었다. 김혜진의 가방이 불탄 채 발견된 곳은 대광목재 근처의 쓰레기장이었다. 살해당한 그날도 김혜진은 대광목재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악의조차 없이 거짓말마저 하지 못하는 무심한 남자들과는 달리 단 한 사람 당시의 상황에 대해 거짓말한 사람이 있었다. 누구보다 간절히 지켜야 하는 대상이 있었던 한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다. 지키기 위해 잊으려 했고, 잊기 위해 버려야 했다. 딸을 위해 자신이 죄인이 되었다. 아마 그 사실 역시 남편이자 아버지인 남자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저 자신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만일 김혜진을 누군가 죽여야 했다면 바로 그 사람이 아니었을까.

아마 같은 여자로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단지 윤지숙만을 원망했다. 자신을 버리고, 이제는 자신이 죽도록 내버려두는 윤지숙의 무심한 이기와 탐욕만을 탓하며 미워했었다. 그러나 알았다. 무엇이 윤지숙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이 잘못되었다. 이 모든 일들의 원흉은 발단을 만든 그 남자에게 있었다. 어쩌면 윤지숙의 의도와는 달리 자신의 신장을 떼어주려는 어려운 결심에서 딸을 온전히 버려둘 수 없는 낳아준 어머니의 모성을 느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더욱 어머니의 몫까지 원흉을 만나 해결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불행을 당했다. 그녀의 분노는 윤지숙이 아닌 그 원흉을 향한 것이었다.

갑자기 장르가 호러로 바뀐다. 그동안 죽은 사람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서유나 뿐이었다. 아니 드러내놓고 말은 안해도 윤지숙 역시 죽은 김혜진을 몇 차례 본 바 있었다. 그러나 그런 정도는 단지 환각이나 착각이라 여겨도 되는 수준이다. 오로지 감춰진 진실을 향해 다가가는 것은 살아있는 이들의 타협할 줄 모르는 용기와 멈출 줄 모르는 의지였을 것이다. 언니와 관련한 진실을 알고 싶은 한소윤(문근영 분)의 의지와 약간의 허세섞인 공명심까지 더해진 말단순경 박우재(육성재 분)의  정의감이었다. 그런데 이제 김혜진의 죽은 혼이 한소윤의 앞에 나타나 무언가를 전하려 한다. 과연 죽은 김혜진은 자신의 동생 문소연에게 어떤 말을 남기려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일까. 귀신에 의지해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한다면 드라마라는 자체가 의미없어진다. 계기가 된다. 단서가 된다. 하지만 전부가 되지는 않는다.

남성들에 의해 가해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죄의식조차 없이, 오히려 친절과 선의로, 심지어 스스로 피해자라 여기는 그 비겁한 잔인함이다. 피해자의 눈물이 또다른 피해자를 만든다. 피해자들의 상처가 또다른 상처를 만들어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오히려 비난하고 욕하기 바쁜 아픈 진실들이다. 문득 어느새 모두에게 잊혀져가는 어떤 불행한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떠올리는 것조차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그들이 가혹한 것은 그만큼 세상에 그들에게 가혹했기 때문이다. 필사적으로 버티며 씹어뱉듯 내뱉는다.

어머니가 딸을 미워해야 하는 이유다. 자기가 배아파 낳은 자식을 끔찍하도록 혐오하고 증오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차라리 자신의 일부를 떼어서라도 그 끔찍하고 더러운 것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상식과 정의를 부정당한다. 그 잔혹함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가. 차라리 너무 태연해서 현실감이 없다. 잔인하다. 지독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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