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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5.11.25 08:05

[김윤석의 드라마톡] 육룡이 나르샤 16회 "홍인방과 이방원, 그리고 권력의 본질"

기습에 이은 반격, 홍인방의 허상을 부술 명분을 만들다

▲ 육룡이 나르샤 ⓒSBS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육룡이 나르샤. 기책은 기책으로 꺾는다. 정도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기에 기책인 탓이다. 자신에게 불리한 판을 뒤집어 일거에 주도권을 쥐고 모두를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는다. 도당에서 자신의 탄핵을 논의하고 있을 때 오히려 탄핵한 당사자인 조반을 역모로 몰아 시국사건으로 만들어 버린다. 조반의 역모를 조사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역모에 동조하는 것이다. 거짓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홍인방(전노민 분)이 의도한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

과연 오로지 자신의 손에 들린 칼에 의지해 살아가는 무사답게 이방지(변요한 분)야 말로 누구보다 정확하게 권력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길태미(박혁권 분) 역시 마찬가지였다. 홍인방의 말을 듣는 순간 바로 이해하고 있었다. 권력이란 단지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니저러니 아무리 휘황하게 말을 꾸며 설명하려 해도 결국 당장 자신의 목에 들이밀어진 시퍼런 칼날 이상도 이해도 아닌 것이다. 그 칼을 막을 수 있거나 혹은 치울 수 있다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해도 좋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면 선택은 죽거나 아니면 따르는 것 뿐이다. 선택은 자신이 해도 그 룰을 정하는 것은 칼을 쥔 상대방이다.

"그냥 한다!"

착각한다. 칼을 쥔 자신 역시 원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며 애써 스스로와 주위에 변명하고 납득시키려 한다. 힘으로 억압하여 상대의 동의를 이끌어낸 것이 아니었다. 폭력으로 협박하여 상대를 복종케 한 것이 아니었다. 정당한 거래였다.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대화와 설득을 통해 상대의 자발적인 동의와 복종을 이끌어낸 것이었다. 처음에는 자신 역시 그것이 단지 변명이고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테지만, 시간이 지나는 사이 자신도 그만 그 변명에 속아넘어가고 만다. 모두가 기꺼이 자신의 뜻을 따르고, 자신의 말에 복종하며, 자신의 앞에서 입을 모아 덕망과 업적을 칭송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다. 자신의 권력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정의롭지 않은 권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본질을 꿰뚫고 까발린다. 그 장식들을 부숴버린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권력이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쓰이는 것인가. 그래서 그냥 한다. 그럴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고 그럴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반대하는 자는 힘으로 억누른다. 그래도 반항한다면 폭력으로 길들인다. 그래도 굽히지 않는다면 그때는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 버린다. 남는 것은 자신을 따르고 자신에 복종하며 자신을 위해 찬양하는 무리들 뿐이다. 그 가운데 자신은 항상 옳다. 수단이 정당하지 않더라도 마침내 해동갑족을 굴복시키고 그 위에 군림하게 된다면 역시 자신이 쓴 수단까지 옳은 것이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당한 조반과 이성계(천호진 분)만이 역적이라는 오명을 쓰고 죽어갈 뿐이다. 

힘만 있으면 명분도 정의도 그냥 따라온다. 힘을 가진 자가 정의라 하면 정의가 되는 것이고, 힘이 없는 자가 아무리 정의를 외쳐 부르짖어도 힘을 가진 자가 악의라 단정짓고 찍어누르면 그대로 악이 되고 마는 것이다. 홍인방이 감옥에서 감히 거부할 수 없는 폭력 앞에 스스로 굴복하며 깨달은 세상의 진리였을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자신 홍인방마저 굴복했듯 세상 역시 가혹한 폭력 앞에 굴복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자신과 닮은 이방원을 괴롭히며 그를 굴복시키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자신은 옳다. 굴복했어도, 타협하고 변절했어도, 그래서 타락해 있어도, 그러나 자신은 옳았다. 마지막 자존심일까?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발버둥이었을까? 역시 이방원(유아인 분)만이 그 생각을 정확히 꿰뚫는다.

아무도 자신들을 거스르려 하지 않았으니까. 누구도 자신들에 도전하거나 위협을 가해오지 않았었으니까. 그저 이름만으로도 충분했다. 해동갑족이라는 명성에 안주하려 했다. 그것이 자신들이 가진 힘의 전부다. 이름만 지키면 된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누려온 명성만 지킬 수 있으면 된다. 그 약점을 찌른다. 그러나 지금 당장 그들의 목줄을 쥐고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홍인방 자신이다.  해동갑족의 하나인 황려 민씨를 찾으며 이끌고 온 가병들처럼 이름만으로는 감히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의 폭력이 곧 자신의 힘인 것이다. 그 대단하던 해주 조씨의 조반조차 간수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그저 무력하게 맞고 있을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자신들의 이름이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할 때 자신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동안 자신들이 내세운 명분인 평화와 안정은 그저 싸우는 것을 피하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신들을 위해서 무엇도 판단하거나 결정할 수 없다.

정도전은 자신의 정의에 사로잡혀 있다. 이성계는 자신의 명분에 얽매여 있다. 각자 자신의 신념과 가치에 붙잡혀 쉽게 움직이려 하지 않고 있다. 방관자였을 것이다. 스스로 꿈을 꾸기보다 다른 이의 꿈을 지켜보는 위치에 머물겠다. 구애될 자신 자체가 없었다. 이방지가 본능적으로 권력의 본질을 꿰뚫었듯 이방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홍인방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고통과 굴욕등을 통해 이방원이라는 자신을 철저히 부수고 녹이고자 했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려 했었다. 어쩌면 유일하게 남은 것은 첫사랑 분이(신세경 분)에 대한 설레임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 뿐이었을 것이다. 지킬 것이 없기에 가리는 것도 없다. 폭두가 된다. 이방원 역시 해동갑족이란 이름 뒤에 가려진 그들의 실체를 꿰뚫는다. 그리고 홍인방이 그랬던 것처럼 협박을 통해 해동갑족을 굴복시키고 그들의 동의를 얻어낸다.

어차피 홍인방이 가진 권력 또한 실체없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순군부를 장악하고 역모를 꾸며낼 수는 있어도 사실 그것이 전부다. 굳이 이인겸(최종원 분)을 움직여 최영(전국환 분)을 견제하려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해동갑족을 이용하여 이성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운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오로지 그들이 가진 군사력이야 말로 진짜 힘이었다. 무어라 변명하고 항의하더라도 무시하고 상대의 목줄을 끊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단 하나의 힘이었을 것이다. 해동갑족이야 말로 그 힘을 숨기고 속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최영만 움직일 수 있다면. 최영과 이성계가 행동을 같이 한다면. 필요한 것은 그를 위한 시간과 명분 뿐이다. 홍인방의 계략을 역이용한다. 허상뿐인 홍인방의 계획의 취약성을 이용하여 도리어 홍인방을 잡기 위한 올가미를 만들려 한다. 이미 한 번 홍인방의 협박에 굴복했다면 자신의 협박에도 굴복하게 될 것이다. 더 직접적이고 더 노골적인 협박이라면.

정도전과 이방원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정도전과 홍인방의 차이이기도 했다. 그동안 철저히 홍인방을 농락해 왔지만 홍인방의 집요하고 치열한 권력의지는 마침내 정도전을 막다른 궁지로 내몰고 말았다. 사실상 이방원이야 말로 홍인방의 후계자였을 것이다. 철저히 홍인방에 의해 길러지고 만들어진 자신의 닮은 꼴이었을 것이다. 정도전을 스승이라 부르지만 실제 이방원의 스승은 홍인방이었다. 살모사처럼 홍인방을 잡아먹고 마침내 용이 되기 위한 긴 꿈을 꾸기 시작한다. 오로지 그것만이 그의 공허를 메워줄 수 있다.

역시나 왕은 이름만 나온다. 모든 것은 도당에서 대신들이 결정한다. 주요인물들 사이의 역학관계가, 그리고 그들의 지략과 무력이, 그 숨은 의도들이. 그래서 더 극적이다. 해동갑족이 홍인방의 협박에 굴복하여 이성계를 역적으로 모는 연판장에 서명하려는 순간 가별초를 이끌고 이방원이 난입하여 상황을 바꾼다. 적당한 명문을 쥐어주고 화약이라는 현실의 위협을 가한다. 자신마저 궁지로 몰아세운다. 돌일까? 화약일까? 분이의 선택이 차라리 협박에 굴복한 해동갑족들을 허탈하게, 그래서 더욱 스스로의 선택을 정당화하도록 몰아세운다. 아무리 돌상자를 화약으로 착각하여 억지로 서명했다고 남들에 털어놓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름밖에 없는 그들이기에 이름을 지켜야 하는 이유란 각별할 수밖에 없다.

홍인방의 기습에 이은 이방원의 역습으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고 만다. 민다경(공승연 분)이 예언한대로 이인겸이라는 우산이 치워졌을 때 더 이상 자신들을 적대하는 최영의 무력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수단이란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홍인방이 해동갑족이 가진 권력의 실상을 꿰뚫었듯 정도전과 이방원도 홍인방의 권력이 가진 허상을 꿰뚫는다. 명분까지 주어진다. 역시 자만했을 것이다. 지키기보다 쟁취하려 했었다. 뒤를 남기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허무만큼이나 짧고 어이없는 몰락이었을 것이다. 권력의 정점에서 추락만이 남는다.

이방원과 사랑마저 않게 되자 더욱 분이의 역할이 모호해진다. 아직 동방쌍룡24수 가운데 22수까지밖에 배우지 않은 무휼(윤균상 분)의 역할을 기대하기에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이다. 이방원의 실체가 드러나고, 정도전의 한계가 보인다. 더 기대되는 것은 삼한제일검 길태미와 이방지의 싸움일 것이다. 누가 더 센가. 죽는 것은 물론 길태미다. 그러나 누가 이길지는 역시 다음주가 되어야 알게 될 것이다. 일주일의 즐거움이다. 가장 즐기며 보는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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