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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2.15 09:42

뿌리깊은 나무 "분열하는 밀본, 정기준 세종의 외통수에 당하다!"

훈민정음 혜례는 다름아닌 소이였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이야말로 정기준(윤제문 분)의 주장에 대한 너무나 통렬한 반격이었을 것이다. 밀본은 사대부의 집합체다. 밀본의 본원은 그러한 밀본을 지키고 이끄는 구심점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특별함이 본원이라는 특권을 만들고 그를 그 안에 고립시켜 버린다.

한글이란 과연 그렇게 위험한 문자인가? 세종이 만든 한글이란 과연 그렇게 조선이라는 사회의 근간을 흔들 만큼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역병과 같은 글자인가? 그렇다면 그에 대해서도 사대부들에 물었어야 했다. 이신적(안석환 분)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밀본의 본원으로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심종수(한상진 분)이나 혜강등과는 상의했어야 했었다. 하지만 정기준은 그러지 않았다. 혼자 알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판단해서, 혼자서 결정하고 그것을 행동에 옮길 뿐이었다.

그것은 정기준이 말한 책임정치론과도 통하는 것이다. 밀본의 본원은 사대부의 우두머리다. 사대부를 이끄는 입장이다.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다. 그런데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그 판단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되겠는가? 사대부들을 위해서라도 그들이 알아도 좋은 것과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구분하여 판단해야 한다.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마땅히 그들마저도 알지 못하도록 엄격히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어찌되었는가? 인류 역사상 유언비어가 없던 시절은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특히 유언비어란 권력과 친했다. 권력이 강할수록, 권력이 무도할수록, 특히 권력이 폐쇄적일수록, 아니 권력이란 원래 폐쇄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공유하는 순간 권력은 더 이상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의심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판단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절대권력이란 다시 말해 무오류다.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아주 작은 틈조차 보이지 않는다. 항상 정의로우며 항상 완벽하여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존재. 그래서 불만이 있어도 그 불만조차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따르도록 만든다.

그런데 그런 앞에 권력과 관계된 정보를 공개해 보라. 세상의 수많은 모순과 부조리, 부당함과 불합리함에 대해 사람들이 알도록 해보라. 권력이란 그다지 옳지도 못하고 유능하지도 못하다고. 뛰어나지도 못하고 완벽하지도 못하다. 더구나 강하지 못하다. 그 작은 틈이 결국 권력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권력이 여전히 완벽한 동안에는 모두가 권력을 두려워하며 복종하지만, 그러나 권력이 한 번 틈을 보이면 모두가 도전자가 되고 반역자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권력이란, 더구나 사람들로부터 동의와 지지를 이끌어낼 자신이 없는 나약하고 무도한 권력일수록 더욱 폐쇄적인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정기준이 이미 한글을 사대부들에게 공개하기를 꺼려한 자체가 정기준이 세종에 대해 열세를 인정했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과연 그런다고 해서 사람들이 권력이 하는 말들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만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은 결코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에게는 호기심이라고 하는 불치병이 있다. 그리고 호기심은 필연적으로 정의하고자 하는 이성을 자극하게 된다. 분명 눈앞에 보이는 모순이 있다. 부조리가 있다. 부당함과 불합리가 있다. 그런데 그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듣지 못한다. 스스로 알아내려 한다.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단정짓고 정의내리려 한다. 음모론의 시작이다. 알지 못하기에 오히려 전혀 엉뚱한 사실을 스스로 상상하여 만들어 퍼뜨리는 것이다. 오히려 믿고 싶은 그러한 이야기들을 사실로써 더 믿어버리는 경우조차 있다.

프랑스대혁명 당시도 파리 시민들의 분노에 불을 당긴 것은 당시 프랑스의 왕비였던 마리 앙트와네트의 사치와 부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프랑스와 전쟁까지 치른 바 있던 오스트리아의 왕녀가, 더구나 프랑스의 현실은 갈수록 피폐해져만 가는데 높은 담장 너머에는 귀족들의 일반 프랑스 국민들은 알 수 없는 사치와 향락은 더욱 위화감만을 조성할 뿐이었다. 현실에 대한 분노와 외국인에 대한 증오, 무엇보다 그럼에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가 그것을 대신할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사실 마리 앙트와네트에 대한 소문 가운데 상당수는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퍼뜨린 루머에 불과했지만 프랑스 국민들에게 그런 것은 이미 아무 상관이 없었다.

역사상 민중봉기가 있을 때면 항상 그처럼 유언비어가 있어왔다. 대개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불만들, 그러함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불안과 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대한 정의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영웅은 더욱 영웅이 되고, 악은 더욱 악이 되며, 적은 더욱 적이 된다. 극단 속에 더욱 첨예하게 개개인의 욕망이 드러난다. 유언비어란 바로 그러한 집단 속에 숨은 개개인의 욕망의 발현인 것이다. 전쟁이나 재해상황에서 유언비어에 의해 개인들의 행동이 폭력으로 발전했을 때 약탈이 뒤따르는 것도 그래서다. 폭력과 약탈과 강간, 그렇게 아무리 단단한 사회라도 작은 외부의 충격에도 쉽게 균열이 일고 마는 것이다. 소수에 의해 한 가지 답만을 따르도록 강요되었을 때 다른 답은 곧 세계의 붕괴로 이어지고 마는 까닭이었다.

그대로였다. 정기준이 아무리 옳은 답만을 들려주려 해도 이신적과 심종수 역시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이들이다. 정기준이 사실을 감추려 하는 사이 그들은 스스로 나름의 답을 찾아낼 수도 있다. 정기준이 이유를 밝히지 않는데 그 답을 납득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더구나 세종으로부터 또다른 가능성에 대한 단서마저 듣게 되었다. 정기준에 대한 의심과 불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밀본의 본원이라는 권위에 눌려 있던 그들의 욕망이 각자 제자리를 찾아나서게 되는 것이다. 정기준이 모든 것을 공개하고 공유하며 함게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면 어떤 답이 되었든 모두가 하나가 되어 마지막까지 함께 노력했을 터이지만, 이미 의심과 불신으로 균열이 생기고 난 뒤이니 이제 그들은 하나라 할 수 없다. 세종의 말 한 마디에도 흔들리고 마는 취약한 관계로 돌아가고 만 것이었다. 밀본이란. 본원 정기준이란.

그래서였다. 봉건적인 전제왕조가 근대적인 국민국가로 거듭나게 되는 것은. 국민 개개인의 국가의 주체이며 책임을 나누어진다. 물론 그 정점에는 국왕이 있다. 국민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국민들이 국가에 대해 책임을 나누어지고, 그것을 국왕에 대한 충성으로 나타내야 하는 이유를 들려준다. 자발적인 복종과 자발적인 충성. 조선이 무려 600년이라는 긴 시간을 별다른 정치적 혼란 없이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였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비밀이란 없었다. 조선역사상 왕이 신하와 독대하여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것이 몇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공개되었고, 따라서 최소한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대부라면 조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백성들 가운데 읽고 쓸 줄 아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조선의 백성 전반에게로 확산된다. 다만 그 상태에서 멈춰버렸다는 점에서 역사에 대한 아쉬움이 있을 것이다.

세종이 신하들 앞에서 비밀리에 글자를 만들려 한 것을 사과한 것도 결국 그런 이유에서였다. 정치에 비밀이 있어서는 안된다. 언로를 열어야 한다는 것은 그러한 수많은 말들을 들을 수 있도록 정보 또한 공개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글자를 만들었다. 그 말은 글자를 만드는데 따른 모든 비판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여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옳았지만 절차상 문제가 있었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다. 사대부의 자발적 참여 없이 일방적 복종만으로는 조선이라는 체제는 유지되지 못한다. 사대부를 인정하기로 했다.

참으로 안쓰러운 것이다. 당랑거철의 상황일 것이다. 유사이래 다시 없을 세종조의 태평성대에, 그것도 왕이라고 하는 실질적인 힘 앞에 단지 사대부라는 명분만으로 맞서야 한다. 조말생(이재용분)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백정으로 살아가면서, 왕이라고 하는 명분 앞에 언제 역적이 되어 처벌받을 지 모른다는 위험마저 감수해가면서, 그런데 왕마저 너무 뛰어나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정도전의 조카로서 정도전의 유지를 이어받으려 하는데 왕이 감당하기에 너무 벅찬 상대다. 더구나 왕이 만든 한글은 왕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한 파천황의 것이다. 그것을 다른 사대부들에 알려야겠는가? 어쩌면 그는 책임감이 너무 강했을 것이다. 책임감이 너무 강한 것도 독이 된다. 책임을 독점하려다 권력을 독점하게 되고 다른 이들을 소외시킨다. 너무나 힘들고 외로운 싸움인 때문이다. 오로지 그만이 아는 싸움이다.

어쨌거나 절묘한 부저추신의 계책이었을 것이다. 밀본을 지탱하는 것은 다름아닌 밀본원들이다. 밀본원들이 있기에 밀본의 본원이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밀본원들을 결집시키고 있는 것이 '밀본지서'라고 하는 연판장이다. 자신이 밀본임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로 하여금 밀본에 더욱 충성할 수밖에 없도록 내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고 밀본원이라는 것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겠다 하고 있으니. 밀본원들이 밀본지서를 가진 밀본의 본원에 대해 충성을 바쳐야 할 이유 자체를 흔들어 버린다. 공포로 인해 묶여 있던 밀본의 힘이 공포가 사라지면서 바닥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결국 이신적은 태평관을 동원하고, 심종수는 스스로 무휼이 조선제일검이라 불리우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던 자신의 칼을 빼들어 윤평과 대립하고, 그 사이 정기준의 명을 받은 윤평과 심종수, 이신적의 청을 받아들인 태평관의 견적희가 세종의 명을 수행하는 궁녀들을 두고 일대 혼전을 벌인다. 예나 지금이나 윗것들의 싸움에 죽어나가는 것은 아랫것들이라. 가엾은 궁녀들만이 축구공마냥 이리저리 채이며 심지어 목숨의 위협까지 받는다. 그래서 이방지는 강채윤(장혁 분)더러 비겁하게 살라 했던 것일 테지만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훈민정음 해례는 결국 소이(신세경 분) 자신이었다. 하기는 한 번 본 것은 결코 잊지 않고, 언제든 필요할 때면 바로 꺼내 쓸 수 있는 편리한 기억력을 지니고 있다. 누구도 훈민정음 해례가 책이 아닌 사람일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니 의표를 찌르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책은 누군가 움직이기 전에는 혼자서 움직일 수 없지만 사람은 또한 혼자서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다. 도망칠 수 있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죽기도 쉽다.

최소한 소이가 죽을 일은 없어졌다. 소이가 죽으면 드라마는 끝나게 된다. 나는 지금 한자로 글을 써야 한다. 대결이 다시 눈앞에 다가왔다. 견적희와 심종수, 강채윤과 윤평, 그리고 강채윤과 카르패이. 막바지. 갈등이 더욱 첨예해지며 극은 더욱 혼미를 더해간다.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긴장이 강해지며 대미에 대한 기대도 더욱 커져만 간다.

아무튼 어쩔 수 없는 비밀결사의 숙명일 것이다. 대부분의 비밀결사가 그렇게 깨진다. 시작은 한 마음 한 뜻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서로 생각이 달라진다. 욕망이 충돌하게 된다. 관용은 그러한 욕망을 풀어놓아 무력화시키는 독약과 같은 것이다. 더구나 세종은 너무 강한 상대다. 밀본이 사대부를 등에 업고 있다면 세종은 조선을 등에 지고 있다. 세종이 곧 조선이다.

사대부를 위해 독재를 하려는 정기준과 왕의 독단을 관철하기 위해 사대부와 타협하려는 세종, 그릇의 차이라기보다는 처한 상황의 차이였을 것이다. 타협하려는 순간 존재 자체마저 사라져 버릴 수 있는 정기준에 비해 세종은 여전히 왕일 것이다. 재미있어진다. 더욱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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