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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2.14 09:33

천일의 약속 "어정쩡한 비극이 드라마에 한계를 그었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음에도 수애는 너무 예쁘다. 비극이 없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예전 잠시 요양시설에서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알츠하이머 환자를 처음 경험해 보았었다. 한 마디로 도저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힘든 경험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행동도 전혀 예측이 불가능하고, 매 순간순간이 사건과 사고의 연속이었다. 긴장을 놓을 수도 없었다. 아직 아이라면 힘으로라도 어떻게 해 보련만. 그런 점에서도 매우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쉬운 일은 커녕 단 몇 분만에 시설에서 일하시는 분들께 무한한 존경심마저 품게 되었다. 자기 가족이라도 쉽지 않은 일일 텐데, 그 분들은 매일같이 수많은 환자분들을 그렇게 대하며 지낸다. 비록 보수를 받고 하는 일이라지만 그런 시설에서 받는 보수가 어느 정도인가를 대략 안다. 아무리 많은 보수를 준다고 그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처음 드라마의 기획의도가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여자 이서연(수애 분)의 비극과 그를 곁에서 지켜주는 남자 박지형(김래원 분)의 지고지순한 사랑. 그래서 그 소란을 피우고 그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노향기(정유미 분)와의 결혼을 깨고 이서연과 결혼하려 한 것 아니겠는가 말이다. 이서연의 병이 깊어질수록 그녀의 곁을 지켜주는 남자 박지형의 진심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런 정도로 박지형의 진심을 드러내려 한다면 이서연이 망가져야 한다. 기억을 잃는 정도가 아니라 인격마저 잃어가야 한다. 원래 어제 쓰기로 한 글을 오늘 미뤄 쓰게 된 이유다. 예고편을 보았다. 인격까지 바뀐 듯 생일이라고 찾아온 옛직장동료들을 망신주는 모습을. 그런 장면이 필요했다. 혼자서 사고치고 다치고, 그리고 인격마저 바뀐 듯 주위를 당황하게 만들고 상처입히고. 그래야 그녀를 지키는 박지형의 존재가 드러난다. 박지형의 진심이 드러날 수 있다. 그런데 어떠한가?

아마 공중파 드라마라는 한계였을 것이다. 아직 젊은 수애라고 하는 배우에 대한 관리차원도 있었을 것이다. 박지형으로 하여금 절망케 해야 한다. 절망하여 좌절하고 번뇌케 해야 한다. 혼란스러워하고, 방황하고, 그러면서도 한결같이 이서연의 곁을 지킨다. 그런데 고작 혼자 있다가 다쳐서 피를 흘리는 것 정도로도 남자 박지형은 홀로 오열을 삼키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박지형을 절망케 하고, 그래서 다시 시청자로 하여금 박지형을 연민케 하고 그 진심에 감동하도록 하려면 어느 수위까지 보여주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그게 안 된다.

결국 드라마가 이서연, 아니 수애의 모노드라마가 되어 버린 이유였다. 수애가 더욱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몰려야 고모(오미연 분)든 사촌누의 장명희(문정희 분)나 사촌오빠 장재민(이상우 분)든 더욱 이서연의 상황에 개입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박지형의 부모인 박창주(임채무 분)나 강수정(김해숙 분) 역시 그러한 이서연과 박지형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깊은 많은 드라마가 만들어진다. 굳이 노향기의 오빠 노영수(송창의 분)를 등장시켜 곁가지씩이나 뻗을 필요 없이 이서연의 병 한 가지만으로도 얼마든지 깊고 풍부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드라마의 한 재미이기도 했던 노향기와 박창주 부모의 관계라는 곁가지는 결국 이서연과 알츠하이머라는 중심이 충실하지 못했기에 생겨난 부작용과 같은 것이었던 셈이다.

비극이 충분히 비극적이지 못하다. 알츠하이머라 하면 그 이름만으로도 등장인물들이 모두 비장해졌던 만큼 충분히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져야 하는데, 사실상 아직까지 이서연의 비극은 그런 지경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해피하다. 장명희와의 관계도 개선되고, 어머니와도 재회해서 어느 정도 화해하고, 박지형의 부모와도 앙금을 풀어가고 있다. 노향기의 가족들도 그녀를 용인해주려 한다. 그래서야 비극이겠는가? 그렇다면 그녀의 곁에서 비극을 지켜보고 감내해야 하는 박지형의 자리는 어디인가?

그러고 보면 이야기했을 것이다. 박지형의 캐릭터는 이서연의 비극에 달려있다고. 이서연이 더욱 비극적인 상황으로 내몰려야 박지형의 캐릭터가 살아난다. 이서연이 더 이상 독백조차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박지형이 그것을 대신할 수 있어야 한다. 임신을 계기로 더 이상 약물치료를 받지 않게 되었을 때 그것을 예상했었다. 임신한 채로 병이 악화되어 비로소 비극이 비극다워질 수 있기를. 절망과 좌절과 고통, 그런 가운데 시청자의 동정과 연민이 두 사람에게 집중된다. 이서연의 비극에 대해, 그런 비극을 묵묵히 지켜보는 박지형의 진정에 대해. 하지만 없었다. 그리고 그대로 박지형은 사라진 채 이서연의 모노드라마로 끝나고 말았다.

드라마가 더 이상 치고 올라가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드라마란 곧 드라마틱이다. 극적이라는 말은 비극적이라는 말과도 통한다. 비극이 강해질 때 그에 따른 동력도 더 강해진다. 더욱 비극이 심화되어가며, 혹은 그 비극을 반전시키려는 노력으로써. 그런데 그 비극이 충분히 강하지 못하게 된다면 결국 이야기 자체도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지형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고, 이서연의 병을 두고서도 주위에서는 농담이나 하며 일상을 보낼 수밖에 없다. 아마 지금쯤 이서연의 병에 대해서 과연 그것이 그렇게 비장할 일인가 의문을 갖는 사람도 얼마쯤 있을 것이다. 그렇게 지금의 이서연은 약간의 기억장애를 제외하고 상당히 멀쩡하다. 그리고 예쁘다.

물론 설마 김수현 쯤 되는 작가가 배우 한 두사람으로 인해 원래 계획했던 이야기를 바꾸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배우로서 보다 자신을 확실히 하려면 더욱 망가지는 연기를 통해 연기력을 내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역시 공중파인 때문이었을까? 작가의 미학은 아니었을까? 너무나도 교양있고 경우바른 강수정의 캐릭터처럼 드라마를 예쁘게 쓰고 싶은 욕심이 어느새 이야기를 이리 틀어버린 것은 아닐까? 아마 다음주쯤에는 본격적으로 이서연의 알츠하이머의 증세가 나타날 텐데, 그러나 그러기에는 이미 거의 끝무렵이다.

더 울었어야 했다. 공포로 울고, 절망으로 울고, 좌절로 울고, 분노로 울고, 원망으로 울고, 동정으로 연민으로 다시 울었어야 했다. 울부짖고 고함지르고 화를 내며 싸워야 했다. 비극이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너무 깔끔했다. 너무 예뻤다. 그나마 자신의 감정에 가장 솔직했음에도 역시 폼나던 오현아(이미숙 분)의 캐릭터처럼. 그것이 드라마의 한계를 결정지웠다. 더 깊이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포기했다.

김래원에게는 그래서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낸다. 김래원의 필모그래피에 그다지 도움이 되는 작품은 아닐 것 같다. 수애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수애에게도 결정적인 한 방은 없었다. 그냥 무난하게 예뻤다. 알츠하이머라는 소재가 쓰인 무난하게 예쁜 러브스토리였다고나 할까?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결말에 아쉬움은 그래서 더욱 크다. 더 좋은 작품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물론 필자에게 타인의 고통이나 불행을 즐기는 취미따위는 없다. 아무리 드라마라 해도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보는 편이다. 그러나 비극이 비극인 이유는 무엇인가? 어째서 사람들은 굳이 비극을 보고 아파하고 눈물흐리면서도 그것을 후련해하며 감동이라 부르는가? 바로 그 감동이 애매하다. 뜨겁지도 않고 시원하지도 않다. 감동도 그만큼 적다. 아쉬운 것이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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