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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2.02 07:49

뿌리깊은 나무 "이방지, 그런 것도 모르면서 어찌 백성으로 살려 하느냐?"

왕 세종과 밀본의 본원 정기준, 그들의 운명이 갈리게 된 이유...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차라리 그 순간 치사하고 비겁하게 살아! 백성은 말이다, 오로지 자신의 기쁨을 위해 자존심을 버려야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잃는다."

백성인 때문이다. 백성에게는 이름이 없다. 누구도 백성의 이름따위 기억하려 들지 않는다. 각자의 이름이 있어도 그래서 백성은 백성일 따름이다.

자존심이란 이름이다. 자기 이름. 자기 이름에 거는 것. 무사로서, 남자로서, 선비로서, 왕으로서, 그래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 우선해서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그래서 세종(한석규 분)도 말하지 않던가. 자신의 삶은 지옥이었노라고. 자신이 지옥을 살았기에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

"열두살때 정기준이 내게 물었다. 삼봉의 이상을 훔친 조선과 다른 조선이란 무엇인지! 아바마마 또한 내게 물으셨다. 나의 조선이란 어찌 다를 것인지, 어찌 다르게 할 것인지! 강채윤 또한 내게 물었다. 백성을 향한 임금의 대의란 무엇인지!

늘 시달려왔다. 단 하루도 그 고민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것을 찾았다. 그리고 이제 나는 당당히 말할 수 있어! 이것이 나의 답이다! 나의 조선이다!"

그래서 그를 위해 많은 학사들을 잃었다. 하마트면 아들마저 잃을 뻔했다. 하지만 아들을 잃을 뻔한 상황에서도 그는 결코 자신이 만든 글자를 포기하지 않았다. 처음 아버지 태종에게 맞서고자 결심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왕이었기 때문이었다. 왕이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어떤 것도 그것보다 우선하지는 않는다.

정기준(윤제문 분)은 어떨까? 그에게도 밀본이라는 대의가 있었다. 밀본을 세운 삼봉 정도전의 조카라고 하는 의무가 그에게는 주어져 있었다. 더구나 어린 시절 섣부른 정의감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일가족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니, 그에게는 그때부터 너무나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었던 것이었다. 죽은 이들의 몫까지 밀본을 지키고 밀본의 대의를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설사 스스로가 세운 원칙과 대의를 저버리는 것일지라도, 심지어 사대부로써 비천한 백정의 모습을 하게 되었더라도 말이다. 그러면 과연 그는 행복한가?

세종의 아버지 태종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까닭도 이복형제를 죽이고, 동복형제를 내쫓고, 아버지와는 칼을 겨누고, 왕이 되도록 자신을 도운 처남마저도 하나도 남김없이 도륙한 때문이었다. 친아들마저 세자의 자리에서 내쫓았다. 그래서 그는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이 아닌 태종은 과연 행복했겠는가?

이순신 역시 정작 나라는 구했지만, 그로 인해 어머니의 임종도 보지 못하고, 아들 면이 왜적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려 한 것이었지만 그로 인해 모함을 받고, 누명을 쓰고, 모진 고초를 겪고. 그러고도 충성을 다하겠다고 전장에 나가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생을 마치고 말았다. 일본군을 보면 바로 가족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고, 도망치지 못할 것이면 일본군에 부역하여 가족이나마 건사하고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어느 백성에 비해 이순신 장군의 삶은 행복했는가?

결정적으로 그렇게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이들은 그만한 힘을 갖춘 이들이었다. 출신이 그리했거나, 당시의 위치가 그러했거나, 가진 바 역량이 충분히 그에 부족함이 없었거나. 태종이 왕이 아니었고, 세종이 왕이 아니었고, 정기준이 본원이 아니었으며, 이순신이 수군절도사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태종의 능력이 부족하고, 세종의 실력이 그에 미치지 않으며, 정기준의 역량이 그에 한참 모자르다면 그것은 또 어땠을까? 하기는 이순신에게 처음부터 수군절도사로서의 재량이 부족했다면 그에게 그만한 중요한 책임도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여느 백성들처럼 가족과 더불어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안전한 곳에서 전란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세상에는 사람이 살지 못할 지옥이란 없는 것이다.

출신이 그만하지 못하고, 위치가 그러하지 못하고, 역량이 그에 미치지 못하고, 그런 경우 역사는 그를 어리석은 인물로 기억하거나, 아니면 난폭한 인물로 기록하게 된다. 바보 아니면 반역자다. 주제를 모르거나, 주제가 넘었거나. 정기준의 문제가 그것 아니던가? 그가 이루고자 하는 바는 거대하기만 한데, 그러나 그의 역량은 정도전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그의 밀본도, 그의 현재 지위도, 신분도, 어느것 하나 정도전은 물론 은근히 의식하고 있는 세종 이도에게 한참 미치지 못한다. 그가 어리석은 반역자로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차라리 정기준이 그다지 대잔하지 않은 인물이었다면 백정으로서의 삶에 만족하며 살 수도 있었을 테지만. 세종 역시 힘이 부족하여 사대부에게 밀려나게 되었을 때는 '충녕군'이라는 군호를 더하며 어리석고 난폭한 군주로써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백성이 과연 그러한가? 사실 사대부 역시 그렇게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박지원의 한문소설 <양반전>을 보면 당시 양반들이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했던 덕목들이 헤아릴 수 없이 이어진다. 백성들은 생업이 힘들어 그와 같은 덕목들을 지킬 수 없지만, 양반들은 그러한 덕목들을 지키느라 생업에 임할 수 없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양반이 자신의 종을 겁탈하여 사생아를 낳고... 양반사회에서 지탄을 듣는다. 어찌 양반으로써 품행이 바르지 못하고 체통을 지키지 못하느냐고. 설사 그런 일이 있더라도 그 뒷처리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사대부의 삶이었다.

먹는 것, 입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하여튼 그와 관련한 모든 것이 주위의 감시 아래 놓여 있었다. 아무리 집안이 훌륭해도 양반으로서의 그러한 자격을 지키지 못했다면 그는 야반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된다. 법적으로는 양반이더라도 양반사회에서는 그는 이미 양반이 아니다. 그런반면 3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한 이가 없어 법적으로 양반의 지위를 잃었어도 양반으로서의 자격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주위로부터 양반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양반으로서의 지위와 권리도 누릴 수 있다. 가족은 굶어죽어가는데 의관정제하고 앉아 공자왈맹자왈만 하더라는 것이 그저 생활력 없고 세상물정을 몰라 그리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라면 당장은 어떻게 먹고 살 길이 열릴 지 몰라도 그 자식들은 더 이상 양반이 아니게 된다. 신분사회에서 양반이 양반을 잃게 된다는 것은 매우 치명적인 것이다.

향반과 잔반이 그렇게 나뉜다. 향반은 그래도 양반으로서 품위와 체통을 지킬 수 있었던 이들을 말한다. 잔반은 그조차도 없이 하는 것이 일반 백성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들을 뜻한다. 향반은 양반이지만 잔반은 그저 흔적만 잔반이다. 백성은 당연히 잔반만도 못하다. 그들이 과연 뜻한 바가 있어 그것을 지키고자 했을 때 사회적 신분이며 지위, 자신의 역량, 무엇이 있어 그를 지키는가? 그렇게 해가면서까지 지켜야 할 것이 또한 무엇이 있겠는가? 강채윤의 환상에서 아버지와 담이 아버지가 나와 한 말이 그것을 의미한다.

"살다보면 살아지는 것이 삶이여."

이를테면 실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은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다. 사람으로부터 장난감취급을 받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렇다고 동물들이 그런 것이 신경이나 쓰고 있을까? 야생성이 강하다면 기회를 보아 도망치기도 하겠지만, 길고양이를 잡아 길들인 우리집 녀석 하나는 집을 네 번 나가서 네 번 다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그것이 억압이고 굴욕이었다면 고양이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까? 과연 존엄이란 또한 무엇인가?

반드시 왕이어야 하는가? 반드시 사대부여야 하는가? 반드시 본원이어야 하는가? 반드시 남자여야 하는가? 무사여야 하는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가? 왕도 아니고, 사대부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고, 무사도 아니고, 그러면 강채윤(장혁 분)은 더 이상 소이(신세경 분)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일까? 오히려 무사이고자 하고, 소이의 남자이고자 하기에 그는 자신의 목숨까지 내걸어야 한다. 세종의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던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죽거나 다치더라도 그는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조금만 비겁할 수 있다면. 조금만 더 무책임할 수 있다면. 후회야 하더라도 차라리 후회하며 사는 쪽이 훨씬 낫다. 어차피 삶이란 후회도 하고, 괴로워도 하면서, 그런 가운데 기쁨과 즐거움을 찾는 것이니까. 대신 더 이상 그는 남자가 아니겠지. 무사도 아닐 것이다. 세종은 왕이 아니고, 정기준은 본원이 아니다. 그러면 또 어떠한가? 하지만 세종이 왕인 이유나, 정기준이 본원인 이유는 그러라는 것이니까. 그러나 강채윤에게마저 그러한 의무나 의리가 있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이란 슬픈 존재라는 것은, 말했듯 아무리 남자이기를 포기하려 해도 소이와 함께 하는 동안에는 강채윤은 어쩔 수 없이 남자가 된다. 자식을 낳으면 부모가 되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으면 할아버지가 된다. 누군가의 친구이기도 하고, 상관이기도 하며, 부하이기도 하다. 인간은 그렇게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또다른 이름을 가지고 어쩔 수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이름없는 백성이라도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동안에는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소이와 함께 행복하려는 강채윤이 과연 소이의 남자이기를 포기하겠는가? 혹은 장차 태어날 아이들의 아버지이기를 포기하겠는가? 부끄러움을 선택하겠는가?

그것은 이방지(우현 분)의 지난 이야기이기도 했다. 무사이고자 했다. 남자이고자 했다. 정도전에게는 무사이기를 원했으며, 사랑하는 여인에게는 남자이기를 원했다. 그는 그 가운데 어떤 것도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 무사와 남자 둘 다 포기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방지는 강채윤을 말리려 하는 것이다. 결국 말릴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이 갖는 비극이다.

한 귀에 와서 꽂힌 이야기였다. 그것은 결국 강채윤이 이미 이전에 세종의 앞에서 절규하듯 토해내던 이야기들과 닮았다. 결말은 또한 강채윤이 세종을 위해 더 열성적으로 정기준을 쫓게 된 것과 관계가 있다. 인간이라는 것. 삶이라는 것. 그리고 이름이라고 하는 것.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기고, 그래서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다. 이름이 곧 그 사람을 정의한다. 이름없는 백성조차 그래서 백성이라는 이름을 남기고자 어떻게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같은 운명이다. 운명의 쌍동이다. 왕의 아들로 태어나 왕이 되어야 했던 세종과 밀본을 만든 정도전의 조카로 태어나 밀본의 본원이 되어야 했던 정기준, 다만 운명을 가른 것은 태종에 의해 더욱 탄탄해진 조선의 왕조에 비해 밀본은 그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더라는 현실일 것이다. 당장의 세종의 치세 아래 정기준의 밀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반역밖에 없다. 조말생(이재용 분)의 집요한 추적과 그에 따른 사대부의 배신, 결국 쫓기다 쫓기다 어쩔 수 없이 백정이 되어 반촌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던 정기준에게, 이미 왕으로써 모든 것을 누리고 행하고 있는 세종 이도란 버거운 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밀본이 아니고 이도가 아니라면 그가 본원이어야 하는 이유가 없다. 본원이 되어 쫓기고 숨어들고 이렇게 비천한 백정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없다. 더 절박하다.

세종이 관대한 이유다. 세종 역시 궁지에 몰렸을 때는 정기준 만큼이나 난폭해지고 있었다. 지금은 정기준이 궁지에 몰려 있다. 마치 과거 학생운동이 좋은 뜻에서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기득권과 싸워야 한다는 명제에 매몰되어 버린 나머지 정체성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한 것과 닮아 있다 할 수 있다. 절박함은 당위를 만들고, 당위는 절대적인 정의를 불러온다. 절대적인 정의는 사람을 경직시키고, 조직을 경직시킨다. 지금의 정기준은 단지 이제까지의 관성에 의해 세종과 조선왕실을 증오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괴물이었던 것이다. 만일 입장이 바뀌어 밀본이 조선왕실의 위에 있었다면 세종이 정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세종과 정기준이 처음 만났을 때 궁지에 몰린 세종이 정기준에게 폭력을 휘둘렀던 것처럼, 이제는 정기준이 궁지에 몰려 세종에게 주먹을 휘두르려 하고 있다.

이방지가 세종이 대화를 원한다 말했을 때 조금 더 들어주는 여유도 부릴 수 있었으련만, 그러나 정기준이 이미 강채윤에게 속은 사실을 알고 배신감에 치를 떨며 증오만을 내보이던 것은 그만큼 그에게 여유가 없던 탓이었다. 그렇게 이제까지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신을 지켜왔고, 흔적도 없이 와해되었던 밀본을 다시 살려냈다. 이미 그는 그렇게밖에 살 수 없다. 또한 시대의 희생양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가장 가련한 인물일 것이다.

아무튼 이번에는 너무 멀리 갔다는 느낌이었다. 마치 미리 답안을 보고서 이리저리 잘난 척 늘어놓으며 문제를 푸는 느낌이랄까? 이미 나온 결과를 토대로 다시 거슬러 마치 처음부터 예상했던 것처럼 떠들어댄다. 사이비예언자가 그러할 것이다. 아무리 장차 양반에 의한 신분질서가 고착화되고 그것이 썩어 짓무르기 시작한다 할지라도 그 대안으로서 한글을 배운 백성들이 그들을 대신하게 되리라는 믿음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들은 과연 한글로써 무엇을 읽고 무엇을 쓰며 성리학자들을 대신할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과연 한글은 백성들을 한자를 익힌 사대부보다 나은 대안세력으로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인가?

실제 정작 조선시대 한글이 있음으로 해서 가장 좋아진 것이 다름아닌 한자의 보급이 크게 확산되었다고 하는 점일 것이다. 어차피 모든 지식은 한자를 통해 생산되어지고 있었다. 모든 고급지식은 한자를 통해 쓰여지고 있었고, 따라서 백성이 더 나은 무엇을 배우고자 한다면 한자를 익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한글은 매우 훌륭한 수단이 되어 주었다. 아마 한글이 아니었다면 한자의 보급은 한참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동학농민전쟁 역시 바로 그러한 한자를 익힌 중인과 상민과 잔반들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잇었다는 것이다. 한글이 과연 조선사회에서 사대부를 대신할 대안세력을 성장시켰는가? 의심해 볼 부분일 것이다. 작가의 의도가 지나치게 강하게 들어간 이제까지의 유기적 흐름을 깨뜨리는 장면이었다. 그렇게까지 이야기할 것은 없었다.

세종대왕이 위대한 것은 안다. 한글이 위대한 문자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너무 넘어서면 사극이라고 하는 기본전제가 무너지게 된다. 세종은 시간여행을 하고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간 사람이 아니다. 전지적 작가시점도 좋지만 그렇더라도 너무 드라마에 이입하여 작가가 직접 개입하려 들면 조화가 흐트러지게 된다. 그림이 망가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단한 내공이었다. 이방지와 강채윤 사이에 오해는 없었다. 이방지와 무휼(조진웅 분)의 섣부른 충돌도 없었다. 강채윤과 무휼 사이의 갈등도 이내 해결되어지는 성격의 것이었다. 다만 그런데 어째서 밀본이 하는 오해는 그리 풀리지 않고 오래 이어지는 것일까?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가를 안다.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안다. 시원한 것이 후련할 정도로 깔끔하기까지 하다. 하긴 여기서 더 이상 복잡하게 꼴 것도 없다. 오해로 인한 것이지만 정기준과 세종이 마침내 정도전의 유적인 정륜암에서 만나게 되었다. 갈등의 해결도 역시 이처럼 시원시원하다. 강채윤은 정기준의 꼬리를 잡았다.

가끔 지나치게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는 것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내용이 충실한 잘 된 드라마라 할 수 있겠다. 드라마로서의 재미 또한 놓치지 않는다. 역시 액션 장면에서 자연스러움이 부족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무협액션 또한 사극의 한 재미일 것이므로. 서스펜스와 스릴러, 그리고 무협액션. 로맨스. 그것이 드라마일 것이다.

재미있었다. 하지만 역시 필자의 귀에 들리는 것은 왕인 세종이나 사대부인 정기준이 아닌, 이미 그들에 물들어 버린 강채윤도 소이도 아닌, 어느새 체념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방지의 말일 것이다. 강채윤은 젊고 이방지는 늙었다. 지혜란 비겁함을 부르기도 한다. 같은 이유로 또한 어느새 정기준에 이입하며 그를 동정하기도 한다. 불행한 시대의 불행한 지식인이다. 세종과 한글보다도 드라마로서 그것이 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린다.

왕의 길, 사대부의 길, 그리고 백성의 삶. 사실은 어느 하나도 소홀할 것이 없지만. 지금이라고 사대부란 의미가 없을까? 지식인의 존재라 하는 것은 과연. 의미가 깊다. 머리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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