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1.27 07:49

특수사건전담반TEN "자기 것이 아닌 것으로 꿈을 꾸며 인간을 벗어나다!"

가정부 안현수가 고용주 일가족을 끔찍하게 살해한 이유!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정된 공간, 정적인 배우들, 그리고 과장된 대사. 원래 추리물이라는 자체가 연극무대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좁은 공간을 벗어나 배우들이 달리기 시작하면 하드보일드가 되고 스릴러가 된다. 더구나 마지막 TEN의 팀장 여지훈(주상욱 분)과 범인 안현수(권남희 분)가 맞대결하는 장면은 그대로 연극의 한 장면을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는 부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과연 복지란 모든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어주는 것인가? 하지만 어차피 세상에는 부자가 있다면 가난뱅이도 있다. 누군가는 더 많이 가지고 있고, 누군가는 그만큼 덜 가지고 있다. 더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에 비해 덜 누리는 사람도 있다. 그들을 모두 똑같이 만들어주는 것은 가능한가?

아니 모두가 부자가 되더라도 마찬가지다. 말 그대로 그러한 부자 가운데서도 더 가지고 더 많이 누리는 부자가 있는가 하면, 그보다 덜 가지고 덜 누리는 부자가 있다. 전자는 후자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고, 후자는 전자에 대해 열등감을 갖는다. 아마 대한민국 사회에서 어지간히 가난한 사람이라 할 지라도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저개발국가에 사는 가난한 이들에 비해서는 한참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겠지만, 그러나 그렇더라도 가난하다는 사실 자체는 바뀔 수 없는 것이다.

어찌하겠는가? 당연한 것이다. 어차피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누군가는 가난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그러면 마땅히 가난한 채로도 그다지 큰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복지다.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사회적으로 아무리 지위가 낮은 사람이더라도, 그러나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보장받고 누릴 수 있다. 한 마디로 가난하게라도 살 수 있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도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가난하게라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살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그것이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라는 자체가 결국 부로써 계량되는 것이다. 개인의 능력과 성실함과 운이 결국 자본의 축적으로써 계량되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부를 이루었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있다는 것이고 누구보다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해 왔다는 뜻이 된다. 운까지 좋았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으로써 계량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추구해야 할 당연한 선이다. 그래서 그런 말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부자가 되는 사회!"

그것이 문제다. 모두가 부자가 된다. 모두가 부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당위다. 그런데 어딘가에는 부자가 되지 못하고 가난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가 부자가 되어야 하는데 오로지 이들만이 부자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들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아니 가난한 자신들은 그러한 현실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겠는가?

하필 가정부로써 자신이 일하는 집을 실제 자신의 집인 것처럼 착각하여 심지어 범죄까지 저지른 안현수에 대해, 그녀가 일하는 집의 고용주로 과거 '빨간바지 조복례'라 불리우던 복부인 출신이 설정되어 있는 이유였을 것이다. 악착같이 사람의 길을 버려가며 부를 쌓아 올린 조복례(이용녀 분)와 자신의 것이 아닌 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일가족을 살해한 안현수. 두 사람은 서로 다르지만 또한 서로 닮아 있다.

과연 조복례가 그토록 더러운 이름으로 불리워가며 부를 이루고자 억척을 부린 이유란 무엇이겠는가? 그런 시절이 있었다. 가난은 악이다. 부야 말로 모두가 당연히 이루어야 하는 선이다. 모두가 달려갔다. 모든 것을 팔아가며 부라고 하는 정상을 향해 미친 듯 내달리고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윤리도 양심도 그 과정에서 버려졌다. 조복례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그녀의 어린시절 역시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수백억의 재산을 긁어 모으고서도 그녀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유일하게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살기 위해 지은 자신의 집이었다. 어쩌면 그녀 또한 그 집을 가지기 위해 그토록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탐욕을 부렸으리라.

어떤 것은 자신의 것이었지만 어떤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폭력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토록 원망들이 쏟아지던 것이었다. 닮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자신의 집이 아니지만 그것을 자신의 집처럼 여기며, 실제 자신의 집처럼 살아가기 위해 일가족을 죽이고 그것을 빼앗으려 한 안현수와, 조직폭력배까지 동원해가며 다른 이를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 넣었던 조복례와.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할 정도로 그녀들의 집은 너무나도 크고 넓고 아름답고 포근했다. 그녀들의 낙원이었다. 그를 위해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버렸다.

아마 우리사회에 만연한 부자에 대한 증오도 여기에서 출발할 것이다. 부자를 증오하고 가난한 사람을 경멸한다. 내가 부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마땅히 내가 부자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안현수로 하여금 그처럼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저버리는 선택을 하도록 한 것은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에 대한 미련이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지금 그녀로 하여금 현실을 버티도록 만든 것이 그 시절의 유일한 기억이고 꿈이었다. 여전히 그것이 자기 것이었다면. 바람이 현실이 되고, 현실은 현재가 된다. 그리고 이루어지지 않은 현재는 박탈이 되고 상실이 된다. 안현수는 과거의 꿈을 꾸고 있지만 또다른 어떤 사람들은 단지 망상이 만들어낸 허상을 쫓고 있다는 차이랄까?

그런 범죄였다. 여지훈이 굳이 안현수의 칼을 맞아가며 그녀를 다독인 이유였다. 그 또한 어떠한 아픔을 가슴에 품고 있을 터이므로. 과거의 비극에 대한 미처 이루지 못한 아쉬움과 미련이 망상이 되어 그녀를 옭죄고 내몬다. 사람이어서 슬픈 범죄였던 것이다. 사람이 슬퍼서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서러운 범죄였던 것이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 안에 홀로 남은 조복례처럼. 한 집에 살면서도 가족이 아니었던 아들의 가족들은 안현수에게 가해질 법의 처벌과는 다른 조복례에게 주어진 징벌이었을 것이다. 아들은 말한다. 어머니로부터 단 한 가지만을 배웠다. 빼앗으면 배부르고, 빼앗기면 죽는다. 그녀가 이룬 것이다.

상당히 기괴하면서도 슬픈 사건이었다. 영상 자체가 그래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기괴한 것은 영상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인간 자신의 내면이다. 연극무대와도 같은 세트와 연출과 연기는 그것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철저히 모든 것을 배제한 채 배우의 의지만이 대사와 행동에 의해 여운처럼 남는다. 연극은 배우를 보는 것이다. 인간에 의한 것이다.

확실히 최근 케이블TV의 자체제작 드라마의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 공중파에서 찾아보기 힘든 추리물이라고 하는 장르와 그 장르적 재미를 극대화하기 위한 연극적인 연출은 과연 공중파와는 다른 케이블만의 장점을 십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이런 드라마를 우리나라 TV를 통해서, 우리나라 배우와 제작진에 의해 볼 수 있다는 점이 그저 행복할 뿐이다. 최고였다. 재미있었다.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