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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0.25 11:31

계백 "작가의 노골적인 선언, 역사를 버리고 드라마를 선택하다!"

대야성을 공략해 함락시킨 것은 다름아닌 윤충이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그래도 윤충의 이름이 한 구석에라도 나올 줄 알았다. 계백(이서진 분), 은상(김동희 분), 의직(최재호 분) 등 사료에 이름이 나오는 백제의 장수는 거의 등장한 듯한데, 유독 삼국사기에 대야성을 공략한 주역으로 기록되어 있는 윤충만 빠져 있다. 무슨 의도일까?

하여튼 흥미로운 드라마다. 어지간한 역사드라마라면 다른 부분에서는 얼마든지 역사를 왜곡하더라도, 이와 같이 기록이 분명한 큰 사건의 경우에는 최소한의 역사에 대한 체면은 세워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다못해 윤충의 이름을 여러 장수 가운데 등장시키고, 그가 역사에 대야성을 공략한 주역으로 남게 되는 이유를 보여준다. 그런데 없다.

대야성이 함락당하는 이유도 그렇다. 김품석의 죽음은 그렇게 비장하지도 멋지지도 않았다. 부하의 아내를 빼앗아 소실로 삼고, 그 결과 아내를 빼앗긴 검일을 필두로 대야성의 장수들이 김품석에 반감을 품고 윤충에 내응해 성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김품석은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말만 믿고 성을 나서다가 백제군의 복병에 사로잡히고, 윤충에 의해 자결을 강요당했다는 것이 역사에 기록된 내용이다. 그런 김품석이건만 포로가 된 상태에서도 감히 한 나라의 왕에게 약속을 지키라 당당히 꾸짖고 있다니. 김품석은 후손도 없이 죽었건만 어째서 이런 미화가 가능한 것일까?

그래서 바로 <계백>인 것이다. 의자왕(조재현 분)이기 때문이다. 의자왕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맞은 편에는 계백이 있었다. 그동안 신라의 포로들을 관용으로 대하여 백제의 백성으로 받아들였던 그 계백이 있다. 계백은 신의를 이야기하고, 의자왕은 처참한 살육을 이야기한다. 의자왕의 편협함과 옹졸함, 잔인함이 그 순간 계백과의 대립을 통해 대비되어 보여진다. 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한 백제의 마지막 왕이다. 그러자면 김품석을 살리고 죽이는 일은 단지 적의 포로를 잡아 자결을 강요하게 하는 수준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더구나 김춘추(이동규 분)가 김품석을 만나고 있었다. 설마 김춘추와 만나 심각한 이야기까지 나눈 김품석에게 부하의 아내를 빼앗고 상황이 불리하자 항복하려 성을 나서다가 사로잡히는 한심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것 아니던가.

목적에 충실한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 어떻고는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가다.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가 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 모든 것은 존재한다. 실제의 역사마저 그를 위해 얼마든지 왜곡되고 재구성될 수 있다. 대야성 공략에 참여한 장수의 이름 가운데 유독 윤충의 이름만이 보이지 않는 것도 그를 위한 선언일 것이다. 이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작가의 의도를 더 따르는 드라마다.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왜곡을 선언해 버리면 뭐라 할 말이 없어진다. 원래 그런 드라마다.

그래서 더 흥미로운 것인지도 모른다. 속고 속이고 삶과 죽음만이 존재하는 의자왕의 참혹한 전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가 없으면 참혹한 살육만이 남는다는 계백의 전쟁. 사실 계백의 그같은 생각은 일본이나 유럽의 경우 아주 최근까지도 상당히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봉건시대의 전쟁이다. 봉건귀족들 사이에 이루어진 고귀한 신분의 전쟁. 그런 전쟁에서는 신의가 필요하다. 지금 당장 전장에서는 적으로 마주하지만 같은 고귀한 신분이므로.

그러나 오로지 이쪽과 저쪽만이 존재하는 현실의 전장에서는 삶과 죽음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긴 자는 살고 진 자는 죽는다. 이긴 자의 치졸함이나 야비함은 현명함이나 절묘함으로 칭찬받는다. 진 자의 당담함이나 선량함은 송양공의 어리석음으로 조롱을 듣는다. 필요하다면 죽인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필요하다면 잔인하게 짓밟고 나아간다. 그래서 차라리 전쟁을 보다 일찍 끝낼 수 있다면 모두에게 좋지 않겠는가?

물론 드라마가 의도하는 바는 그것이 아닐 것이다. 의자왕이 얼마나 편협하고 신의가 없는 인물인가, 그리고 그가 또한 얼마나 잔인한 인물인가, 의자왕의 인물됨을 드러내기 위해 그와 같은 계백과의 대립을 집어넣은 것이다. 김품석을 살려가며. 전쟁에서도 신의를 고집하는 계백과 전쟁이기에 신의따위는 없다는 의자왕의 모습은 얼마나 확실하게 대비되는가. 그러나 역사에서도 윤충이 항복하면 살려주겠다 속여 김품석을 불러내어 자결을 강요했듯 실제로는 의자왕의 판단이 옳다. 신라군의 기세는 꺾을 수 없겠지만 김춘추의 사위이자 대야성의 성주를 죽인다는 것은 백제군의 사기에는 크게 도움이 된다.

아무튼 참 어려운 나라일 것이다. 왕이 유능한 신하를 경계하고 견제하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다. 진정 유능한 신하라면 그러한 왕의 경계와 견제를 미리 알아 방비한다. 자세를 낮추고 한 걸음 물러서서 일부러 공이 있더라도 그것을 양보하여 드러내지 않고. 때로 원하지 않는 부정도 저지르고 사치도 하고 해서 자신의 명성을 떨어뜨리는 것도 그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목석처럼 가만히 앉아 당하기만 하고. 아무리 그럴 의도를 가지고 그리 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런 식이라면 왕의 체면이 어찌 되겠는가? 이 나라에는 충신도 없다.

김춘추를 쫓아가 잡아오라 했다. 죽이지 않더라도 병사를 죽이고 도망친 김춘추를 쫓아가 다시 잡아오라 왕이 명령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춘추를 앞에 두고 자신의 의형 문근(김현성 분)을 본다. 차마 문근을 죽이지 못해 계속해서 김춘추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하기는 신라의 성 40여 개를 함락시킨 백제의 대장이 있는데 그것을 잡을 기회를 눈앞에 두고서도 그대로 놓아 보내는 김유신(박성웅 분)도 김유신일 것이다. 어째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병탄하기까지 그리 고생하고, 백제는 끝내 망할 수밖에 없었는가? 서로를 대표하는 장수라는 이들이 이렇게 사적인 감정에 휘둘려 대사를 보지 못한다. 그래도 김유신은 조금 더 낫다.

도대체가 목씨부인 은고(송지효 분)가 사택왕후와 닮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 말인가? 역시 말 뿐이다. 그래도 같은 말이더라도 대야성 공략을 묘사하느라 어설픈 전투장면을 내보내기보다 말 몇 마디로 끝내는 간략함은 좋았다. 되도 않는 전투장면으로 집중력을 흐트리느니 그럴만한 장면을 통해 말로라도 긴장을 높이는 쪽이 좋다. 그렇더라도 은고에 대한 묘사는 너무 날로 먹는 것이 있다. 그럴만한 무언가를 보여주고 그녀를 사택왕후라 해야 한다.

재미있는 드라마일 것이다. 이제는 오히려 즐기게 되어 버렸다. 작가 자신도 충분히 즐기고 있다. 그저 이름 하나 집어넣는 것인데도 굳이 대야성공략에서 윤충의 이름을 빼 버렸다. 알아달라. 이 드라마는 더 이상 역사드라마가 아니다. 역사와는 상관없이 진행되는 드라마다. 원래는 대야성이 함락당하고 고구려와 동맹을 맺기 위해 찾아갔을 때 쓰인 방법이었건만 당의 사신의 자격으로 백제를 방문해서 일을 꾸미다가 도망치는 수단으로 전락한 김유신과의 약속처럼 말이다. 김유신이 병사를 이끌고 김춘추를 맞이하는 것은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필요하니까. 작가의 대범함이 오히려 마음에 든다.

어디까지 가려는가? 대야성의 함락과 김춘추의 딸과 사위의 죽음은 장차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가 백제를 적대하여 멸망시키기 위해 전면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이유가 된다. 마침내 포로로 잡힌 의자왕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김춘추는 이후 분풀이를 하게 된다. 과연...

어쨌거나 무언가 복잡하게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그럭저럭 집중은 하며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이 딱 좋다. 계백에 대한 미련과 의자왕에 대한 복수, 무엇보다 권력에 대한 집착. 은고의 변화도 조금 더 세심하게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조금은 나아졌다. 기쁘다. 무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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