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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0.24 08:37

내사랑 내곁에 "대망의 엔딩, 고석빈의 파멸과 부활, 그리고 구원..."

아쉬움조차 남지 않도록 훌륭한 엔딩이었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도미솔(이소연 분)과 이소룡(이재윤 분)의 결혼식을 멀리서 바라보고 차를 몰고 돌아오는 도중 어머니 배정자(이휘향 분)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원망하듯 노려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고석빈(온주완 분)은 그것을 집어든다. 그리고 그 순간 앞에서 차가 달려온다.

아마 상징적인 장면 아니었을까? 그 순간에마저 고석빈을 구속하는 어머니 배정자와 그런 배정자를 원망하면서도 끝내 외면하지 못하는 고석빈, 그리고 그 순간 달려드는 반대차선의 차와 같이 그에게 밀어닥친 불행들. 만일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여전히 미련을 가지고 있는 도미솔과 자신의 아들인 봉영웅과 무엇보다 지금의 죄인의 신세가 되는 불행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석빈이 당한 불행한 사고는 막다른 궁지에 몰린 그를 위한 마지막 구원이었을 것이다. 사막의 불사조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 그 재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이어간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새로운 시작이다. 죽음이라고 하는 시련을 통해 이제까지의 모든 것들을 정화하고 새로운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아이로써.

그것은 배정자에게도 구원이었다. 배정자에게 고석빈은 그녀의 일부였다. 고석빈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살지 못했던 삶을 대신 살아가고 있던 것이었다. 고석빈의 성장은 따라서 그녀에게 있어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미지와의 만남을 의미했다. 그 혼란과 공포. 그저 고석빈만 있으면 되었는데. 아들 고석빈만 있으면 되었을 텐데. 고석빈이 잠시 여행을 다녀오마고 떠났을 때 넋을 잃은 듯 그를 찾아 헤매던 배정자의 모습은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그것이었다. 등에 포대기로 아이를 꽁꽁 감싸 업고 오로지 세상으로부터 지키려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고석빈의 손을 감싸쥐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과 어울린다.

고석빈 역시 마찬가지다. 더 이상 그는 고민할 일도 노력할 일도 없다. 책임을 지며 악업을 쌓을 일도 없다. 아이는 그저 부모의 사랑만 받으며 자라면 그만이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무리를 하며, 부모의 요구를 따르기 위해 애써 자기를 속여가며 발버둥치며, 그로 인해 그가 잃어야 했던 것이 그 얼마이던가. 그러나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에 그는 단지 엄마의 손을 잡고 만나고 싶은 영웅이와 만나 같이 놀며 일상을 보내면 된다. 아버지 고진택(김일우 분)도, 동생 고수빈도 제 자리를 찾고.

그러고 보면 드라마의 초반은 도미솔이 끌어가고 있었다.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임신을 하고 그것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그녀가 마주한 세상은 무척이나 차고 냉혹했었다. 누구도 그녀의 임신을 반기지 않았고, 누구도 임신한 그녀를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엄마 봉선아(김미숙 분)조차 그녀에게는 가혹했었다. 그같은 잔인한 현실과 마주서려는 어린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강인하고 아름다워 보였었다. 아마도 그러한 그녀가 장차 아이와 함께 세상과 맞서며 헤쳐나가는 모습을 드라마는 그리게 되리라.

하지만 정작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도미솔이 자기가 직접 한 일이란 그다지 없었다. 현실의 무게는 단지 한 명의 여성이 어떻게 바꾸기란 너무나 깊고 넓고 두껍고 단단했다. 그녀로서는 이소룡과의 사랑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것이었다. 영웅이 하나 지키는 것만으로도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주도한 것이 바로 배정자와 고석빈이었다.

사건을 일으키고, 사건을 키우고, 그를 통해 도미솔과 이소룡의 존재와 캐릭터를 드러내고,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된다. 과연 드라마 <내사랑 내곁에>에서 악역인 배정자와 고석빈이 없었다면 드라마는 이렇게까지 긴장을 유지하며 지금까지 올 수 있었을까? 매번 사건을 일으키며 도미솔과 이소룡을 곤란에 빠드리는 배정자와 고석빈의 역할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미혼모와 입양아에 대한 주제가 자연스럽게 도미솔과 이소룡이라고 하는 주인공들을 통해 시청자들에 전달된다. 하기는 배정자와 고석빈의 관계부터가 또 하나의 주제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긴다. 결국은 강정애(정혜선 분)가 딸 선아의 아이 이소룡을 고아원에 버리고, 정말자(사미자 분)가 도미솔로 하여금 영웅이를 고석빈에게 주고 몸만 오라 강요하는 것과 같은 것일 게다. 하나의 주체로 보지 않는다. 하나의 독립된 단위로 여기지 않는다. 엄마가 누구인가 하는 것보다 태어나는 아이가 있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일 터다. 누구의 아들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어떤 인간인가가 중요할 것이다. 그러한 집착이 고석빈의 비극을 만들었다. 이소룡의 비극을 만들었다. 이소룡의 어머니 최은희(김미경 분) 또한 그같은 함정에 빠져 또 하나의 비극을 만들 뻔했었다.

아이를 독립적인 단위로서, 그러니까 이 사회가 보호해야 할 또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아이를 낳은 엄마는 그 부모일 것이다. 누구의 아이이고, 어떤 아이이고, 그 아이를 임신한 이는 또 어떻고. 물론 미혼모나 미혼모의 아이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완전히 사라지기란 힘들겠지만 그러나 한 방법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다 자랐으니 그 뜻에 따라 다시 할머니에게로 돌아가 함께 살고자 한다면 그리 하도록 하자는 이소룡의 아버지 이만수(김명국 분)의 말처럼. 함께 살지 않는다고 부모자식이 아닌 것은 아니다. 피를 나누지 않았어도 도리어 강정애가 그들의 또 한 사람의 부모가 된다.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었을까? 도미솔이 방송국에 복귀해 미혼모와 관련한 방송을 만드는 것은 그냥 판타지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인간을 하나의 독립된 단위로써 여기는 것. 도미솔은 도미솔, 봉영웅은 봉영웅이다. 단지 그들의 사이에는 고등학교 때 임신했다는 한 가지밖에 없다. 그래도 도미솔은 도미솔, 봉영웅은 봉영웅이다. 이소룡은 이소룡이고 그가 어머니라 부르는 것은 길러준 최은희와 낳아준 선아 두 사람이다. 할머니 역시 길러준 정말자와 낳아준 강정애가 있다. 모순되는가? 아이는 자라서도 여전히 아이인 채로 남을 수밖에 없는 고석빈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조금 더 도미솔이 당당했으면 좋았을 것을. 혼자서 아이를 기르면서도, 세상의 편견과 차별과 맞서 싸우며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선다. 하지만 현실은 판타지가 아니다. 도미솔에게도 구원은 이소룡이라고 하는 배우자가 자신과 아들 봉영웅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주는 것. 여자 혼자서 아이를 기르며 세상과 싸워나가기엔 힘든 것이 너무 많다.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그러나 어차피 작품은 작가가 쓰는 것이지 시청자의 기대가 쓰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작품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지 일방적인 기대를 가지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완성도가 높았다. 내내 긴장을 늦추지 않고, 드라마적인 재미도 놓치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경꼐를 지키며 주제 역시 굳게 붙들고 있었다. 상업드라마였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재미있자고 즐기며 보는, 더구나 주말드라마였다. 아쉬움은 있지만 드라마로서의 완성도는 단연 최고였다. 마음껏 욕하고, 마음껏 미워하며, 마음껏 동정하며, 그렇게 50회라는 분량을 지나 올 수 있었다. 작가의 힘이며 연출의 힘이고 배우의 힘일 것이다.

도미솔은 마침내 외할머니를 찾은 이소룡과 행복한 결혼을 하고, 봉선아는 도미솔과 이소룡의 배려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고진국과 재회한다. 마치 천벌을 받은 듯 사고로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고석빈에게 그것은 과연 배드엔딩이었을까?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고석빈을 위해 그보다 하루를 더 살고자 한다는 배정자의 말은 뿌듯함일 것이다. 아들이 다시 자기 손 안으로 들어왔다. 행복한 이주리(이의정 분)와 봉우동(문천식 분), 역시 행복한 정말자와 강정애와 김명국과 최은희. 웃는 사람들. 웃는 봉영웅. 흐뭇한 가운데 즐거운 기억을 남긴다.

재미있었다. 다른 말이 필요할까? 재미있자고 만드는 드라마일 것이다. 재미있으라고 모두는 그렇게 노력을 기울이며 드라마를 만드는 것일 터다. 드라마를 보아 재미있었다. 아쉬울 것이다. 그러나 아쉬움조차 없이 훌륭한 마무리였다. 완벽을 말한다. 좋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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