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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9.21 09:24

계백 "데우스 엑스 마키나, 약의 힘으로 드디어 사택왕후를 몰아내다!"

어째서 무왕은 그 순간 나흘이나 가사상태로 빠뜨리는 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무협이나 판타지 등의 장르가 그토록 상당한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문학으로써 그 작품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이런 것이다. 논리적 구조에 의지하기보다는 단지 기이한 힘이나 특별한 어떤 것에 의지해 해결하려는 안이함 때문이다.

때마침 위제단이 나타나 암살을 시도하고, 겨우 죽기 직전에 역시나 때를 맞춰 계백(이서진 분)이 나타나 죽을 위기에서 무왕(최종환 분)을 구해낸다. 위제단주 귀운(안길강 분)까지 어렵사리 죽이고 난 뒤 무왕은 자신의 부상을 사택왕후(오연수 분)를 제거할 기회로 여기게 된다. 어떤 이유에서 가지고 다닌 것인지는 모르지만 무려 나흘 동안이나 가사상태에 빠뜨려주는 마취산이라는 약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무왕은 죽음을 위장하여 사택왕후를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역시 허무한 것이다. 그러면 지난 17회 성충(전노민 분)과 흥수(김유석 분)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계백과 의자(조재현 분), 은고(송지효 분)가 꾸민 계략으로 인해 오히려 사택왕후를 자극하여 하마트면 무왕의 목숨이 위태로울 뻔했다. 만의 하나라도 무왕이 거기에서 위제단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면 의자가 출가해 있는 상황에서, 더구나 실권마저 사택왕후에게 있는 현실에서 과연 의자와 계백 등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 있었을까? 교기(진태현 분)가 왕이 되어 그들은 더욱 궁지로 내몰리고 말았을 것이었다.

도대체 어이가 없었다. 정작 드라마를 보고 있던 필자 자신도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토록 조심스럽게 준비해 거사를 일으킨 연문진을 한 순간에 무력화시켜버린 것이 사택왕후의 힘이었다. 무왕조차 그 힘을 두려워하여 정작 기회가 바로 앞에 있었음에도 매번 한 발 물러서 양보하고 있었던 것 아니던가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교기의 잘못이 드러났다고 무왕이 하자는대로 사택왕후가 고스란히 당하고 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사택왕후는 쥐가 아니라 오히려 고양이를 잡아먹는 호랑이였다. 그런데 그런 대비조차 없이 일을 벌이고 있었던가?

결국 그래서 그러한 미처 예기치 않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마침내 해결해 준 것이, 성충과 흥수의 지혜도 아니고, 계백의 무위도 아닌, 무왕의 기지조차도 아닌, 어째서 가지고 다니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나흘이나 가사상태로 만들어주는 기약의 힘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 기계로 만든 신이 내려와서 적당히 얽히고 꼬인 이야기들을 풀어주고 다시 올라가 버린다. 이제까지의 논리적 개연성은 깡그리 무시한 채. 아리스토텔레스의 반응을 보고 싶다.

물론 그것도 재미있기는 하다. 그런 종류의 이야기라면. 무협소설에서라면 그런 종류의 기약을 하나 정도는 상비해 두고 사는 것이 무림의 기인들이다. 마법사가 그런 엉뚱한 약을 가지고 있다고 해봐야 또 마법사다운 호기심이 만들어낸 엉뚱한 결과물이라 여기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겉으로 표방하기로 역사드라마다. 장르물이라면 장르물만의 내전 구조와 논리로써 아무런 설명 없이도 납득되어지는 거이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지 않은가. 무왕이 약을 모으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무왕의 측근 가운데 그런 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천단향이 그 약을 미리 전해주었다 하면 그건 설득력이 있겠다.

정말 뭐한다고 17회를 그리 긴장해 보았는가 허무해지는 장면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기 까지 성충과 흥수가 꾸민 계략이 역할을 하기는 했었다. 사택왕후가 마침내 무왕을 죽이기 위해 일을 꾸미게 되었고, 병사들을 상여꾼으로 위장하여 들어갈 수 있도록 한 것도 교기와 이미 만들어 둔 인연 때문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을 결정적으로 해결한 주체는 누구였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늘에서 떨어진 신처럼 약 하나가 이야기를 바꾼다.

얼마나 서둘러 드라마를 써야 했으면. 아직 다음주 방영분 대본도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대로다. 무왕이 죽었다고 했을 때 그 말이 계속 바뀐다. 처음에는 승하라 했다. 승하는 왕의 죽음에 붙이는 말이다. 그리고 조금 있으니 수정을 했는니 붕어라 말한다. 정확히는 훙이다. 황제가 죽었을 때 부르는 말이다. 고작 한 회 방영분에서조차 용어가 통일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일관된 논리적 구조를 기대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또한 항상 감탄하는 묘한 디테일적인 부분이 있으니, 어느새 사택왕후를 몰아내는 것을 두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이라며 의욕을 불태우는 계백이다. 원래 무지렁이들이 위정자들에 당하는 방식이다. 러시아 혁명 당시에도 수많은 러시아의 인민들이 볼셰비키의 혁명에 대한 약속을 믿고 그들의 편에 서서 다른 정파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물론 그 결과는 바로 그 혁명을 명분으로 더욱 가혹하게 그들을 착취하던 볼셰비키 일당독재였다.

잘 살게 해주마. 이야말로 모두를 위한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허튼 희망은 그야말로 허튼 희망으로 끝나는 법이다. 도대체 의왕이 그 새로운 세상을 위해 무슨 약속을 해 주었던가? 그를 위한 어떤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었던가? 사택왕후를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것, 그리하여 교기 대신 의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 그 어디에 그들이 말하는 새로운 세상이 있는가. 내내 궁금했다. 도대체 뭘 보고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하는가.

그러나 생각해 보면 계백이야 말로 그러한 무지렁이 민중의 대표라 할 수 있을 테니까. 제대로 교육을 받기를 했나. 오랜 생구생활로 사회생활에 대한 상식조차 부족하다. 하물며 권력의 냉엄함을 알까? 그저 칼 잘 휘두르고, 머리 좀 잘 쓰는 것. 그러나 싸움을 잘한다는 것과 정치를 잘한다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많은 뛰어난 지휘관들이 오히려 정치를 시작하면서 몰락하여 사라져간 것을 역사는 증명해주고 있다. 속아넘어가기 딱 좋다. <공주의 남자>에서 한명회가 말한 대로 책이나 읽던 선비들이 그런 냉혹한 이면을 알 리도 없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사택왕후의 의미심장한 예언처럼 은고는 그들과 입장이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것을 알면서도 단지 묵인한 채 이용하고 있었다. 이 또한 반전이 될 수 있을까?

그래도 마지막 싸움에서 패하고 물러나는 사택왕후의 모습은 멋있었다. 교기가 결국 일본으로 건너가 의자의 암살위협에 쫓기며 살았으니 사택왕후 역시 일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사택지적이 다시 백제로 돌아와 출가하여 사택지적비를 세웠을 것이고. 고증에 신경쓰느라 일본과 중국의 복식을 상당히 차용한 의상들이 항상 멋있었다.

차라리 화끈하게 무협으로 밀고 나갔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귀운과 무왕, 계백의 싸움은 너무 지저분했다. 살기라고는 없이 그저 허우적거리는 칼춤에 불과했다. 한계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고. 그래도 일단 사택왕후가 물러났으니 다음주는 어떤 변화가 있으리라. 좋은 변화이든 아니면 안 좋은 변화이든. 좋은 변화이기를 바라지만.

조금은 더 여유를 가지고 전체적인 플롯이라든가 시퀀스에도 신경을 쓰며 이야기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장면장면에만 집착하지 말고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논리적 개연성 아래에서 납득할 수 있는 일관된 이야기를 써 가는 것이다. 기본 가운데 기본일 터인데도. 어쩔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아쉽다. 뭐라 하기에도 한계가 너무 명확하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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