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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9.16 07:43

공주의 남자 "이 드라마에 중독되고 마는 이유..."

선택해도 선택하지 않아도 결국에 맞이하고 마는 운명이란...

 

드라마란 비극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비극인 때문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다. 자기만의 슬픔을. 두려움을. 그래서 사람은 웃음에는 쉽게 동화되지 않더라도 비극에는 쉽게 동화된다. 사람이 친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서로의 아픔을 나누며 슬픔을 함께 하는 것이다. 동병상련이라지 않던가.

그래서 비극을 보며 사람들은 그 안에서 자신의 비극을 찾는다. 비극 속에서 자신의 두려움을 보게 된다. 그래서 기대한다. 더 큰 슬픔과 두려움, 혹은 그것을 극복하는 희열. 전자가 비극이고, 후자가 희극이다. 코미디라는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비극에 근거한 것들이 많다. 사람들은 웃지만 희극인 자신은 울고 있다. 어느새 이입하여 다음을 기대하고 만다. 간절함과 미련이다.

어찌할 것인가? 아버지를 구하려면 사랑하는 이를 잃어야 한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이를 구하자니 아버지가 죽게 되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후회가 남기는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죽게 되면 사랑하는 이를 원망하게 될 것이고, 사랑하는 이를 잃으면 아버지를 원망할 것이다. 아니 그 전에 그러도록 내버려둔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누구나 그같은 경계에 선다. 중립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선택을 미루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두 남자는 서로를 죽이기 위해 한 걸음씩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누군가는 죽게 될 것이다. 누구인가? 나와는 상관없이 운명처럼.

아마 오필리어의 비극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햄릿에 의해 아버지 폴로니우스가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녀는 미쳐버리고 만다. 미쳐버린 나머지 호수에 빠져 죽고 만다. 그나마 그녀에게는 아버지 폴로니우스를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아예 그녀에게는 선택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햄릿은 그녀를 저버렸고, 폴로니우스가 죽은 것은 우연이었다. 그러나 세령(문채원 분)은 바로 그 순간 선택을 해야 한다. 아버지인 세조(김영철 분)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김승유(박시후 분)인가? 어느 쪽이든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미쳐 버리고 말리라.

로미오와 줄리엣 또한 단지 집안이 대대로 사이가 안 좋았을 뿐이었다. 로미오가 마침내 결투 끝에 줄리엣의 사촌인 티볼트를 죽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줄리엣과 티볼트 사이에 그렇게 깊은 정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로미오를 선택한다고 부모가 죽는 것도 아니고, 형제가 죽임을 당하는 것도 아니다. 가문이 멸망하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가문을 선택한다고 해서 로미오가 죽게 되지도 않는다. 비극이라지만 줄리엣의 선택이란 단지 부모가 정해준 남편이 아닌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이를 따라가는 것 뿐이었다. 한 점 의심없이 올곧고 바르다. 처음 김승유에게 납치되었을 당시의 세령이 그랬다. 단지 김승유를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사랑하는 남편 호동왕자를 위해 자명고를 찢어야 했던 낙랑공주의 비극도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한 행동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와 형제, 가족, 그리고 그녀의 나라에 대한 배신행위였다. 다행히 자명고가 찢어진 것을 안 아버지 최리는 딸 낙랑공주를 죽이고 고구려에 항복하여 더 큰 불행은 막게 된다. 차라리 세령 자신이 죽을 수만 있다면. 세령 자신이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말처럼 세령 한 사람이 죽어 두 사람의 피비린내나는 악연을 멈출 수만 있다면.

어째서 로미오인가를 묻던 줄리엣의 탄식처럼 그것은 세령에게 있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운명이란 패배자의 도피처라 하지만 그녀에게 운명이라는 말 밖에 눈 앞에 놓인 비극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없다. 그녀가 어쩌기도 전에 이미 세조는 김승유의 아버지 김종서를 죽였다. 김종서 뿐만이 아니라 그 일가족과 세조에 반대하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있었다. 어린 왕마저 세조에 의해 내쫓겼으니 오랜 동무이기도 했던 경혜공주(홍수현 분)의 절망과 분노는 어찌할 것인가. 이제 와서 우정을 내세우고 사랑을 내세워 본 들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차라리 모든 것을 잊고 함께 떠나자 하지만 그 말이 얼마나 공허한 말인가를 세령 자신이 알고 있다. 그리 아파하면서도. 그리 상처입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복수란 생각처럼 그렇게 통쾌한 것만은 아니다. 사람 하나 죽이기도 그리 어렵던 사람이 수없이 많은 사람을 아무 거리낌없이 죽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안에는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이 고여 있겠는가. 그조차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마비되었을 때는 그 상처란 더욱 돌이킬 수 없이 깊어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복수를 멈출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살아있는 자의 의무인 때문이다. 죽지 못한 자의 죽은 자에 대한 빚이다. 억울하게 죽은 이가 있는 살아 있는 이는 그 죽음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김승유도 세령을 조용히 밀어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미칠 것 같던 광기도 형수와 아강이를 통해 세령을 용서할 수 있게 되면서 비로소 김승유도 세령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아버지의 죽음에 분노하듯 세령 또한 아버지의 죽음에 분노하리라. 자신이 아버지의 일로 세령을 원망하듯 세령 또한 자신을 원망하리라. 둘은 어차피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사이였다. 결코 돌아보지도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잔인한 진실이었다. 그는 그것을 비로소 알았고, 그리고 세령 역시 그것을 알았기에 마지막 말에서 한 순간 무너지고 말았다.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같이 살아요."

그렇게 당당하게 반가의 규수로써 격식과 예의를 갖추며 말하던 세령이 이 순간만큼은 그저 사랑하는 이와 행복하고 싶은 본래의 어린 소녀로 돌아와 있다. 응석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가리고 있던 마지막 허위를 모두 벗어던져 버리고 알몸으로 김승유에게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끝내 받아주지 못하는 김승유의 가슴은 또한 얼마나 찢어질까?

김승유 역시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찌 그런 마음이 없을까? 그래서 더욱 방황했던 것이었다. 더욱 모질게 세령을 대했던 것이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모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는다면 모든 것을 놓고 편해지고 싶을 것이다. 아버지의 한이고 복수고 모두 놓아 버리고 세령과 함께 평안한 삶을 살려 할 것이다. 당연한 사람의 본능이고 욕구일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그는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다짐을 되새긴다. 자신 또한 그리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함에도 아버지의 한이, 그리고 복수가, 더해 대의가. 뒤에서 안은 세령의 손을 떼어 놓을 때 그의 손은 세령의 손을 굳게 움켜쥐고 있었다.

"어디로 가든 수양의 세상이오."

운명이란 단지 잊는다고 잊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도망치려 한다고 도망쳐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싸우지 않을 것이면 굴복할 뿐이다. 이대로 굴복한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김종서가 죽은 것도, 김승유 자신이 살아남은 것도. 그래서 김승유는 더욱 모질게 마음을 다잡아 먹고, 어찌할 수 없이 세령의 고민은 깊어진다. 아마도 마지막 순간까지... 하긴 드라마는 그다지 모질지 않아 그녀의 아버지 세조도, 또한 사랑하는 연인 김승유도 어느 한 쪽도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다만 사육신과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이민우 분)만이 사전에 모의가 발각되어 끌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잔인한 운명이 세령에게 남겨준 작은 온정이었을 것이다. 아직은 고민해도 좋다.

언제까지 가능할까? 김승유는 아버지 세조를 죽이려 하는데. 아버지 세조가 안다면 김승유를 죽이려 할 텐데. 누군가 한 사람이 살아나려면 다른 한 사람은 죽어야 하는데. 어느 한 쪽이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빌어먹을 운명일 텐데. 그런 순간에도 벌써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어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차라리 부러울 뿐.

그래서 미치도록 재미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그리 가여워서. 두 사람 앞에 놓인 운명이 그리 안쓰러워서. 아마 가련하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위해 있는 말일 것이다. 조금의 악의도 없이. 누구를 해치고자 하는 뜻도 없이. 단지 행복하려 했을 뿐인데. 행복하고자 했을 뿐인데. 행복한 꿈을 꾸고자 했을 뿐이었는데. 마음은 서로를 향하고 있어도 운명은 두 사람을 허락하지 않는다.

복수인가? 사랑인가? 아버지인가? 아니면 연인인가? 대의인가? 그렇지 않으면 인정을 따를 것인가? 어느 쪽을 선택해도 후회가 남고, 어느 쪽을 선택하지 않아도 미련은 남게 된다.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먹먹함. 그럼에도 선택해야 하고, 그래서 후회와 미련이 남게 된다. 그 후회와 미련이 시청자의 가슴을 부여잡는다. 어찌할 것인가? 너무나 가련해서. 너무나 안타까워서. 저 한 쌍의 아름답지만 불우한 연인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운명을 헤쳐갈 것인가. 혹은 마음 한 구석 어딘가 두고 온 후회와 미련을 위해서. 누구나 있지 않을까? 선택하지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없을 때 그로 인한 안타까움과 아련함을. 세상은 어쩌면 그리 슬픈 것일까? 선택하든 선택하지 않든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그렇게 흘러가고 만다.

또 다른 선택해야 했던 청춘 신면의 행보가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위선에서 완전히 위악으로 넘어가 버린 탓이다. 대신 그는 단지 김승유만을 원망하기로 한다. 김승유만을 증오하기로 한다. 친구 정종에 대한 미안함도, 스승 이개(엄효섭 분)에 대한 죄스러움도, 세령에 대한 안타까움도. 어차피 하나 남은 친구 정종과 스승 이개는 죽을 것이고, 세령은 그로 인해 더욱 자신을 멀리 할 것이다. 모두 자신이 한 선택의 결과였다. 하지만 이대로는 억울하지 않은가. 책임을 떠넘긴다. 원망과 탓을 그에게로 돌린다. 죽을 것이 뻔히 예상되는 친구와 스승 앞에서 오로지 김승유만을 찾으며. 그의 양심을 그곳에 맡겨진다.

비로소 악이 되었다. 비로소 신면은 악으로써 김승유와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까지 고민하며 방황하던 것은 어디론가 사라진 채 순수한 악이 되어 살기를 머금고 김승유를 상대하게 되리라. 비극에 대한 예고였을까? 아니면 혹시 다른 반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김승유에 대한 원망이 애써 묻어두었던 죄의식이 일깨워진 때문이었는지. 그러나 김승유가 복면을 벗고 신면과 마주했을 때 두 사람은 먼 길을 돌아 서로의 운명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이 또한 비극이리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선택해야 했던 시대의 비극. 가장 원초적인 비극이다.

실재했던 역사의 시간 속에. 실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과 같은 공간 속에. 이미 대부분 알고 있기에. 어떻게 해서 그것이 그리 되었는가. 장차 그것이 어찌 될 것인가. 다가올 운명을 알지 못한 채 더욱 간절하고 절박한 사람들의 모습이란 어쩌면 이리 가련한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마는 사람들과, 그 뒤안에 사라져가는 이들,

필자가 <공주의 남자>와 같은 유형의 서사멜로를 무척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역사책은 거대한 흐름을 이야기하지만, 그 흐름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개인은 무수히 많다. 계유정난은 특히 한국 대중에게 익숙한 소재이기도 하다. 수양대군과 한명회와 단종과 사육신의 비극. 벌써 6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비극일 것이다. 그 비극 속에 그 만큼이나 비극을 안고 살아가야 했던 작은 개인들이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그런 비극이 아니겠는가.

성삼문 등의 거사계획을 미리 알아차리고 철저히 제압한 뒤 단종을 돌아보는 세조의 표정은 악 그 자체였다. 사람이 이렇게도 악해 보일 수 있구나. 다정하게 웃는 모습 가운데 섬뜩한 살기마저 느껴진다. 어째서 그가 김영철인가? 역사에서와는 달리 광연정에서의 연회가 시작되기 전 현장의 분위기에서 한명회가 낌새를 눈치채고 바로 진입에 나서고 있다는 점도 극적 긴박감을 높이는 정치였다. 역사에서는 없었던 김승유가 이끄는 병사의 난입과 신면과의 칼부림 역시. 실제 역사에서는 조금 더 심심하게 끝났는데, 확실히 드라마를 쓸 줄 아는 작가며 제작진이다. 아련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살벌한 활극이 시청자에게도 긴장감을 준다.

마침내 마음을 허락했음에도. 겨우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정종과 경혜공주는 서로를 향해 자신의 마음을 연다. 항상 그렇다. 서로 엇갈리다가 겨우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그때는 어째서 안 하던 짓을 하게 되면 불길하다는 말이 나오는가를 깨닫게 된다. 어째서 사람은 항상 가장 절박한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의 솔직한 짐심을 알게 되는 것일까.

참 슬픈 이야기다. 화면이 아름답기에 더 슬프다. 아강이는 저리 귀여운데. 아강이와 놀아주는 조석주 역시 저리 살가운데. 많은 이들이 어제와 같은 오늘을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누군가는 비극을 안고 비장함을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김승유의 비극이었다면 이번에는 세령의 비극이리라. 김승유의 비극이 정리되었을 때 세령 또한 자신의 앞에 놓은 비극을 비로소 체감하게 된다. 자신이 그리 당당하게 외쳤던 정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이 옳다 여기는 그것을 위해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지. 그렇다고 다른 한 쪽을 선택하기에는 그 또한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한다. 너무 버거운 짐이다. 아직 어린 아가씨에게는.

차라리 무겁던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사육신의 비극을 한 순간에 몰아치듯 정리해 보여줌으로써 더욱 세령과 김승유 앞에 놓인 비극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신면과. 드라마란 이렇게 만드는 것이다. 새삼 깨닫게 된다. 이것이 드라마다. 비로소 숨을 내쉰다. 가히 살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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