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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4.07.13 10:07

[김윤석의 방톡] 불후의 명곡2 "여름과 캠퍼스, 순수와 열정을 노래하다"

딕펑스, 여름과 바닷가를 들려주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확실히 이같은 무대들을 볼 때마다 '불후의 명곡2'란 음악프로그램이 아닌 경연프로그램임을 실감하고 만다. 굳이 '불놀이야'일 필요가 있었겠는가. '바람이려오'가 아니어도 좋았을 것이다. 물론 굳이 원곡에만 충실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최소한 자기만의 새로운 해석이나 의도가 읽혀야 한다. 그보다는 느껴져야 한다. 필자가 부족한 때문일 것이다.

부제는 '여름특집 2부 캠퍼스음악'인데 깍두기가 하나 끼어 있었다. 선곡된 다른 노래들은 모두 캠퍼스에서 만들어지고 불려진 캠퍼스음악이 맞다. 그러나 마지막 딕펑스가 연주한 '해변으로 가요'는 캠퍼스와는 전혀 상관없는 미8군무대에서 결성되어 활동했던 최초의 록밴드 키보이스가 불렀던 노래였다. 작사작곡 역시 미군무대에서 활동하던 연주자 출신의 김희갑이 하고 있었다. 단지 캠퍼스에서 많이 불린 노래라면 이밖에도 많이 있었을 텐데.

사실 낭만이라고 쉽게 말하기에는 한국대중음악사의, 아니 한국현대사의 질곡이 그 안에 담겨있기도 했었다. 한국의 대중음악은 주로 미8군무대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있고 재능과 실력까지 갖추고 있다면 일단 먼저 미8군 무대의 문부터 두드려야 했었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 급격히 커져가던 청년문화에 제동을 걸고 체제에 비협조적이던 음악인들에게 족쇄를 채우기 위한 일환으로 '대마초파동'이 정부의 주도로 일어나면서 그 대부분의 음악인들이 활동을 정지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 공백을 대체하고자 캠퍼스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젊은 음악인들을 발굴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바로 대학가요제였다.

▲ 출퍼: '불후의 명곡' 홈페이지 캡처

이용이 데뷔한 '국풍81'의 대학가요제는 그 정점이 있었을 것이다. 군사쿠데타에 이은 광주에서의 학사로 대내외적인 여론이 좋지 못했던 신군부가 체제홍보 및 청년문화의 포섭을 목적으로 개최한 것이 바로 '국풍81'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마추어였기에 오히려 순수할 수 있었던 이들의 솔직함이 '불놀이야'나 '나어떡해',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같은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시도들을 들려주고 있기도 했던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고, 결과적으로 보면 신선했다. 이후 데뷔를 목적으로 대학진학을 선택하는 경우가 늘었을 정도로 미군무대를 통해 데뷔하던 전통은 크게 바뀌게 된다. 물론 요즘은 대형기획사 연습생으로 시작한다.

저항적인 서구의 록과는 다른 부르주아적이고 탐미적이며 양식적인 한국록만의 전통은 어쩌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을 것이다. 대학에 진학할만한 여유가 있었고, 서구의 록음악을 체화할 수 있는 환경에 있었으며, 무엇보다 비싼 악기값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 데뷔통로 역시 체제홍보의 수단으로 전락한 방송국이 주도하는 가요제를 통해서였다. 정작 체제에 저항하던 또다른 젊은이 집단인 운동권이 록을 거부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서구에서는 저항음악이지만 한국에서 그것은 마찬가지로 타도해야 할 체제의 일부였던 것이다.

아무튼 앤씨야와 이세준이 함께 부른 블랙테트라의 '구름과 나'는 세대를 아우르는 조화를 들려주고 있었을 것이다. 이세준의 세대에서 듣던 노래지만 부르는 것은 앤씨야에 더 가깝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이세준도 기성세대가 되었다. 젊은 시절의 꿈과 열정, 낭만은 아련한 추억으로만 존재한다.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바라보듯 아련함으로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인 앤씨야를 받쳐준다. 앤씨야의 힘있는 목소리와 노래가 이세준의 아련하면서도 감성적인 목소리와 어우러진다. 아마 이세준 때도 그렇게 이세준을 바라보던 어른이 있었을 것이다. 세대를 넘어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 '불후의 명곡2'의 무대일 것이다.

홍경민의 '그대로 그렇게'는 노멀했다.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오래전 맛보았던 어떤 요리를 지금 다시 똑같이 즐기려 한다면 아마도 조금 더 강한 맛과 향이 필요할 것이다. 만일 휘버스가 지금 '그대로 그렇게'를 만들고 노래했다면 아마 홍경민처럼 연주하고 불렀을 것이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았다. 부족하지도 지나치지도 않았다. 그냥 시간만 바뀌었다. 시대만 바뀌었다. 휘버스 대신 홍경민이 무대에 올랐다. 지금은 이것이 스탠다드다. 이제 생각났다. '정석'이다. 380점이라는 점수는 원곡을 기억하는 모두의 마음이지 않을까.

서문탁의 '불놀이야'에는 여유가 없었다. '불놀이야'라기보다는 그냥 서문탁의 노래였다. 원곡이 가지는 여유로움도, 그렇다고 그것을 대신할 다른 무엇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단지 서문탁은 열정적으로 노래를 잘한다. 손승연이 부른 '바람이려오'에서도 가사에서 느껴지는 어떤 감정 대신 손승연의 노래에 대한 자신감만을 느꼈을 뿐이었다. 서문탁의 노래이고 손승연의 노래였다. 서문탁의 무대이고 손승연의 무대였다. 노래 잘한다는 것은 벌써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도 힘을 빼고 감정을 살려 부를 때는 '바람이려오'의 감정이 느껴지고 있었다. 역시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TV와 현장의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

이현우의 '세상모르고 살았노라'는 과연 이현우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무대였다. 활주로의 원곡은 아니나 다를까 젊은이다운 반항과 냉소를 담아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현우의 무대에서는 긴 세월을 살아오며 누구보다 절실히 그것을 깨닫게 된 장년의 충격과 공포를 담아내고 있었다. 사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살아왔다. 다 안다고 여기면서. 노이즈처럼 섞이는 소리들이 그같은 이현우 자신의 내면을 들려주는 듯하다. 활주로의 그것이 세상을 향한 고백이었다면 이현우의 그것은 자신을 향한 독백이다. 최고였다. 필자의 취향이 드러날 것이다. 가장 훌륭한 편곡이고 무대였다.

오렌지캬라멜의 '나어떡해'를 들으며 비로소 이 노래가 이토록 슬픈 노래이구나 깨닫고 말았다. 오렌지캬라멜의 목소리 자체가 마치 환상과도 같은 실연의 아픔과 혼란을 들려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귀여웠다. 비장한 가운데 여전히 발랄한 자신들만의 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부조화가 오렌지캬라멜을 통해 하나가 된다. 실연의 슬픔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여전히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다. 행복해지고 싶고 즐겁고 싶다. 감정이 조금 지나친 것을 제외하면 완벽에 가까운 무대였다.

딕펑스가 아쉽다. 여름의 나른함과 격정을 그대로 녹여낸 듯하다. 여름의 뜨거운 햇살에 그대로 녹아버린 듯한, 그러면서 바닷가의 추억에 취해 상념에 빠져드는 듯, 그러나 여름은 결코 길지 않다. 어느새 여름은 저멀리 달려가려 한다. 그 끝을 부여잡고 오늘에 충실하려 한다. 여름은 여름만을 살아간다. 가장 여름에 어울리는 선곡이었다. 전혀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와 있는 듯 딕펑스의 노래와 연주에 빠져들고 만다. 상대가 손승연만 아니었다면 제법 높은 점수도 받지 않았을까. 진정 여름과 바닷가를 들려주고 있었다.

지난 역사야 역사이고 결국 남는 것은 노래 그 자체다. 그 시절만의 솔직함이 만들어낸 순수함과 진정성이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아니 필자 역시 그들 노래를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세대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노래가 좋다. 전혀 새롭게 편곡된 노래들이 새로운 감정으로 새롭게 다가온다. 지금도 사람들은 노래를 부른다. 좋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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