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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7.20 07:58

남자의 자격 "청춘합창단과 남자의 자격"

 
어째서 "청춘합창단"인가? <남자의 자격>의 부제가 "남자가 죽기 전에 해야 할 101가지"다. 그렇다면 "청춘합창단"과 "남자가 죽기 전에 해야 할 101가지"와 어떤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가? <남자의 자격>이라는 프로그램의 주체와 정체성과 어울리는가?

포털에 올라온 기사를 읽으며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많은 남자들이 바로 그 방송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괜히 허세를 부리다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차마 채널까지 돌려버린 사람마저 있었다. 도대체 더 이상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남자의 자격이란?

아버지이고 어머니였다. 그리고 또한 앞으로 맞이 할 미래였다. 남자들의 과거이며 또한 미래였던 것이다. 부모님의 세대를 이해하고, 그리고 앞으로의 자신의 모습을 그려본다. 과연 나의 부모님들은. 그리고 10년 뒤, 20년 뒤, 30년 뒤의 나의 모습은. 그것만으로 사실 충분하지 않겠는가.

아들을 잃은 부모였고, 그럼에도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부부였다. 안타까웠고 그러면서도 부러웠다. 딸 여섯을 기르느라 노래자랑 한 번 나가보지 못했다는 어머니의 모습이나, 젊어서 이루지 못한 꿈을 가까이에서 느껴보고자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음에도 오디션장을 찾은 또다른 어머니나, 성공한 CEO로써 이제 자기를 위한 삶을 살고 싶다던 어느 사장님이나. 부모의 세대가 거쳐온 길이고 어쩌면 자신의 미래일 것이다.

세대와 세대가 소통한다는 것이 비단 보다 젊은 신세대를 이해해보자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의 세대를. 그 아버지의 세대를.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자신의 미래가 될 터다. 그래서 눈물도 흘린 것 아니었던가. 그분들의 삶을 이해해서. 그리고 그로부터 앞으로의 자신의 삶을 그리면서. 부모와 마주하고. 그러면서 자식과도 마주하고. 무엇보다 자신과 마주한다. 그분들을 통해서. 나를 통해서.

솔직히 부러웠다. 그리고 두려웠다. 나는 과연 저 나이가 되어서도 저처럼 순수한 꿈을 간직할 수 있겠는가? 저렇게 당당하게 그러면서도 수줍기 자신의 꿈에 도전해 볼 수 있겠는가? 후회하느니 나는 왜 젊어서 저렇게 용감하지 못했을까? 적극적이지 못했을까? 저리 모습들이 아름다운데. 그러면 나는 과연 앞으로는 저렇게 살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런저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부모님 생각과 더불어 앞으로의 나 자신에 대해서도. 앞으로의 자신에 대한 생각은 지금의 자신에게로 미친다. 부모님에 대한 생각 역시 지금의 자신을 정의하게 된다. 어찌해야 할까? 답은 각자가 내리기 나름일 것이다. 중요한 건 그 계기가 되어 주었다는 것일 게다.  그런데도 과연 이런 것들이 남자의 자격에 어울리지 않는 것일까?

 <남자의 자격>이라는 제목에 대해 너무 말뜻 그대로 교조적으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남자의 자격>이라는 프로그램이 비판을 듣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것이 과연 "남자의 자격"이라는 제목에 어울리는가? 그것이 과연 "남자가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에 포함되는가? 그러나 과연 무엇이 남자인가? 어떤 것이 남자다운 것일까? 그 답을 내리기도 쉽지 않은 것을. 하물며 눈물이 있음에야.

세대와 세대, 특히 어쩌면 잊혀진 채였던 부모세대와의 소통과 인간이라면 당연히 갖는 꿈에 대한 기대, 그리고 인간이 마지막까지 간직한 순수에 대해서. 아니 어쩌면 인간과 삶에 대한 중요한 화두일 것이다. 방송을 시청하며 흘리는 눈물이란. 그 눈물에 담긴 의미라는 것을. 어째서 방송을 보며 남자들은 그리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던 것일까? 과연 남자의 자격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일까?

지나치게 단어의 뜻에 집착하다 보면 시야가 좁아진다. 남자라는. 혹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가슴에 물어보면 된다. 흐르는 눈물에. 왜 나는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는가. 스스로 느끼고 깨닫는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눈물을 믿는다. 너무 생각이 많아도 문제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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