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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4.04.23 07:55

[김윤석의 드라마톡] 신의 선물 마지막회 "현실적인 결말, 정의가 아닌 권력에 기대다"

개인의 신념도, 양심도, 정의도 권력 앞에 무력한 이유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참 무력하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철저히 농락당한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증거까지 모두 빼앗기고, 그동안 굳게 지켜왔던 양심과 신념까지 포기하게 만든다. 심지어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살인까지 저지르게 만든다. 없는 죄도 만들어 씌운다.

그것이 권력이다. 권력이 정의로운 이유다. 정의가 항상 승리하는 이유다. 자기 목숨까지 바쳐가며 정의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소수다. 가족까지 희생해가며 정의를 지키려 하는 사람 역시 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권력은 그 모두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수십만, 아니 수백만의 목숨조차 권력에게는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 이명한(주진모 분) 앞에서 지금까지 지켜온 자신의 모든 신념과 양심을 내던진 채 비굴하게 무릎꿇고 애원하던 한지훈(김태우 분)의 모습이야 말로 수많은 힘없는 개인의 모습인 것이다.

▲ SBS 제공
한지훈이 옳다. 개인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일개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냉엄한 세상에서 전혀 아무것도 없다. 많은 개인들이 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TV를 보며 막연히 김수현(이보영 분)을 비난하고 있었다. 대부분 개인이 접하는 정보란 그렇게 미디어를 통해 걸러져 보내는 것들이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 역시 권력이다. 그러지 못하도록 견제하라는 언론이지만 그러나 권력의 힘 앞에 언론 역시 일개 개인들에 불과할 뿐이다. 많은 나라에서 기자란 정의로울수록 위험한 직업 가운데 하나다. 살아남는 것은 권력의 눈치를 보고 권력의 입맛에 맞게 정의를 가공하는 다수의 언론인들이다.

결국 세상을 바꾸려면 힘을 가져야 한다. 김수현이 마지막에 의지한 것도 역시 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 김남준(강신일 분)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정의마저 마음대로 주무르던 이명한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그보다 더 강한 권력을 가진 대통령 김남준 뿐이었다. 경찰도 아니고, 검찰은 더욱 아니고, 언론이나 시민사회단체 역시 아니었다. 한지훈 자신이 저명한 인권변호사였다. 그러나 권력 앞에서 이들은 얼마나 무력한가. 한지훈을 이해한다. 무진연쇄살인사건의 진실을 재수사를 통해 밝혀도 결국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진범이 잡힐 것이라는 기대도, 기동호의 무죄가 밝혀질 것이라는 기대도 지금으로서는 그다지 크지 않다. 차라리 그럴 것이라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타락이라기보다는 절망이고 체념이다. 그 깊은 슬픔과 분노를 공감할 수밖에 없다.

결국 한 어머니였다. 한 어머니의 이기심이었다. 자신의 자식을 위해서. 황경수(최철민 분) 역시 결국 자신의 자식과 아내를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아이까지 납치하고 있었다. 억울하게 죽은 아들을 위해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사형대에 세우고 싶었다. 살인을 저지른 아들을 위해 그 죄를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런 어쩌면 간절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이 기동호(정은표 분)를 사형대에 세운다. 죄없는 샛별(김유빈 분)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그나마 황경수는 마지막 순간 양심의 가책을 느껴 샛별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소시민인 황경수에게 아들을 위해 다른 아이를 희생시킨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높은 곳에서 보면 모든 것이 작게만 보인다. 키가 2미터가 넘어가고, 몸무게가 2백킬로그램이 넘어가고, 그래봐야 한참 높은 곳에서 보면 고만고만한 점 하나다. 대통령 영부인의 고민이 그리 길지 않았던 이유였다. 이명한의 이상은 무척이나 높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행위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 여겼다. 김남준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 정의다. 김남준과 같은 정치인이 자신의 꿈을 이루 수 있도록 지켜주는 것이야 정의 그 자체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개 소녀의 목숨따위, 고작 몇몇 개인의 삶따위 철로를 위태하게 건너는 개미떼와 같다. 개미가 몇 마리 죽는다고 기차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오히려 영광스럽게 여겨야 한다. 김남준이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정치인이며 대통령이다.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된다. 정의로운 사람일수록 경계하는 이유일 것이다. 정의를 확신하는 순간 의심이 사라진다. 의심이 사라지는 순간 양심이라고 하는 거울 역시 제 기능을 잃게 된다. 과연 옳은가. 잘못은 아닌가. 틀린 것은 아닌가. 그러나 이미 정의라는 확신이 있기에 그같은 질문들은 의미를 잃는다. 정의라는 확신이 있기에 그 과정이나 수단 역시 모두 정당화된다. 자식을 위해서. 어머니이기 때문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혹은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자신이 지지하고 존경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조금의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못하는 이명한의 무심한 얼굴은 정의라는 괴물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과연 그런 정의를 위해 권력의 힘을 빌어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사형이란 어떤 의미일 것인가.

내내 답답했다. 그러면서도 납득했다. 그것이 권력이다. 역시 이명한 혼자가 아니었다. 대통령 영부인이면 실권과는 거리가 멀지만 대통령의 힘을 일부 동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것이다. 역시나 식물대통령이었다. 그냥 아내와 자식의 일이 아니었다. 비서실장과 영부인이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범죄를 계획하고 행동에 옮기고 있었다. 그 사실을 전달받을 통로 하나 없었다. 아내와 측근인 비서실장이 무엇을 하든 그저 허수아비처럼 눈감고 귀막고 멍청이 있을 뿐이었다. 정치적인 의미는 없겠지만 제왕적 대통령제의 한계이기도 하다. 고대 중국에서 환관이 황제를 에워싸고 멋대로 전횡을 일삼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대통령을 등에 업는 것만으로도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해진다. 일개 개인에 불과한 김수현이나 기동찬(조승우 분)따위 권력의 입장에서 그저 우스울 뿐이다.

정의로워서 허무하다. 양심적이어서 허탈하다. 차라리 이 모든 일들의 배후가 대통령이었다면 더 좋았을 뻔했다. 사람은 좋을지 몰라도 무능하다. 그리고 그것을 납득하고 마는 자신이 있었다. 바로 측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명한이 비서실장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는 증거이기도 했을 것이다. 철두철미하게 대통령에게 불리할 수 있는 정보는 미연에 차단하고 있었다. 영부인의 역할도 있었다.

시간을 거스르기 전 샛별을 죽인 것은 다름아닌 기동찬이었다. 반전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지는 않았다. 기동찬이 꿈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있었다. 환상처럼 무의식처럼 보였던 그 모습이 사실은 실제의 기억이었다. 술에 취하면 기억을 못한다. 기동호가 그랬던 것처럼 기동찬과 같은 착하기만 한 소시민은 부모의 죄를 자기가 대신 뒤집어쓰려 할 것이다. 개인의 선의와 인정마저 철저히 이용하려 한다.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어머니의 죄를 대신해 뒤집어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은 한지훈에게 전해져 그들끼리의 싸움이 되게 한다. 권력은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권력은 무오류하다. 더럽혀지는 것은 힘없는 다수들이다.

흥미로운 결론이다. 결국 샛별을 구한 것은 정의도 뭣도 아니었다.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환상도 아니었다. 추잡할 정도로 기동찬은 발버둥치고 있었다. 한지훈은 울부짖었고, 김수현은 공손하게 대통령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권력이었다. 더 큰 권력. 어떤 방법도 수단도 통하지 않았을 때 오로지 대통령만이 그들의 바람을 들어줄 수 있었다. 대통령이 알게 되었을 때 모든 모순과 갈등은 해결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대통령을 뽑는 것은 대부분의 힘없고 약한 유권자 자신들의 몫이었을 것이다. 혹시 그것을 허투루 흘려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권력 앞에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개인들이 있었다. 대기업 회장인 추병우(신구 분)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추병우 자신이 권력일 경우는 예외다. 그리고 그같은 한없이 작은 개인들을 더 작게 만들어 마음대로 휘두르려는 권력이 있었다. 권력의 정의를 말한다. 아들을 지키려는 어머니와 자신이 지지하고 존경하는 정치인을 지키려는 누군가를 통해. 그런 사소한 이유로도 개인의 일상은 얼마든지 파괴되고 유린된다. 단지 수단이 되고 도구가 되어 버린다.

이미 지나간 장면들에 마치 퍼즐조각처럼 감춰두었던 나머지를 더해 재구성하여 보여준다.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정교하게 구성되고 있었다. 초지일관 드라마는 오로지 지금의 결론을 위해 달려오고 있었을 것이다. 조금은 허술하고 흐트러진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 정도는 충분히 양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이었다. 권력과 개인. 개인의 삶을 마음대로 휘두르려는 권력과 그로 인해 희생당하는 개인의 이야기다. 사형제를 그 연장선상에 놓는다. 상당히 주제도 의미심장하다.

준비된 만큼 완성도도 높았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빨려들듯 챙겨보기 시작했다. 항상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회가 끝나고 내리는 결론은 "매우 만족함". 그동안 보아온 시간들이 허무하지 않다. 매 순간들이 의미가 있었다. 높이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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