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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7.14 10:44

황금어장 "주병진, 인터넷 재판은 그 한 번으로 판결이에요!"

여전히 끊이지 않는 인터넷의 인민재판과 야만...

 
"재판은요 1심, 2심, 3심이 있잖아요? 그래서 기회가 있어요. 그런데 인터넷의 글들은요 1심, 2심, 3심이 없어요. 그 한 번으로 판결이에요. 그래서 상대방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습니다."

상상이 가는가? 원래 재판에 3심까지 있는 것은 그만큼 피의자의 권리를 보장해주기 위해서다. 무죄라면 무죄를 입증할 기회를 주고, 설사 유죄더라도 보다 처벌을 가볍게 할 수 있는 이유와 근거를 찾아 제시할 수 있도록. 그것은 자칫 잘못된 판단으로 말미암아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그런데 한 번으로 재판이 끝난다.

변호사도 자기변론도 없다. 증인도 피의자에게 유리한 증인은 채택되지 않는다. 모두가 "실드"와 "언플"이라는 이름으로 배제된다. 실드란 피의자에 우호적인 입장에서 그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거나 꾸며낸 논리와 근거들. 언플은 미디어 등을 통해 당사자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뿌리는 기사의 내용들. 판단의 기준은 하나. 당사자에게 유리한가?

물론 나름대로 근거는 있다. 재판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변호사란 자신의 유리하도록 말하고 행동하도록 되어 있는 존재다. 당연히 자기변론을 할 때는 자기에 유리하게 말을 할 것이다. 피의자에게 유리하게 증언하고 있는데 피의자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어찌 단정하는가? 그러므로 피의자에 유리한 모든 것은 배제하고. 아마 실제로 이와 같은 재판을 받게 된다면 미쳐버릴 것이다. 어디에도 자신의 무죄를, 혹은 죄의 경감을 주장할 수 있는 통로가 없는데. 기소하고 판결을 내리는 주체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판결되고 단죄된다.

하기는 그나마 궐석재판이다. 당사자 없는 곳에서 재판은 이루어진다. 어떤 변론의 기회조차 없이 몇몇 개인들에 의해 몇 가지 근거들을 바탕으로 추론을 통해 판결이 내려진다. 당사자가 불려오는 것은 이미 판결이 내려진 뒤다. 그리고 일방적인 비난과 단죄에 직면해야 한다. 시효는 무제한. 설사 시효가 끝나더라도 아는 사람이 없으므로 영원히 연장된다. 과연 기분이 어떨까?

그런데 그런 것이 실제 존재한다. 바로 인터넷 여론이다. 네티즌이 여론을 만들고 한 인간을 궁지로 모는 과정이다. 최진실이 그랬고, 작년의 타블로가 그랬다. 타블로의 경우만도 이미 작년 2009년 5월 학력위조의혹이 불거지는 단계에서 이미 판결은 내려져 있었다. 학력위조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에 반대되는 모든 개인의 주장이나 증언, 혹은 언론의 보도는 철저히 실드와 언플이라는 이름으로 무시되고 부정되었다. 그것은 타블로의 입장에 편향된 일방적인 내용이므로.

결국은 네티즌이란 옳다. 인터넷이란 옳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어느 인터넷 매체에서 한 논객이 기고한 글의 내용이 기억난다.

"인터넷은 옳다!"

이유인 즉 다수이기 때문이다. 다수이기 때문에 오류가 적다. 개인개인이 현명하고 정의롭기에 그런 개인이 모인 다수는 무엇보다 현명하고 정의로울 것이다. 문제라면 그 현명하고 정의로운 개인도 집단과 마주했을 때는 집단에 자신의 판단을 묻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는 동물이기 때문에. 더구나 바보가 여럿 모여봐야 더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멍청해진다. 자기가 똑똑하다 믿는 바보는 도저히 구제가 안 된다.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여럿이 모여 있으니 서로의 옳음을 확인해주고, 여럿이 모여 서로의 문제들을 덮어주면, 그래서 그 여럿이 자신들의 정의에 확신을 가지게 되면. 그래서 스스로 옳다 여기게 되면 나머지는 틀린 것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집단은 힘을 갖는다. 집단의 폭력성은 개인의 다른 의견따위 그냥 쓸어 떠내려가게 만들 수 있다. 힘까지 가지고 있으니 누가 거스를까.

솔직히 필자도 주병진에게 미안한 것이 있다. 당시 필자 역시 언론보도를 그대로 믿었다. 여론이 하는 말을 그대로 따랐다. 다른 정보가 없었던 까닭이다. 아마 판결내용이 짧게 단신으로 보도되었듯 당시 필자의 미안하다는 말도 주병진에게 전해지지 않았겠지. 하긴 이미 일이 그렇게 되어 버렸는데 미안하다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필자 역시 뜨거웠던 시절이라.

아무튼 무서운 게 그래서 인터넷 여론재판이라 할 것이다. 그냥 인민재판이다. 피고를 광장 가운데 세워 놓고 누군가 한 사람 피고의 죄상을 줄줄이 읊어댄다. 변호사도 자기변론도 없다. 어떤 자기에 유리한 말이나 행동을 할 기회조차 없다. 대중은 그를 사람들 앞에 세운 한 사람의 말만을 믿고 판단해야 한다. 몇 사람이 그에 동조하면 그에 따라 역시 동조하여 판결하고 단죄하고.

인터넷문화의 야만성일까? 조선시대에도 이미 조상들은 3심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변호사라는 제도가 나타난 것도 상당히 오래전부터였다. 그에 비하면 인터넷에는 아직 변호사도 3심제도도 없이 오로지 재판관 한 사람만 있을 뿐이니. 문명으로 진화하자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많은 사람이 죽었다. 몇몇 사람이 퍼뜨린 어처구니 없는 루머에 의해서. 그 루머를 사실로 믿어 버린 대중에 의해서. 그들의 당사자의 변론이나 주위의 변호따위 상관없는 일방적 판결과 단죄로 인해서. 그나마 <최고의 사랑>에서 구애정이 했던 말처럼 죽으면 그래도 사실이 밝혀질 가능성이나 있다. 죽음 앞에서는 사람들이 엄숙해지고 진지해진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그럴 기회라도 있을까? 자극적인 보도에는 반응해도 전혀 자극적이지 않은 정정보도는 모른 체 넘어간다. 그래서 시효란 없이 당사자는 영원히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몇몇 개인에 책임을 돌릴 것이다. 타블로 때도 그랬듯. 최진실씨와 송지선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에도. 단지 몇몇의 잘못일 뿐이다. 하지만 단지 드러난 경우가 그럴 뿐 지금도 여전히 인터넷에서는 인민재판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에 우호적인 모든 주장이나 근거들에 대해서는 "실드" 혹은 "언플"이라는 딱지가 씌워진 채로. 여전히 궐석재판이다. 판결이 끝나면 그때부터 불려가 추궁과 비난을 들어야 할 것이다. 깐다는 당연한 권리로써.

단지 믿어주는 동료에 대해서도. 동료이기에 믿는다. 지인이기에 믿어준다. 가족이기에 믿는다고 하는 것에마저 비난을 퍼부어대는 패륜이란 무엇인가. 그럼에도 끝까지 곁을 지켜줄 수 있는 동료들이란 주병진이 인생을 헛살지 않은 증거일 것이다. 그러기가 쉽지 않다. 사람이 어려울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일 게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았다. 특히 주병진이 사업가로 성공하기까지. 참 아이디어도 많은 사람이다. 행동력도 좋다. 무엇보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다. 그런 사람을 그리 궁지로 내몰았을 정도이니 당시 상황이 어떠했을까? 필자 역시 지금도 미안함을 떨치지 못한다니까? 말로써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단지 한 마디 말이지만 사람을 죽이는 흉기일 수 있다.

조금은 자신의 정의를 의심해 보면 어떨까? 어째서 무죄추정의 법칙인가? 어째서 3심제이고 변호인이나 피고인의 자기변론을 허용하는 것일까? 판결이 객관적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신중함이 없는 정의란 무도함이고, 무도한 폭력은 잔혹일 뿐이다. 잔혹한 시대다.

다시 한 번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기를. 더구나 최근 타블로와 관련한 보도가 나온 것도 있어서. 하지만 그다지 기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인터넷을 너무 믿는다. 대중의 정의를 너무 믿는다. 의심없는 맹목이야 말로 모든 문제의 근원일 것이다. 야만이 다른 게 아니다. 반성한다. 다시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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