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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음악
  • 입력 2011.07.11 17:57

타블로 논란, "연예인 안티와 경쟁사회의 자화상"

어째서 사람들은 연예인을 증오할 수밖에 없는가?

경쟁이란 다시 말해 누군가와 비교하는 것이다. 비교하여 서열을 매기고 그것을 가지고 우열을 나눈다.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가? 승자는 우월한 것이고 패자는 열등한 것이다. 경쟁사회이기에 승자는 곧 선이고 정의이고 패자는 악이고 부정함이다.

그렇게 배워 온다. 그렇게 길러진다. 엄친아라 하던가? 한 번 얼굴도 본 적 없는 엄마 친구 아들과 그렇게 비교되면서. 너는 왜 이 만큼 못하느냐? 열등감을 강요받는다. 1등을 했다고 가지게 되는 우월감이란 그런 열등감의 다른 표현이다. 항상 조바심을 내게 된다. 만일 1등에서 떨어지게 되면 어쩌지? 내가 승자가 아니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

레이스라는 게 그렇다. 앞서가는 차가 있으면 따라잡아야 한다. 뒤에 쫓아오는 차는 따돌려야 한다. 앞서가는 차가 거리를 벌리면 그래서 불안하다. 뒤에 쫓아오는 차가 거리를 좁히면 그래서 더욱 두렵다. 그래서 항상 신경쓰게 된다. 스트레스가 된다. 혹시 누군가 내 뒤에 붙지는 않은가? 앞서 가는 차를 놓치지는 않았을까? 더구나 그것이 단순한 게임이 아닌 자신의 명예와 존엄이 달린 문제리면. 아니 그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

문제는 과연 남들보다 앞서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열심히 노력하고 실력을 배양해서 남들보다 더 앞서가는 것이 정석일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럴 수 있는가. 사람마다 재능이 다르고 잘 할 수 있는 것이 다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잣대로 줄세우는 것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학벌일 테고, 최근 <나는 가수다>를 통해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 가수의 '가창력'일 것이다. 그룹 안에서 춤과 퍼포먼스를 맡고 있는 멤버에게조차 가창력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고 비난하고.

도저히 내가 가진 것만으로는 그와 경쟁할 수 없겠다. 그를 앞서가는 것은 불가능하겠다. 1등을 하지 못하겠으면 꼴찌는 안 하도록. 마침내 밀리고 밀려 도태되는 패배자가 되지 않도록.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이 남을 끌어내리는 것이다. 흡집을 찾아내어 그를 비난하고 폄하하여 자기 이하로 끌어내리는 것. 그리고 그 가장 만만한 대상이 바로 연예인일 것이다.

연예인은 어찌되었든 대부분의 사람이 인지하고 관심을 갖는 유명인들이다. 일상이 화려하고 대단해 보인다. 뭔가 남들과 다른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런 연예인들에게도 보통사람 - 아니 보통 사람 이하인 부분이 있다면 어떨까? 나와 전혀 다르지 않거나 아니면 나보다 못하다. 어떻게든 남들 위에 서야 하고, 남들보다 뒤쳐지지 않으면 안 되는 강박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또한 연예인이 줄 수 있는 꿈이며 만족이 아닐까?

그래서다. 그동안에도 글을 쓰며 깨닫게 되는 부분이다. 누군가를 칭찬하는 것은 책임을 동반하지만, 단지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반대여야 할 텐데, 그러나 연예인에 대해서는 당연히 이 말이 성립한다. 누군가를 옹호하거나 지지하는 말을 하면 실드가 되어 비난의 대상이 되고, 그러나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비난하는 말을 하게 되면 '깔 놈을 까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대중의 권리가 된다. 전자는 따라서 그 옹호한 대상의 말이나 행위에 따른 책임이 돌아가고, 후자에 대해서는 그 진위와 상관없이 대중으로써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권리가 되는 것이고.

누군가를 비난하지 않고 글을 쓴다는 것은 그래서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특정인을 옹호하고 두둔한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을 안고서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떠도는 상당수의 글들은 누군가를 비하하고 비난하는 글들이다. 가장 인기있는 글들이기도 하다. 좋은 일로는 하루를 넘기기 힘들어도 안 좋은 일이라면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 계속 이어진다.

타블로의 예가 바로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어째서 그 수많은 사람들이 타블로의 학력을 의심하여 - 의심한 것은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그 의심에 대한 확신까지 가지고 그토록 몰려다니며 태연히 폭력을 휘두를 수 있었는가. NSC의 인증은 물론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 여권까지 공개했음에도, 심지어 MBC스페셜까지 동참해 사실을 입증해 주었음에도 아직까지도 타블로를 믿지 않고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가.

그것은 당시 MBC스페셜에 출연했던 타진요의 임원의 한 마디로 요약된다 할 수 있다.

"남들은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스탠포드를 나와서 힙합이나 하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결론은 학벌사회에서 스탠포드란 대단한 명예이고 권위라는 것이다. 스탠포드라는 이름만으로도 우러르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구나 3년 반만에 석사까지 취득해서 졸업. 그러면 더 대단한 삶을 살아야 할 텐데도 고작해야 힙합이나 하는 딴따라. 여기에 더해지는 것이 한국사회의 고전적인 대중이 먹여살리는 연예인이다. 그 가진 바 재능이 대단해서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고 돈을 벌고 인기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좋아해주니까 그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는 그래서 아티스트가 아닌 연예인이라고, 딴따라라고 불린다.

딴따라 따위에 뒤지기 싫다는 오기와. 딴따라 따위에 뒤쳐졌다고 하는 분노. 자기라면 그런 대단한 학력을 가지고 더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딴따라 따위나 하고 있다는 데 대한 증오. 결국은 열등감과 분노와 증오다. 그것은 경쟁사회가 만들어낸 집단히스테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스탠포드를 나와 더 대단한 일을 하고 있으면 용서할 수 있을 테지만 -  더불어 스탠포드 나왔다고 하는 저 인간의 본색을 들추어 보자.

다른 연예인에 대한 대중의 공격이라는 것도 세부적으로는 약간씩 다르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연예인이란 천하다. 한심하다. 불결하다. 부정하다. 그들은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뒤틀린 열등감이다. 그리고 일그러진 우월감이기도 하다. 더구나 연예인은 함부로 반박도 못하니. 이때 괜히 말 한 마디 잘못하면 언플이네 실드네 당사자는 물론 옹호하던 사람마저 온갖 덤터기를 뒤집어 쓰고 만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특별함이 있겠지. 아니 그렇게 비난하는 자신들에게도 남들과 다른 특별함이 있을 것이다. 남들과 다른 점. 남들보다 나은 점. 그런 모자른 부분들과 상관없이 칭찬받고 인정받을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런 다양성을 가지고도 보다 넓게 크게 경쟁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가수다>를 비판하는 논리 가운데 하나도 그것이다. 가수의 능력을 '가창력'이란 한 가지로 재단한다. '가창력' 역시 '열창'하는 능력 한 가지로 줄을 세우려 든다. 그러나 가수의 능력이라는 것이 '가창력' 한 가지로 서열화될 수 있는 것인가. 하지만 그렇게 가수니까 가창력이라는 논리로 그것은 정당화된다. 그리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대상에 대한 공격의 빌미가 된다. 대한민국이라는 경쟁사회가 갖는 모순이다.

어쨌든 그것이 이유인 셈이다. 경쟁을 해야 한다. 경쟁을 해서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승리자는 되지 못하더라도 패배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 나의 뒤에, 나의 밑에 있어야 안심한다. 그것이 유명인이고 인기인이라면 더욱 좋다. 어떤 사명감까지 갖는다. 이것은 정의다. 의심할 나위 없이 절대 옳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깔 놈은 깐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또 "까방권"이라는 말도 만들어진다. 까는 것은 당연하다. 까는 것은 정당하다. 그래서 때로 까지 않는 은혜도 베풀어주겠다. 대단해서가 아니다. 대단하다 믿고 싶어서다. 연예인을 희생양으로 자신이 그렇게 열등한 존재가 아님을 확인하고 싶어서다. 잔인한 것은 슬픔이 있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그들의 정의는 그래서 무도하다.

지금도 곳곳에 뿌리고 있는 안티커뮤니티들. 일상처럼 저질러지는 연예인에 대한 안티행위들. 아니 안티조차 아니다. 단지 연예인을 폄하하고 비난하는 게시물을 직접 쓰거나 혹은 퍼다 날라 게시판이나 블로그에 올리는 것 뿐이다. 당연한 행위로써. 악의조차도 없이. 연예인이란 그런 시대의 희생양이라 할 것이다. 그런 것까지 포함해 연예인일지도 모른다. 이 사회 이 시대의.

하여튼 웃기는 일이다. 그렇게 방송국과 검찰까지 나서가며 타블로의 학력위조는 사실이 아니라고 입증해 주었다. 스탠포드까지 나서서 타블로는 스탠포드를 석사졸업했다고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믿지 않고 타블로를 비난한다. 설사 그러한 발표들을 믿는다 할지라도 그 동안의 모든 일들은 타블로가 잘못한 탓이다. 물론 다른 연예인들도 마찬가지지만.

얼마나 한국이라는 사회가 경쟁이라고 하는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가. 히스테리인 것이다. 자기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가 다른 누군가에 대한 공격성으로 나타난 것이다. 경쟁한국의 자화상이라고나 할까? 경쟁을 통해 더 발전한다. 그러면 남겨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했듯 경쟁을 하더라도 다양하게 경쟁하면 좋을 것이다. 모두의 개성에 맞게. 모두의 장점을 살릴 수 있도록. 굳이 열등감에 사로잡힐 필요 없이. 이종범은 야구를 잘하지만 고종수는 축구를 잘한다. 김병지는 골키퍼이고 안정환은 스트라이커다. 타블로는 랩퍼이고 김종국은 보컬리스트다. 김태원은 기타를 친다. 유상무는 개그맨이고 이범수는 배우다. 그처럼. 모두는 다르고 각자의 잘하는 것이 있다.

여전히 끊이지 않는 타블로에 대한 비난을 보면서. 여전히 멈추지 않는 타블로에 대한 증오들을 보면서.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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