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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7.07 09:03

시티헌터 "빛과 어둠, 인간과 괴물의 경계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죽지 않는다. 지켜낸다.

 
"난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아남고,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끝까지 지킬 것이다."

호조 츠카사의 원작 <시티헌터>에서 주인공 사에바 료가 인질로 잡혀 있던 마키무라 카오리를 구하며 하는 대사다.

처음 적이 카오리를 인질로 잡고 무장을 해제하고 저항을 그만둘 것을 요구했을 때 사에바는 오히려 이렇게 적들에 말한다.

"나는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남는다."

자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도록 하는 것이 과연 사랑인가? 그런 지독한 짓을 하는 것이야 말로 최악의 사랑법일 것이다. 그래서 사에바는 살아남기를 선택하고, 카오리 또한 그에 동의한다. 물론 사에바 료의 초인적인 능력에 의해 카오리마저 구해지지만 말이다.

당연한 충돌일 것이다. 한 사람은 상대가 자기로 인해 위험에 빠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고, 다른 한 사람은 그런 상대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그만 보고만 있을 수 없다. 차라리 자기를 포기해서라도 상대는 살아남아라. 그러나 내가 위험해지더라도 너는 구하겠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말해주는 서로가 고맙다.

아마 많은 이야기에서 반복되어지는 딜레마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에 빠졌을 때 과연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구하려 가야 하는가? 그것은 과연 숭고한 희생이며 극치의 사랑일 것인가?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정작 사랑하는 이의 위험을, 그리고 심지어 자기로 인해 불행한 일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처지란 것도 못할 노릇이다. 당장이야 어떨지 몰라도 결국 자기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이 희생되었을 때 찾아오는 것은 더 큰 절망과 슬픔 뿐이다. 그것이 과연 사랑일 것인가?

마키무라 카오리도 그랬다. 김나나(박민영 분)처럼. 그래서 사에바 료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우미보즈로부터 부비트랩에 대해 배우는 등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사에바 료와 함께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알기 때문에. 차라리 자기로 인해 상대가 위험에 빠지지 않기를. 단지 보호받는 탑위의 공주가 아니라 함께 싸울 수 있는 동료이기를.

"이윤성씨 하루하루가 전쟁이고 순간순간이 괴로운 사람이라는 것 내가 더 잘 아는데 어떻게 기대요? 내가 어떻게 나까지 지켜달라고 그래요? 난요 이윤성씨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될 거에요. 더 강해질 거에요. 내가 이윤성씨 지키게."

실제 이미 김나나는 몇 차례 뛰어난 유도실력과 탁월한 임기응변으로 위기에서 구해낸 바 있다. 일방적으로 도움만 받아서는 동료일 수 없다. 파트너가 될 수 없다. 항상 곁에 있을 수 없다면 연인도 될 수 없다. 안전한 곳에서 단지 기도나 할 뿐인 역할이라면 그것은 자신이 아닌 누구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 내가 돕겠다. 내가 지키겠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마 그것은 감동이었을 것이다.

"대체 뭘 먹으면 너처럼 그렇게 씩씩하니?"

단순히 지켜주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김나나가 공주가 아니듯 이윤성도 기사가 아니다. 함께 나란히 손을 잡고 헤쳐나갈 동료이고 파트너다. 사랑보다 더 굳고 깊은 것이 믿음일 것이다. 어떤 위험에서도 자신의 등을 맡길 수 있는 믿음. 배식중(김상호 분) 말고도 이윤성에게는 믿을 수 있는 - 더구나 사랑하는 파트너가 생겼다. 결국 처음 거부하는 것 같다가도 그래서 이윤성도 조금씩 김나나의 자리를 인정하게 된다.

확실히 원작을 연구한 흔적이 보인달까? 아닌 것 같으면서도 구석구석 원작의 느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윤성에게서는 사에바 료가, 김나나에게서는 마키무라 카오리가. 물론 그러면서도 드라마로서의 오리지널리티는 충실히 유지한다. 어떻게 해도 드라마는 한국드라마다. 그러나 원작에 대한 경의 또한 아주 잊지는 않는다. 원작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눈에 느낄 수 있도록. 덕분에 원작을 최근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아무튼 7월 6일 <시티헌터> 13회는 시티헌터 이윤성에게 있어 하나의 분기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배식중을 차로 치어 중태에 빠뜨렸다고 여겨지는 김종식(최일화 분)이 육교의 난간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을 때 이윤성은 분명 고민했을 것이다. 김종식을 이대로 죽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아니면 그를 구해 살려낼 것인가?

복수를 위해 괴물이 될 것인가?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지킬 것인가? 전자를 택한다면 통쾌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복수귀가 되어 폭주하는 이진표(김상중 분)에게로 가는 길이며 다시는 밝은 빛의 세계로 돌아오지 못하는 길이다. 그렇다고 양심을 지키자니 김종식을 용서할 수 없다. 김종식을 용서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그 장면에서 이윤성은 김종식을 구할 것을 선택함으로써 이진표와 전혀 다른 길을 갈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문제라면 그 타이밍이 늦어 김종식이 떨어지고, 떨어지는 과정에서 차에 치였다는 것인데. 과연 여기에서 김종식이 죽는가? 혹은 사는가? 죽는다면 그것 또한 이윤성에게 살인자의 굴레를 씌우는 것이 될 것이다. 이윤성의 시티헌터로써의 활약이 5인회에 대한 복수에서 그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이윤성으로 하여금 시티헌터로써 살아가게 만드는 굴레가 되지 않을까? 아버지를 죽게 만든 시티헌터를 김영주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양심은 지켰지만 빛의 세계에서 그는 범죄자로 낙인찍혔다.

김종식이 살아나더라도 이진표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 예상하게 되는 이유다. 김종식이 살아나면 재미없어진다. 김영주와 이윤성은 화해하게 될 테고, 이윤성이 다시 빛의 세계로 돌아가는데 거리낌도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는 제목인 <시티헌터>가 상당히 아쉬워진다. 김영주와 이윤성 사이에는 보다 첨예한 갈등구도가 필요하다. 어차피 김상호를 차로 친 것도 이진표이기 쉬우니.

간단한 트릭이었다. 드러내 놓고 복선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필 김종식의 차 번호를 클로즈업해 보여준 까닭이 무엇일까? 아무리 김종식이 배식중을 죽이려 마음먹었어도 굳이 자기 차로 자기가 직접 그것을 실행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수인도 있고, 차도 얼마든지 빌리든 중고로 구입하든 다른 차를 이용할 수 있다. 더구나 김종식은 한 번 사고를 내고 곤란한 처지에 놓였던 적이 있었따. 그런데 하필 김종식의 차와 차번호가 보였고, 배식중을 치는 순간 다시 한 번 그 모습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그 전에 아끼는 사람이 다쳤을 때 미쳐 날뛰던 이윤성을 말하며 그리 만들어주겠다던 이진표가 있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답은 하나. 그렇다면 그 다음도 이진표는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참으로 모순된 캐릭터다. 법을 말하고 정의를 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혈육 앞에서는 약해진다. 김나나의 부모가 사고를 당하고 오히려 가해자로 뒤바뀌었을 때도 그는 단지 침묵하고 김나나의 키다리아저씨가 되었을 뿐이다. 김종식의 비리에 대해서도 이미 인지하고 있었으면서도 자수를 권고할 뿐 직접적으로 행동에 나서고 있지는 않다.

하긴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에서도 나오듯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검사가 사건을 맡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이고 친구인데 냉정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든 인연이 있는데 냉정하게 법대로 처리할 수 있을까? 정이 있어서도, 혹은 원한이 있어서도, 그렇게 사적인 감정에 의해 올바른 법적용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김영주가 수사에서 제외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것이다. 억울하겠지만 김영주 자신이 그래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고 있으므로. 아버지이기에 냉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사고를 눈앞에 보았다.

앞으로 김영주의 정의감과 아버지의 일로 인한 원한이 이윤성과 충돌할 것을 예감하게 되는 부분이다. 검사로서의 김영주에게는 서로 충돌하는 모순이지만 사고를 계기로 이윤성을 대함에 있어서는 중첩되어 보다 첨예하게 부딪히는 갈등의 원인이 된다. 적이 강하고 집요해야 드라마는 재미있어진다. 이진표에 더해 이제는 김영주까지. 김종식이 살아나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다. 그래야 드라마가 재미있어질 테니까.

그나저나,

"사람의 목숨값이 다 같은 줄 아느냐?"

권력을 쥔 입장에서 하는 말을 걸러들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법을 지켜야 한다. 부정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나라를 위해야 한다. 민족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단, 자신은 예외다. 자신은 특별하므로.

예전 그런 적이 있었다. 한 정치인이 장애인을 폄하하는 발언을 했었다. 장애가 있다면 낳지 말아야 한다며. 그러자 누군가 그 정치인과 같은 정당에 몸담고 있는 장애인을 자식으로 둔 다른 정치인의 이야기를 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과연 그럴까?

이경완도 같은 뜻의 말을 했었다. 서용학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특별하다. 따라서 나는 예외다. 특별하므로 그러한 원칙에 적용되지 않는다. 설사 장애인을 자식으로 두고, 같은 정당 정치인으로부터 장애인을 폄하하는 말을 들었어도 그것은 내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법을 지키는 것도, 부정을 저질러서는 안 되는 것도, 국가를 위하는 것도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 따라야 하는 것이지 특별한 자신에 대해서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도취된다. 특별한 자신에게. 그런 자신에 어울리는 자신에게. 그런 자신을 위해 다른 모두는 희생해야 한다. 그 모든 희생은 당연하다. 자기가 누리는 부와 권력은 그에 따른 정당한 권리다. 그래서 말과 행동이 따로 나간다. 의식하지도 않는다. 아마 거짓말탐지기로 검사해도 그 말에 위화감은 없을 것이다. 내가 아닌 모두에게. 모두가 아닌 나에게만. 그의 진실일 테니까.

그 말을 하는 김종식의 모습이 그렇게 섬뜩했던 것은 그가 이미 괴물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식으로 표현하자면 오니일까? 사람이 괴물이 되는 것은 한 순간이다. 자기가 자신을 속이게 되었을 때. 혹은 자기가 자신을 버리게 되었을 때. 김종식이나 이진표나 결국 자신을 속이고 버린 괴물이라는 점에서는 닮은 꼴일까? 이윤성이 바로 그런 중대한 기로에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지킨 것은 그래서 의미있다 하겠다. 만화 <시티헌터>는 어떨지 몰라도 드라마 <시티헌터>는 순백의 흰 빛은 아닐지 몰라도 밝고 따뜻한 잿빛이다.

갈등이 중첩된다. 의도한 것일까? 김영주와 이윤성, 김영주와 김나나, 이윤성과 이진표, 여기에 배식중과 관련해서 이윤성과 이진표의 갈등은 심화될 듯하고. 드라마란 결국 사람의 이야기임을. 액션에 너무 많은 투자를 할 수 없는 한계에서 극적 재미는 관계와 갈등에서 나온다.

많이 허술하다. 빈 구석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채우고도 남는 무엇이 있다. 역시 캐릭터일까? 첨예한 관계와 고조되는 긴장도 있을 것이다. 갈수록 재미있어진다. 좋아진다. 발전해가는 드라마일 것이다. 기대이상이다. 만족하며 보고 있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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