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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영화
  • 입력 2014.02.01 07:55

[리뷰] 겨울왕국 "겨울의 이유, 무엇이 왕국을 겨울로 뒤덮는가"

단절과 고립, 그리고 해빙, 사랑이 겨울을 녹이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이를테면 초능력자의 비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초능력도 일종의 장애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다른 일반적인 장애가 결여에서 비롯되었다면 초능력은 잉여에서 비롯된다. 넘치는 것은 위협이 된다. 그래서 배제하려 한다. 어째서 슈퍼맨은 안경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가?

그런 이야기를 알고 있다. 정신지체를 가진 아이로 인해 다른 아이가 상처를 입었다. 부모는 정신지체를 가진 아이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실수로 다른 아이를 상처입힐까봐, 아니 무엇보다 아이 자신이 상처 입을 것을 걱정해서 부모들은 아이를 격리하기로 했다. 혹시라도 주위에서 아이의 정신지체를 알게 된다면 반드시 상처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아이 혼자 남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

▲ 소니 픽쳐스 릴리징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 제공

굳이 정신지체가 아니더라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면 때로 버리거나 때로 아무도 모르게 숨겨 기르고는 했었다. 혹시라도 남들이 알까,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아이의 존재가 알려질까, 아이는 그 자체로 재앙이고 죄였다. 아니 지금도 많은 아이들이 버려지고, 설사 버려지지 않더라도 부모라는 울타리 안에서 세상과 철저히 단절된 채 사육당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그것이 아이를 위해서 최선이라며.

겨울은 단절이다. 무엇도 나지 못하고 무엇도 자라지 못한다. 추위를 피해 짐승들도 둥지안에 웅크리고 있다. 엘사가 만들어낸 것은 눈이 아니었다. 단지 얼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결과였다. 그것은 단절이었다. 두려움이었고 혐오였다. 어쩌면 엘사는 남들과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능이 남들과 같지 않거나, 몸의 일부가 조금 불편하거나, 아니면 성격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거나. 그래서 거리를 둔다. 사랑하면서도 아니 사랑하기에 부모마저 그런 엘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엘사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직 어린 안나 뿐이다.

단절된다. 고립된다. 그런데 차라리 그쪽이 더 편하다. 일본에서 사회문제가 된 바 있는 히키코모리가 그런 한 예일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하니 스스로 세상을 거부하려 한다. 굳이 불편한 세상과 부대끼려 하지 않고 혼자만의 세상에 자신을 가둔다. 얼음으로 만든 궁전에 스스로를 가둔 채 고독속에 마침내 자유로워진 엘사처럼. 그러나 그렇게 남들과 다르다고, 남들만 못하거나 혹은 넘친다고 해서 배제되고 고립된다면 세상은 삭막하기 이를데 없을 것이다. 인간의 양심에 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단지 겨울뿐인 왕국에서 이익을 구하려는 이들이 있다. 아렌델을 얼음에 가둔 것은 자신들과 다른 엘사를 거부하던 국민들 자신들이 아니었을까.

그런 엘사를 찾아 안나는 눈덮인 산을 헤맨다. 춥고 험한 산을 오른다. 사랑받고 자란 것을 알 수 있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자학적인 엘사에 비해 안나는 모든 것에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다. 무모할 정도로 행동적이다. 사랑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사랑하는 것에도 적극적이다.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린다. 자기를 다쳐가며. 자신을 상해가며. 그것은 장애가 아니었다. 공포도 혐오도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열두 살 난 아이가 두 살처럼 행동하니 그것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어머니가 앞을 보지 못하기에 언제까지나 길을 걸을 때면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체온을 느끼며 걸을 수 있다. 사랑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구원한다.

마침내 안나는 사랑을 얻는다. 안나의 모험이 목적한 바일 것이다. 사랑으로서 언니를 구원한다. 사랑으로서 자기 자신을 구원한다. 마침내 사랑을 만난다. 어설프고 섣부른 풋사랑이 아닌 진실한 사랑이다. 누군가를 간절히 사랑했을 때, 그 사랑이 무조건적일 때, 엘사 역시 비로소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게 된다. 남들과 다른 그녀의 초능력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도 혐오의 대상도 아니다. 모두가 그녀의 능력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동화다. 동화란 항상 목적성에 충실하다.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누구나 흥미를 가지고 귀 기울여 듣게 만들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이야기가 가지는 구조로서의 허점은 목적을 위한 비유와 상징이 대신한다. 그리 되어야 하는 당위다. 모두는 행복해야 한다. 순리대로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려서 서로 격리되고 단절되었던 엘사와 안나 두 자매 역시, 세상을 겨울로 만드는 능력이란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언니가 동생을 걱정하고, 동생이 언니를 염려한다. 서로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다. 매몰차 보이는 모습까지 서로를 위한 진심이다. 사랑이 세상을 녹인다. 사랑만이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

악역조차 없다. 어쩌면 가장 혐오스러운 '악' 그 자체였을 것이다. 악의조차 보이지 않는 그저 평범한 일상의 욕심에 불과하다. 여왕과 결혼하려 했고, 그보다 더 쉬운 여왕의 여동생을 유혹하려 했다. 마침 여왕과 그 여동생의 빈자리는 그에게 다른 더 큰 욕심이 자라나는 기회가 되었다. 여왕은 암살자들과 싸우다 다쳐서 포로가 되었고, 여동생은 여왕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었다. 인간은 선량하기도 하지만 유혹에 너무나 취약하다. 한스를 악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상황이 그를 위해 유리하게 만들어지고 있지 않았던가. 없던 악의도 생겨나고 만다.

부모의 잘못된 사랑이 원인이었다. 사랑이라 믿고 있었다. 그저 위험하지 않게, 남들에 피해가 가지 않게, 아무도 다치지 않도록 격리하고 보호하면 될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위험하다면 얼마나 위험한지, 어떻게 하면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지, 다른 긍정적인 가능성은 없는 것인지. 걱정하기에 급급한 것도 어쩔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부모와 형제는 다르다. 언니와 동생도 다르다. 무엇이 서로를 위한 최선인가. 무엇이 왕국을 겨울로 뒤덮는가.

기술의 진보는 감동까지도 진보시키는가? 실사라면 불가능한 경이적인 장면들이 기술의 진보에 힘입어 눈앞에서 구체화되고 있었다. 인간이 만든 컴퓨터 그래픽에 생명이 부여되고 있었다. 사랑스러울 정도로 풍부한 표정과 마치 실재하는 공간인 듯 광대하면서도 디테일한 영화속 풍경이 절로 허구의 이야기에 빠져들도록 만든다. 세포 하나하나가 캐릭터의 숨소리와 심장뛰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다. 인간은 비로소 여기까지 와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걔랑 놀면 안 돼. 걔랑 어울려서는 안돼. 어느새 그 아이는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조금 더 용기를 가지고 안나처럼 다가갔다면 엘사처럼 그 또한 따뜻한 웃음을 지어주었을까? 모두가 두려워해도, 모두가 싫어해도, 모두가 가지 못하게 말려도, 인간을 구원하는 건 바로 인간이다. 인간을 단절케 하는 것도 인간이다. 사랑이다.

무언가 모자른 듯한 느낌이 좋다. 치밀하지 않다. 치열하지 않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사소한 일들로도 심각해지고, 별것도 아닌데 크게 느껴진다. 그런 만큼 해결도 쉽다. 좌절도 절망도 없는 긴장이란 설렘의 다른 이름이다. 꿈을 꾸는 듯하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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