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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11.24 10:15

불후의 명곡2 "포크의 계보, 관록의 유리상자 우승하다"

시대를 뛰어넘는 아름다움, 전설 어니언스를 만나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대중가요란 가사다. 가요라는 말 자체가 가사라는 뜻을 갖는다. 70년대 포크음악이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시인이 된다. 깊은 밤 혼자 외로우면 자신도 모르게 시인이 되고 만다. 시대가 바뀌어도 남는 것은 아름다운 말, 아름다운 생각, 그리고 아름다운 노래다. 진솔하고 간결했으며 섬세했다.

미국의 포크는 전통의 컨트리 음악에 뿌리를 둔다. 그러ㅏ한국의 포크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본토의 포크를 번안해서 부르다가 조금씩 그것을 자기화하기 시작했다. 한국인이 가장 즐겨듣고 자기도 모르는 새 흥얼거리게 되는 가장 친숙한 멜로디다. 어려서 듣던 어머니의 자장가와 같고, 들일을 하던 농투성이의 구성진 소리와도 닮았으며, 어딘가 허름한 술집에서 술에 취해 흥에 겨워 부르는 고단한 노랫소리와도 같았다. 포크를 내면화하고 있었다. 형식은 미국의 포크를 따랐지만 그 안에 담겨진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 우리의 이야기였다.

어니언스가 활동하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필자가 기억하는 것은 임창제라는 이름으로 여러 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추던 모습 뿐이었다. 노래를 먼저 알았다. 항상 그래왔었다. 노래를 듣고, 노래를 좋아하고, 그리고 우연처럼 그 노래를 부른 사람을 알게 된다. 노래를 부른 가수는 몰라도, 더구나 당시 아직 너무 어린 나이였음에도 단지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통하는 것 같은 무언가가 있었다. 습관처럼 문득 노래가 숨소리처럼 흘러나온다.

▲ 출처 '불후의 명곡2' 방송캡처

말하듯 노래를 부른다. 마치 자기의 이야기를 하듯 노래를 들려준다. 한참을 씹고 또 씹어 투명해진 이야기가 귀를 간질인다. 귀를 기울인다. 마침내 자기의 이야기처럼 듣게 된다. 목소리의 내공이 깊다. 오히려 경연을 의식한 듯한 고음부에서 감동이 희석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참을 내 이야기처럼 듣고 있었는데 그것이 이해리 자신의 이야기였다. 어니언스의 '외길'을 듣고 있었다. 빠져들 뻔했었다. 아쉬웠던 이해리의 '외길'이 무대였다.

목소리만이 아닌 몸으로도 노래를 부른다. 손짓으로, 몸짓으로, 그리고 표정으로. 댄서들과 함께하는 군무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노래다. 외롭고 쓸쓸한 마음마저 친구들과 어울려 웃음으로 흘려보낼 수 있는 젊음을 들려준다. 삶이란 그 자체로 기적이며 환희다. 내일에 대한 기대와 낙천으로 하루하루가 설렌다. 좌절마저 즐길 수 있다는 것이 그 시절만의 특권 아니던가. 그래도 남는 것은 한 가닥 감출 수 없는 진심. 그때처럼 지금의 젊음이 '외기러기'를 부른다. 빅스타라는 이름을 기억에 새긴다.

과연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다. 먼 기억으로부터. 아득하도록 먼 그 시절의 순수로부터. 그곳은 이미 다른 세계의 다른 공간이다. 그때도 아니고 지금도 아닌 과거의 자신과 만나는 전혀 다른 공간이다. 가야금과 바이올린과 만돌린, 그리고 휘슬의 연주가 그 공간을 완성한다. 이수영의 목소리는 전혀 튀지 않는다. 꿈속을 거닐듯 이국적인 악기와 어우러져 자기만의 시간을 곱씹는다. 너무나 익숙한 노래였는데. 너무나 잘 아는 노래였다. 문득 지금의 자신이 '편지'라는 노래를 부르면 저렇게 들리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아련해진다. 아련해진다.

한 여자가 홀로 이야기를 한다. 누군가 들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조차 자기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무의미하게 무미건조한 이야기가 잡음처럼 흘러나온다. 수많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떠돈다. 실연의 아픔과 떠난 사람에 대한 원망, 그럼에도 남는 미련, 사랑이 허무하다. 빅스타의 무대에서 춤이 이야기처럼 들렸다면 정인의 '사랑의 진실'의 무대에서는 춤이 하나의 음악처럼 보이고 있었다. 음악이 눈으로 보였다. 배경처럼 음악의 한가운데 정인이 혼자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음악이었다. 목소리의 질감이라는 것이 있다. 완벽한 하나의 음악을 정인의 목소리가 완성하고 있었다. 다만 조금은 낯설지 않았을까. 정인의 노래와 함께 어느새 먼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무대의 구성이 좋다. 달달하면서도 흥겨운 노랫말과 가사가 나인뮤지스의 이유애린이 등장하며 극적인 변화를 보인다. 오히려 노래를 부르는 VOS가 사이드로 물러나고 있었다. '몰라주네'의 노랫말이 가리키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 누가 무엇을 그토록 몰라주기에 이처럼 애절하게 외쳐부르고 있는가. 세상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하나의 축제다. 그조차 즐겁다. 그조차 행복하다. 훨씬 직접적이고 훨씬 세련되다. 사랑이 즐겁다. 노래가 즐겁다. 하나 걸리는 것 없이 그저 즐겁고 행복한 무대였다.

과연 유리상자였다. 밤하늘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없는 깊고 어두운 하늘을 떠올렸다. 멀리 지평선이 아득하다. 하늘과 맞닿는 곳에 우거진 그림자가 더 서럽고 슬프다. 달빛이 비추고 있었을 것이다. 가끔 구름이 달빛과 별빛을 가린다. 외로운 기타소리가 들린다. 울음처럼 기타소리가 어둠을 헤집고 한 마리 새가 외롭게 어두운 하늘을 날아가고 있다. 소리를 비운다. 공간을 비운다. 텅 빈 공긴이 한없이 채워져 있다. 박승화가 그 빈 하늘이었다. 이세준의 고음은 함춘호의 기타소리였다. 혼자서 운다. 혼자서 울고 있다. 하필 가을이다. 가을밤이다.

어니언스를 양파들이라 불렀다. 바니걸스는 토끼소녀가 되어야 했다. 윤수일밴드는 윤수일과 솜사탕이 되어야 했다. 현철과 벌떼들, 김정수와 급행열차,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우울하던 시절이었다. 사소한 것들 하나까지 규제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남자들도 그렇게 파마를 많이 했었다. 머리를 마음껏 기르면서 단속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머리를 길러서 볶는 것이었다. 우울한 시대에 그토록 아름다운 음악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것은 지독한 아이러니일 것이다. 아니 그런 시대이기에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을까?

오랜만에 임창제를 보았다. 처음엔 몰라봤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 무심하다. 노래를 들었다.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은 잊고 있었다. 여전히 아름다움에 취한다. 그리고 그 노랫말들과 멜로디가 전하던 지나간 어느 시간의 기억들에 취하게 된다. 조금은 멀리서. 텅 비우면서도 가득 채워서.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것처럼. 감상적이 되었다. 밤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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