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6.27 07:25

남자의 자격 "하늘은 공간을 아우르고, 땅은 시간을 잇는다."

천장지구, 무한과 영원의 만남과 기억을 엿보며...

 
문득 천장지구(天長地久)라는 말을 떠올리고 말았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홍콩느와르의 전성시절 사천왕의 하나였던 류더화와 우첸롄이 주연한 영화제목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원래는 노자의 "天長地久天地所以能長且久者以其不自生故能長生"라는 귀절에서 따온 말로써 풀자면, "하늘과 땅은 장구하나 그것은 하늘과 땅이 오로지 스스로를 위해 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참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해석하기를 천장지구(天長地久)에 대해 "하늘과 땅은 장구하다", 즉 자연은 영원하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분명 그 해석이 옳을 것이다. 다만 필자의 경우 어려서 워낙 배움이 부족하던 시절 노자를 접한 까닭에 이 귀절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 기억하고 말았다. 하늘은 길고(크고), 땅은 유구하다. 하늘은 광대하며 땅은 영원하다. 필자가 <남자의 자격> 배낭여행편을 보면서 다시금 떠올리게 된 바로 그 귀절이고 해석이다.

하늘은 변화무쌍하다. 어제의 하늘과 오늘의 하늘이 다르고, 오늘의 하늘이 내일의 하늘과 다르다. 조금 전의 하늘이 또 조금 뒤의 하늘과도 다르다. 그러나 대신 아득하도록 광대하여 어디에서 보더라도 같은 하늘이 된다. 하늘은 기약이 없지만 그러나 하늘 아래 모든 것을 아우르는 넓음이 있다.

땅은 고정되어 있다. 움직이는 일도 없고 크게 바뀌는 일도 없다. 단지 같은 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서 있는 그 자리가 유일하다. 그러나 땅이란 움직이지 않기에 같은 자리에 서 있다면 시간이 남긴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넓은 품은 없지만 언제고 만나리라는 기약이 있다.

지난주 킴벌리팀과 팔바라팀이 전혀 다른 공간에서 보았던 같은 하늘과, 그리고 이번주 하루 늦게 도착한 팔바라팀을 맞는 킴벌리팀의 작은 흔적과. 아득하도록 먼 하늘의 넓이를 지난주 보았다면, 이번주는 수천만년 시간이 아로새겨진 깊이를 볼 수 있었다. 3억 5천만년 뒤에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약할 수 있는. 벙글벙글이 그 자리에 있는 한, 벙글벙글의 모습이 아무리 바뀌었어도 그들은 언제고 다시 그 자리에 모일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의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천장지구의 뜻을 저렇게 해석하는 사람이 그리 흔하지 않다. 올바른 해석인가도 사실 그다지 자신은 없다. 다만 보는 순간 문득 그것을 떠올리고 만 것은 그만큼 <남자의 자격>이 보여준 오스트레일리아의 자연이 경이로웠기 때문이었다. 무한의 하늘과 영원의 대지. 모두가 같은 하늘을 보고, 모두가 같은 대지를 딛는다. 어디선가는 함께 보고 어디선가는 함께 만난다.

그런 점에서 우연히 카라지니에서 브룸으로 향하는 도로위에서 만난 '낙타성자'는 상당히 상징적이었을 것이다. 같은 퍼지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은 같은 장소에 있었다. 두 달과 열흘이라는 시간의 차이를 뛰어넘어. 세 사람은 랜트란 차를 타고 있었고, 한 사람은 낙타의 건강을 걱정해 낙타를 몰고 걸어가고 있었다. 랜트카를 타고 달려온 열흘이라는 시간과 낙타와 더불어 걸어온 두 달이라는 시간. 그리고 그들이 출발하고 다시 만난 그 자리.

그래서 사람들은 어디론가 떠나는 게 아닐까. 새로운 만남을 위해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하늘 아래 나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그 무언가를 만나기 위해서. 그것은 사람일수도 있고 자연경관일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장소에 이르러 만나게 되는 시간들. 수천만년 물은 돌맹이를 싣고 바위를 깎아 웅덩이를 만들고 자연의 성당을 만들었고, 절묘한 계곡과 기기묘묘한 봉우리들을 만들고 있었다. 혹은 그 장소를 찾았던 누군가. 그 장소에 대한 누군가의 말들. 그리고 또한 자신은 그 말을 전하는 메신저가 된다. <남자의 자격>을 TV로 시청하며 어느새 그들의 발길이 머문 곳을 동경하게 되는 필자처럼.

바로 이것이 자연이다. 아니 이것이 천지다. 하늘과 땅. 하늘 아래 땅 위에. 무한과 영원의 세계. 우리는 그 한 가운데 있다. 유한하며 필멸인 존재이지만 그렇게 만남과 관계를 통해 무한과 영원을 얻는다. 누군가는 나를 기억할 테고, 그 기억이 전해지며 멀리 어딘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나를 데려갈 테다. 우연한 만남을 기억하고 전화를 기다리던 브룸의 베번 할아버지처럼. 인간이란 그 무한과 영원이 지나치는 교차점이다. 그 중심이다. 인간이 우주인 이유일 것이다.

아름다웠다. 감동이었다. 그 무한의 공간이. 영원의 시간들이. 그 속에 작지만 큰 인간들이. 하염없이 작지만 그러나 인간은 만남을 통해 더욱 거대해지고 영원에 가까워진다. 인연이란 무한보다도 거대하고 영원보다도 장구하다. 그 만남 하나하나가 기적이다.

어느새 거친 야생에 길들여져가는 남자들. 처음 웅덩이 하나만 나와도 그리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하더니만, 이제는 오히려 시원하게 물살을 가르며 달리는 쾌감을 알아간다. 볕에 그을고 면도도 하지 못해 시커먼 얼굴들처럼 어느새 야생에 어울리는 모습들로 바뀌어간다. 자연은 그렇게 인간을 길들인다. 시련을 주고 그 시련을 견뎌내면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선사한다. 누군가에게는 두렵고 꺼려지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일 수 있다.

서로 아옹다옹거리며 다투는 것도 당장 앞에 놓인 웅덩이며 진흙탕에 비하면 아무것 아니지 않은가. 지쳐 쓰러져 잠이 올 정도로 광대한 대지에 비하면 그 또한 별 것 아닌 것이다. 서로 놀리고, 또 서로 약올리고, 이제는 웃으며 받아준다. 여전히 즐겁지는 않지만 그조차도 여상하게 받아줄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이경규를 잡는 것이 김국진이라면, 김국진을 잡는 것은 전현무, 그런 전현무에 이를 갈면서도 끝내 웃고 마는 것이 김국진일 터였다. 여행지에서는 누구나 관대해지니까.

어렸을 적 스위스로 입양되었다는 한 여성 여행자와의 만남 또한 마치 오스트레일리아의 자연이 선물한 기적과도 같았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온 이들이었을 터다. 그러나 아주 잠깐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을 공유했다는 이유로 어느샌가 끌리고 알아본다. 동아시아인의 외모가 거기서 거기일 터지만, 그러나 한 눈에 마치 이끌림처럼 그녀가 한국인임을 알아본다. 우연이지만 마치 필연처럼. 그녀의 두 아이들과 함께.

아무튼 참 부러웠었다. 그동안도 팔바라팀과 킴벌리팀이 그렇게 부러웠었는데, 이제는 낙타를 끌고 한적하게 호주의 자연을 거니는 여행자가 그렇게 부러웠었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문명의 이기라고는 MP3플레이어 하나, 그것도 그 막막한 오스트레일리아의 대지를 걸어서 이동해야 한다. 낙타의 건강을 걱정해야 하는 것은 그가 유독 인정이 많아서가 아니라 낙타만이 그의 유일한 동반자이기 때문. 낙타마저 쓰러지고 나면 세상에 오로지 그 혼자 뿐이다.

하지만 좋지 않은가. 자신의 다리에 의지해 오스트레일리아의 자연을 체험하는, 아니 그 광대한 자연을 맞아들이는 체험은. 평생을 그렇게 살아도 좋을 듯하다. 낙타와 함께, 아주 작은 문명의 이기 하나로 나름의 문화생활을 즐기면서, 건강만 허락한다면. 여건만 허락한다면.

그러나 이미 차로 이동하면서도 체력적인 한계에 직면한 이경규와 김국진이 있기 때문에. 젊을 때와 같지 않다. 젊은 윤형빈이나 전현무는 바로바로 회복이 되지만, 나이가 들면 피로와 데미지는 몸에 오래 남아 있게 된다. 떠나려면 더 늦기 전에 떠나야 한달까? 낙타로 여행을 하자면 조금 더 일찍, 차로 여행을 떠나려 해도 더 일찍. 지금 당장 떠나자.

내내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화가 났다. 약이 올랐다. 왜 나는 저곳에 없는가? 왜 나는 지금 이 자리에 머문 채 저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는가? 여행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여행의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하도록 해 주었다. 너무나 생생하게.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이 허구임을 알기에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노래처럼. 팔바라팀과 여행하며 김태원이 곡을 쓰고 모두가 가사를 붙인 그 노래처럼 여행을 따나야 할 것이다. 올여름에는. 아니더라도 가까운 때에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아니더라도 아무곳에든. 그곳에서의 만남을. 여행을 떠나도록 충동질할 목적이었다면 대성공이었다.

성당계곡에서 울려퍼지던 "넬라 판타지아"를 떠올린다. 어느 허름한 텐트에서 기타 하나로 연주하며 가사를 붙이던 "베가 브라더스"도. 말로 다하지 못할 때 노래를 부르게 된다. 노래는 언어를 넘어선 언어다. 자연스럽게 어느새 흘러나오는 멜로디. 그리고 가사.

꿈은 현실로. 현실은 꿈으로. TV가 꺼지며 멤버들과 함께 필자 역시 현실로 돌아온다. 현실이 되기를. 꿈이 되기를. 지나치게 아름다운, 서럽도록 샘이 나는 꿈이었다. 감사한다. 그 행복함을. 부디.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