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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06.03 10:35

특수사건전담반 TEN "엘레지, 그녀가 죄인이 된 이유"

사랑하는 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에 대한 자책감, 여지훈에게 묻다

▲ 사진제공=OCN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언제부터인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본능이었다. 혹독한 자연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가장 저열한 본능. 이성으로 누르고 교육과 훈련을 통해 밀어내야 할 문명 이전의 원시의 본능이다. 뻔히 보이는 약점을 이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어떻게든 이용해서 이익을 얻어야 한다. 나 이외의 모든 존재는 단지 대상일 뿐이다.

범인 송화영(이희진 분)이 그토록 참혹한 유린을 당해야 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녀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녀가 노래를 부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이용해서 그녀를 블라인드 없는 사장실로 유인해서는 동물원 동물마냥 모여서 훔쳐보며 웃으며 저열한 농담을 일삼는다. 하기는 설사 그녀가 앞을 볼 수 있고 그같은 사실을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그녀를 무대에서 쫓아낼 수 있는 권력이 있었다.

송화영의 마지막 고백은 그래서 상당부분 진실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같은 스킨을 쓰고 같은 냄새를 풍긴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밀착해 있는데 최소한 상대가 자신이 사랑하는 강진욱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나중에라도 눈치채는 쪽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하물며 한 사람도 아닌 다섯 명이나 되는 남자였다. 그런 차이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지능에 문제가 있었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그와 같은 사실들을 애써 모른 체 하고 있었거나. 만일 그녀가 모든 의도와 진실을 알고 있다고 그들에게 밝히고 항의하거나 최소한 저항하려 했다면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한국사회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다지 많지 않다. 하물며 무대에 선다는 것은 더 어렵다.

그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사실을 안다 하더라도 그녀는 결코 저항할 수 없다. 따져물을 수도 없다. 경찰에 신고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아무 거리낌없이 죄를 지은 것이다. 피해자인 그녀 자신이 침묵한다면 누구도 자신들의 죄를 물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죄가 아니다. 설사 알더라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면 그 또한 죄가 아니다. 그들은 당당하다. 정의롭기까지 하다. 그래서 그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는 강진욱에게 잔혹해질 수 있다. 어차피 송화영이 침묵한다면 강진욱은 단지 폭행범에 불과하다. 강진욱에게 죄를 묻는다.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일상에서 너무 자주 흔하게 겪는 경우들이다. 굳이 장애인이라서가 아니다. 장애인이란 단지 개인이 가진 여러 약점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돈이 필요해서. 일자리가 간절해서. 당장 절실한 무언가가 있기에. 그래서 갑과 을이 나온다. 갑은 을에 대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된다. 성적인 유린이야 여성이라는 또다른 약점을 이용하기 위한 한 가지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은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고 그것을 쾌락이라는 형태로 확정하여 누리는 것이다. 어떤 죄의식도 도덕적인 자책감도 없다. 그렇게 사회가 만들어져 있다.

불과 여러해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어느 연예인의 자살을 떠올린다. 그것도 결국은 같은 메커니즘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평소 선량하던 마을어른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장애인 소녀를 집단으로 돌아가며 성폭행한다. 오히려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은 바로 그래서다. 멀쩡한 사람이 죄를 저지른다. 죄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가해자가 너무 멀쩡하니 차라리 피해자에게 탓을 돌리는 것이 더 상식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틈을 보인 탓이다. 조금의 빈틈만으로도 사람은 얼마든지 짐승이 되어 버린다. 그것이 이번에는 카페라는 한정된 무대로 바뀌었을 뿐.

강진욱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을 알기에 차라리 송화영은 자신을 탓한다. 죄를 지은 것은 그녀를 유린한 카페의 모두였을 텐데 그것을 방치한 자신에게로 탓을 돌린다. 강진욱을 위해서. 강진욱이 더 이상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갖지 않도록. 무엇보다 스스로 강진욱에 대한 미안함을 덜기 위해서. 그것은 죄가 아니다. 응징도 아니다. 단지 자신의 죄씻음이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아예 처음부터 아무일도 없도록 자신이 처신을 잘했어야 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강진욱마저 죽이고 마는 것은 그녀 자신의 무의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강진욱의 존재로 인해 그녀는 결국 힘겹게 견뎌오던 일상을 부수고 죄인이 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가장 그녀를 상처입힌 것은 강진욱 자신이었을 것이다. 사랑과 원망이 함께한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어떤 잘못도 없었다. 그녀에게 죄를 짓도록 만들었다. 그녀로 하여금 죄책감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강진욱의 죄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그녀를 위해 그녀를 대신해 분노했던 것 뿐이었다. 그럼에도 무력한 자신에 대해 미안해하며 도망치려 했던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돌아왔다. 정작 죄를 지은 것은 다른 사람들이었는데. 전혀 엉뚱한 사람들이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스스로에 상처입히며 발버둥친다. 그리고 서로 죽고 죽인다. 죽이려 한 자는 살고 살리고 싶어한 사람이 죽었다. 그녀의 발버둥은 그래서 슬프다. 그녀의 사랑은 그래서 안타깝다. 그녀를 사랑한 단 한 사람이 죽었다. 누구도, 심지어 그녀를 유린한 가해자들조차 죄인이 아니었을 텐데, 그러나 모든 죄에 관대한 세상은 유독 그녀에게만은 가혹했다. 죄를 짓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단 한 번 결심한 죄가 더 큰 비극이 되어 그녀를 오열케 한다. 그녀는 죄인이 된다.

그녀에게 다른 선택이 있었다면. 굳이 그런 수모를 참아내지 않고서도 가수의 꿈을 키우고 도전해 볼 수 있었다면. 굳이 그런 죄책감을 가질 것 없이 당당하게 사랑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었더라면. 억울한 것을 억울하다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 말할 수 있었더라면. 그녀가 아니더라도 현실에서 그와 같은 솔직한 표현들이 도리어 날카로운 칼이 되어 자신을 겨누게 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본다. 그것은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세상의 법칙이며 정의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죄인이 되었다. 그것에 거스르려 했기에.

어둠속에서 그녀는 강자였다. 모두가 그녀의 앞에서 공포에 떨고 있었다. 세상은 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녀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정의했다. 과연 어둠속에서 공포에 떨며 죽어가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평범한 일상조차 버거워 보이는 그녀가 그런 끔찍한 범죄를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던 그녀가 처음으로 세상에 대해 가져본 자신의 의지였을 것이다. 그조차 그녀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역시나 여지훈(주상욱 분)을 향한 메시지였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같은 죄책감을 갖게 만들었다는 자책. 사랑하는 사람을 죄책감에서 해방시켜주기 위해 송화영은 자신의 죄를 스스로 정리하려 했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다. 누구를 위해서? 결국은 누구를 위해서? 그러나 그것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남예리(조안 분)의 마지막 한 마디를 백도식(김상호 분)이 막는다. 그것은 이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굳이 누군가로부터 들어야 할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다. 깨닫는 것도 자신, 바로잡는 것도 결국 자신이다. 평생을 그 안에 갇혀 살더라도 그것은 오로지 스스로가 선택할 바일 것이다. 송화영은 죄인이 되었다. 여지훈의 선택은 과연 무엇일까?

어쩌면 악의조차 아닌 짓궂은 장난이었을 것이다. 앞을 보지 못하니까. 그래서 어떻게 해도 자신의 존재를 눈치챌 수 없을 테니까. 자신의 죄를 알아챌 수 없을 테니까. 죄조차 아닐 것이다. 그러나 송화영의 살의는 너무나 분명하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마음조차 살의에 잡아먹혀 버린다. 그녀가 죄인이 된다. 이희진과 붉은 드레스가 너무 잘 어울린다.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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