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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6.08 08:36

미스 리플리 "장미리가 주인공이다!"

캐릭터의 힘, 배우의 힘, 배우 이다해를 주목한다.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를 꼽으라면 역시 캐릭터, 관계, 사건일 것이다. 물론 이 셋을 모두 같은 비중으로 정교하게 규모있게 다룰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단편 하나 분량으로도 대하드라마를 만들어야 하기에 결국 어느 하나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캐릭터이거나, 관계이거나, 사건이거나. 대개는 캐릭터다.

<미스 리플리>는 제목 그대로 주인공 장미리(이다해 분) 개인에 모든 이야기를 집중하고 있는 드라마다. 가장 디테일하게 집요할 정도로 철저하게 장미리에게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장명훈(김승우 분)도, 문희주(강혜정 분)도, 송유현(박유천 분)도 오로지 장미리를 위해 그녀를 중심으로 존재하는 캐릭터들이다. 장미리가 있기에 이들도 의미가 있다. 그래서 재미가 있다.

사소한 부분은 그래서 무시할 수 있다. 어째서 고아 출신에 술집에서 호스티스로 일하며 인생의 바닥을 경험했던 그녀에게 세상은 그리도 만만한가? 하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세상이란 그렇게 힘들고 무서운 곳일 게다. 그렇게 쉽게 누군가가 좋아해주지도, 그렇게 때마침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지도 않는다. 하긴 장미리가 마침내 필요한 동경대 졸업증명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내주어서가 아니라 우연히 문희주가 동경대를 졸업한 사실을 기억해내고 그녀의 집을 찾아가 훔쳐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사소한 굴곡을 제외하고는 잘 풀리고 있지 않은가. 학력위조가 드러나려는 순간에조차 그녀는 장명훈을 유혹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또 한 번의 위기를 넘어서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주인공이니까. 그래서 주인공인 것이다. 그런 밑바닥 인생들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이유. 그럼에도 좌절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으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주인공의 선량함을 드러내기 위해서이거나, 아니면 그런 그이지만 기회만 주어진다면 누구보다 훌륭하게 더 대단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거나. 고단하고 힘든 삶이지만 항상 성실하고 충실하기에 부끄러움은 없다. 혹은 당장은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지만 기회만 주어진다면 누구보다 화려하게 비상할 수 있다.

장미리는 아름답다. 히라야마가 칭찬한대로 그녀는 영리하기까지 하다. 집요하고 강인하며 저돌적이다. 기다리기보다 먼저 나서서 쟁취하려 들고, 참혹했던 성장과정만큼이나 독심까지 갖추고 있어 필요한 때 주저하지 않고 행동을 결심할 수 있는 결단력까지 갖추고 있다. 확실히 어디에 가서든 성공할 수 있는 자질이다. 실제 장명훈도 그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좋은 학벌에, 마음먹으면 어디도 돌아보지 않는 집중력도 뛰어나고, 여자들한테는 쉽게 보기 어려운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근성도 있고, 상대가 뭘 원하는 지 알아야 한다는, 아니 그걸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상한 불안감까지. 그래요, 장미리씨의 그런 면이 그 어떤 일보다 우리 일에 적합하다는 생각에 입사시켰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는 동경대 출신이 아니었다. 동경대를 나왔다는 오해로 인해 겨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그러나 동경대 출신이 아니기에 이내 다시 내쫓길 위기에 몰려 있었다.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래서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일을 다 하지 못한 결과 대기발령까지 받고 만다. 원천적으로 그녀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당한 것이다. 과연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어떻게 자신의 앞에 놓인 위기를 극복할까?

극복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시청자로 하여금 장미리라는 인물에 이입하도록 만드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좌절한다. 그리고 절망한다. 분노한다. 내게도 그러한 기회가 주어졌다면. 내게도 단 한 번의 기회만 제대로 주어진다면. 단지 장미리의 경우가 극적 재미를 위해 조금 더 극단적으로 묘사되고 있을 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에는 그러한 불만과 원망이 자리하고 있다. 카타르시스인 것이다. 그래도 기회가 주어지고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니 멋드러지게 이루어내고 있지 않은가.

장미리로 하여금 대기발령을 받았다는 소식에 바로 한참 상사인 이사 장명훈을 찾아가 따지게끔 만든 그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상처이며 자부심이다.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했다고 하는 그녀의 컴플렉스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실력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자부심이다. 그녀을 지탱하고 있는 것들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의 내면에도 이와 비슷한 것들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다. 결국 나중에 지금의 행위들로 인한 책임을 지는 상황이 오게 되더라도 지금 당장은 그녀가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 어떻게든 그녀는 놓인 현실과 싸우며 자기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녀가 마침내 성공하고 자기를 증명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 과정에서의 사소한 디테일은 무시해도 좋은 것이다. 다만 과연 그러한 과정에서 장미리라는 인간을 얼마나 제대로 묘사해내고 있는가.

이다해라고 하는 배우에 대한 발견이고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연기는 정말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다른 어떤 표현도 찾을 수 없다. 문희주와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는 세상을 다 산 사람처럼 마모되어 버린 무감동한 표정을 보여주더니만, 다시 장명훈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는 진심이란 전혀 담겨 있지 않은 가식적인 웃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때로 보이는 마치 소녀같은 해맑은 모습까지. 히라야마에게 쫓기며, 그리고 자신의 거짓말에 쫓기며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모습에서 누구보다 밝고 순수한 웃음까지 전혀 어색함 없이 소화해낸다., 그렇게 장미리라는 복잡한 내면은 그녀로 인해 완성된다. 히라야마에 쫓기며 고시원을 나와 갈 곳 없이 버스정류장에 오도카니 앉아 있으면서 장명훈의 번호로 전화를 걸던 그 순간의 미묘한 표정의 변화는 과연 이다해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단순한 이용의 대상일까? 단지 이사라는 지위와 그가 갖는 힘이 그녀가 장명훈에게 접근하려는 이유의 전부였을까? 물론 힘이 있는 남자를 쫓는다는 것은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장명훈에 의해 결국 장미리의 학력위조사실이 덮어질 듯 보이는 그대로 그녀에게는 의지할 수 있고 보호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것은 그녀가 유우에게 거짓말을 하게 된 이유로써 장명훈에게 말한 내용과도 통할 것이다.

"진심으로 유우가 걱정되기 시작했어요. 진짜 저러다 아버지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그러고 나서 혼자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는 거지? 그 슬픔이 어떤 건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에요. 제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내내 혼자였잖아요."

그 순간에도 과연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그 순간에도 자기에게 유리하게 꾸며 거짓말을 한 것일까? 순간 그녀가 짓고 있는 표정조차도 안개에 가린 듯 모호하다. 진심을 이야기하는 듯. 그 순간에도 거짓을 꾸며내고 있는 듯. 마치 모든 것이 풀어헤쳐진 방심한 상태와도 같다. 진실에 거짓을 숨기고, 거짓에 다시 진심을 숨기고. 그녀와 같은 타입에게 진실과 거짓이란 둘이 아니다. 거짓도 진실이 되고 진실도 거짓이 된다. 과연 진심으로 그녀가 거짓으로 꾸미고 연기하려 했을 때 장명훈과 같은 사람이 그렇게 쉽게 넘어가고 했을까?

자꾸 장미리에게 눈이 가는 이유다. 장미리의 표정에, 눈빛에, 그리고 그녀가 보여주는 감정의 선과 흐름에. 어떤 내면이 있겠거니. 어떤 생각을 하고 있겠거니. 추측하고 상상하게 되고. 아마 사랑에 빠진 심정이 이러할까? 이다해는 참 아름다운 배우이기도 하다. 벼랑의 끝에 선 그녀의 위태한 불안이 보는 사람마저 전염시키는 모양이다. 장미리에 취하고 그녀를 연기하는 이다해에 취한다.

과연 그 끝은 무엇일까? 장명훈은 그녀의 휴식처가 되어줄까? 그녀에게 보호자가 되어줄까? 그녀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성공을 이룰 수 있을까? 그리고 그녀가 한국으로 들어온 이유인 어머니를 찾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진실과 마주했을 때의 그녀의 모습은? 거짓을 지우고 진실이 드러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악의섞인 사디스틱한 상상마저 자극하는 듯하다.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한 인물에게 초점을 맞춰 꾸려가는 드라마라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다른 복잡한 것 없이 오로지 장미리 한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이다해는 그러한 장미리라고 하는 무게를 확실하게 감당해내고 있다. 그녀가 아닌 다른 장미리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그녀가 아니고서 누가 장미리를 이렇게까지 표현해 낼 수 있을까? 이다해이기에 장미리도 있다.

배우란 어째서 아름다운 사람인가? 어째서 사람들은 배우에 열광하고 그들을 스타로 우러러 보는가? 배우란 극의 중심임을. 그들이야 말로 드라마의 주인공임을. 그리고 그런 장미리를 떠받치는 무수한 다른 배우들 역시. 그들이 있기에 장미리도 존재한다. 드라마가 존재한다. 배우의 존재에 취한다. 그런 드라마다. 바로 이런 것이 감동일 터다.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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