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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사회
  • 입력 2013.03.27 09:14

정의과잉사회의 초상, 문명이라는 이름의 야생과 본능의 공포

어째서 인간은 정의로울 수밖에 없는가?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문명 이전 인간은 야생에 있었다. 야생이란 자연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치열한 전장이다. 곳곳이 위험이고 마주치는 것이 자신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적이었다. 죽이거나 혹은 살거나. 태초의 인간은 그같은 야생에서 살아남아 지금의 문명을 일구게 되었다.

길고양이들은 사람의 발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사람에게 길들여진 집고양이들도 사람의 몸짓에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운다. 위험하지 않은가. 혹시 자기에게 위해를 가하지나 않을까. 알 수 없다. 과연 눈앞의 인간이 자신을 귀여워해서 쓰다듬으려 다가서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를 붙잡아 불을 붙이고 놀려 하는 것인지. 손에 들린 것이 먹으라고 주는 먹이인지, 아니면 자기에게 던지려는 돌맹이인지. 그래서 알아서 지레 피하고 본다. 본능이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알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이 위험한지 아닌지 아직 판단할 수 없다는 뜻이다. 위험할 수 있다. 그래서 경계한다. 만일을 위해 경계하고 대비를 한다. 최악의 순간을 염두에 두고 대상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며 다음을 준비한다. 인간에게 미지라 하는 것이 공포를 뜻하게 된 이유였다. 공포란 다른 말로 만일의 위험에 대한 준비일 것이기 때문이다. 긴장하고 집중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바로 반응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춘다.

문명을 일구고 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야생의 본능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는 귀신이 산다. 들리지 않는 침묵 속에는 알지 못하는 것들이 깃들어 있다. 인간의 인지가 닿지 않는 저 너머에 인간이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필경 인간에게 위해를 끼치는 것이다. 귀신이 그렇고, 도깨비가 그렇고, 악마가 그러하며, 막막한 저 우주의 너머에서 찾아올 외계의 침략자들이 그렇다. 어째서 하필 먼 외계에서 찾아오는 이방인들은 적의를 가지고 인간을 침략하고 지배하려 들까?

차라리 보이는 것이라면 상관없다. 그렇게 인간은 보이는 모든 위험을 스스로 극복해가며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제아무리 크고 사나운 맹수라 할지라도 결국 인간은 이겨냈다. 아무리 치명적인 질병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적인 자연의 재앙들까지도 인간은 어떻게든 힘과 지혜를 모아 그것들을 이겨낼 방법을 찾아냈다. 보이지 않을 때는 그렇게 두렵기만 하던 귀신이나 괴물들이 정작 정체를 드러내고 난 뒤에는 결국 인간에 의해 퇴치되고 마는 이유일 것이다. 안다면 방법은 있다. 몰라서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더 두렵다.

아주 오래전 작은 촌락을 이루고 살아갔을 때 인간에게 공포란 곧 자연이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 너머의 아직은 버겁기만 한 야생의 모든 위험들이 인간에게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같은 공포를 대부분 극복하게 되었을 때는 미지의 귀신과 도깨비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맹수가 사라진 대신 맹수보다 더 불가사의하고 더 위협적인 괴물들이 어둠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도시를 이루고 살기 시작하면서 그 도시의 어느 외진 곳에서도 그같은 괴물들이 살게 되었다.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 인간의 삶을 위협할 치명적인 존재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알 수 없는 형태로 살아간다.

도시란 이방인의 공간이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도 물론 있지만 도시를 이루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개 외지에서 흘러든 사람들이다. 아니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어도 수 만, 수십 만, 아니 수백 만을 넘어가는 도시의 인구 가운데 자신이 아는 개인이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타인이다. 알지 못하며 알 수 없다. 인지가 미치지 못하는 그곳에는 따라서 또다른 공포가 깃들게 된다.

산업화시대 영국의 런던에서 온갖 괴담들이 유행하게 된 이유였다. 전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정글로 만들고 정글의 숲속에 숨어 미지를 만들어낸다. 현실의 고단함이 그같은 미지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며 경계하도록 강요한다. 잭 더 래퍼와 같은 살인마가 존재하고,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기괴한 일들이 일어나며, 탐정인 셜록 홈즈는 온갖 기묘하고 잔혹한 사건들을 탁월한 지혜로써 해결해가게 된다. 영웅이 사는 곳도, 그같은 수많은 괴물과 악당들이 숨어 사는 곳도 바로 그같은 미지와 인지의 경계인 것이다. 영화나 소설속의 많은 이야기들은 그래서 밤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마녀사냥 또한 일상의 그늘에 존재하는 미지의 위협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집단적인 발작과 같은 것이었을 터다. 알지 못하는 그늘 뒤에 공포가 숨어있다.

사람들이 정의로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알지 못하니까. 알 수 없으니까. 그런데 위험하다. 그런데 꺼려진다. 현실이 불만스럽다.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들이 불편하고 거추장스럽다. 심지어 위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의 일상을 해치려 한다. 자신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다. 마땅히 그것들과 맞서 극복하고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겠지만, 문제는 아직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사람들로서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신경을 곤두세운다. 혹시라도 자신을 위협하려는 그것이 나타나게 된다면 바로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해서. 공포가 귀신을 만들어낸다. 두려움이 괴물을 만들어낸다. 도시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에게 정의란 그같은 위협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정의의 반댓말은 악이다. 자신을 위협하는 모든 부조리와 부조화와 모순이 곧 악이다. 그것을 공격하고 배제함으로써 안전해지려 한다. 다만 역시 구체적이고 이성적인 대안을 찾기보다 본능적인 공격성에 의존하고 마는 것은 아직 대상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사적이다. 악이라 단정짓고 공격부터 하고 본다. 어둠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온다면 사람들은 먼저 손에 들린 총부터 쏘고 볼 것이다.

과거에는 공산당이면 되었다. 어쩐지 수상쩍은 행동을 하는 모르는 타인이란 간첩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모든 것이 그들의 탓이다. 지금의 모든 문제들은 바로 그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지금도 하다못해 인터넷이 해킹당해도 그 원흉으로 북한이 지목되는 이유일 것이다. 북한이야 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며 원흉이다. 공산당이 모든 문제들의 발원지다. 행동이 수상하면 의심하고,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면 신고한다. 서울의 한 쪽 구석에는 그래서 흉악한 범죄자들과 함께 간첩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시대가 바뀌었다. 더 이상 공산당은 사람들에게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공산주의는 패배했고 북한은 화석이 되어가고 있다. 북한에 대한 혐오는 여전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미지의 대상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다. 북한의 실체는 드러났고 그를 대비한 논의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다른 공포가 필요하다. 특히 북한에 대해 실질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터넷세대들에게 있어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 자신을 둘러싼 불편한 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공포가 필요하다. '악'이다.

'악'은 실체가 없다. '악'이라 하기 때문에 악이다. 근절해야 하고 배제해야 하니 악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모든 폭력은 허용된다. 그리고 그러한 폭력을 통해 다시 위안을 얻기도 한다. 자신은 정의로우며 악과 맞서 그를 근절하고자 싸웠다. 그에 동참하는 다수가 있다. 다수가 힘이 되어준다. 다수가 증명이 되어준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은 옳다. 무엇보다 더 이상 자신은 위험하지 않다. 그래서 더욱 집단에 자신을 묻으려 하게 된다. 아니 오히려 그같은 안도를 얻기 위해 더욱 집단 속에 자신을 강조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두의 호응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공격하고 자극하고 다그친다. '악'은 그를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정의과잉의 실체일 것이다. 정의로운 것이 아니다. 단지 약한 것이다.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안다. 그것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도 안다. 그러나 그 실체를 모른다. 그 진실을 바로 보려 하지 않는다. 아무런 이해 없이 그같은 현실의 불만을 극복하기 위해 그 원인이 되는 가상의 공포를 만들어낸다. 어쩌면 실재하는 공포를 이용하게 된다. 모두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악과 맞서싸우는 가운데 모두의 안에서 스스로 안전해지기 위해. 정의롭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본능이다. 미지의 고도화된 현대사회에 대한 야생의 인간이 남겨준 유산이다.

무지와 감정이 만나면 정의가 되고, 무지와 정의가 만나면 맹목이 된다. 맹목은 절대화다. 자신에 대한, 그리고 자신을 지탱하는 모두에 대한 절대화다. 그렇게 정의는 만들어진다. 타진요 사태 때도, 최진실 루머에 대해서도, 그리고 이번 설경구 논란에 대해서도, 그래서 그들은 항상 정의를 이야기한다. '악'에 대해서 말한다. 그들은 항상 정의롭다.

물론 답은 있다. 해가 뜨면 된다. 날이 밝아 모든 것이 명명백백히 드러나면 된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그래서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더 이상 정의가 아닌 현실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따라올 것이다.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인문학일 테지만 안타깝게도 인문학은 돈이 되지 않는다. 치열한 경쟁은 모든 타인을 타자화시키고 더욱 자신을 고립시키고 만다. 고립은 고독을 불러오고 고독은 관계에 의지하도록 자신을 내몬다. 관계 속에 그들은 정의로운 자신을 강조함으로써 모두의 동의 속에 안전한 울타리를 세우게 된다.

유독 한국사회에서 이토록 인터넷이 뜨겁고 또한 잔인한 이유일 것이다. 인터넷이란 무의식의 공간이다. 무의식의 공포가 텍스트를 통해 가상의 공간에 현실화된다. 인간 또한 계량되어 버린다. 적의와 정의 또한 그렇게 실체를 갖게 된다. 그들은 겁에 질려 있다. 겁에 질려 잔인해지려 하고 있다. 그것이 문명사회에 그들의 투쟁이며 삶인 것이다.

인간은 진화했는가. 단지 형태만 달리했을 뿐이다. 맹수가 도깨비가 되고, 도깨비가 다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되고, 사회의 모순과 '악'이 되었다. 그를 맞서싸우는 인간은 '정의'롭다. 정의롭지 않으면 안된다. 여전히 인간은 문명이라는 야생에 살고 있다.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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