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사회
  • 입력 2013.03.13 08:59

'일베'의 이유, '무지와 위악의 그들만의 정의와 세상'

히틀러가 <나의 투쟁>을 쓴 이유

▲ 사진출처='일간베스트' 사이트 캡처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위악이란 곧 선에 대한 경멸일 것이다. 보편적인 선에 대한 아니 그 선을 추구하는 기존의 사회에 대한 분노이고 환멸이고 증오일 것이다.

무지는 몰이해를 낳는다. 몰이해란 곧 공포이고 증오다. 공포와 증오는 다시 무지와 만나 정의가 된다. 무지와 정의의 근친교배는 신념을 낳고, 무지와 신념은 다시 맹목을 낳게 된다. 맹목은 거칠 것 없음이다. 돌아보려고도 살피려고도 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정의롭다. 정의롭고자 한다. 그러나 세상은 불의로 가득차 있다. 항상 세상은 모순되며 부조리하다. 그래서 역사이래로 많은 철학자, 사상가, 지식인들은 그러한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바로 알고 이해하고자 노력을 기울여왔다. 물론 아직 누구도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있기에 세상은 여전히 이 모양이다.

문제는 그러한 엄밀하고 치열한 노력 없이 세상을 쉽게 단정짓고 정의내리고자 하는 무모하고 섣부른 시도일 것이다. 세상의 복잡하고 다양한 이면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단편적인 감정에만 의지해 판단하려고 든다. 알고자 하는 노력이 결여되었으니 당연히 이해 또한 결여되었을 테고, 이해가 배제된 대상에 대한 판단이란 맹목적인 감정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좋은 것은 당연히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은 당연히 나쁜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정의감은 나쁜 것에 대해 배제하고자 하는 시도로 이어진다. 혐오스럽고 불쾌한, 위험하기까지 한 그것들을 세상으로부터 추방하는 것이야 말로 정의다. 그것은 다시 신념이 되고 돌아보지 않는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바로 그 대표적인 저작이 바로 역사에 유명한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다.

그들이 선을 경멸하고 위악으로써 자신의 정의를 과시하려 드는 이유일 것이다. 어차치 세상은 모순과 부조리 투성이다. 이 사회는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다. 그 진실을 안다. 그 비밀을 내가 알고 있다. 그것은 우월함이다. 세상의 선과 정의에 대한 우월감이 그것을 비웃고 짓밟고 군림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세상은 너무나 단순하다. 선과 악이 있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고, 그 가운데 나쁜 것을 배제한다면 세상은 다시 좋아지게 된다. 바로 그 나쁜 것들이야 말로 이 세상을 나쁘게 만드는 것들인데, 사회가 그것들을 방치하고 있으니 그 사회가 추구하는 선 또한 그를 방조하고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란 과연 좋기만 한 것인가? 인권과 자유, 평등, 여타 인간이 추구해 온 보편적 가치라는 것이 과연 반드시 옳기만 한가? 그렇게 쉽기만 하다면야 더 이상 어떠한 이념도 사상도 가치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 한 가지 답만 있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인데.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하고 무조리한 문제들로 시끄럽기만 하다. 그래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좋은데 여기에서 한 발 더 나가 쉽게 단정지으려 하면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차피 다 소용없고 오히려 그것들이 더 큰 문제다.

민주주의란 시끄럽다. 자유란 혼란스럽다. 평등이란 무례하다. 인권은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인권을 강요하려 한다. 유아적 정의가 만들어내는 세계란 매우 좁다. 말했듯 더 이상의 보다 깊고 넓게 다양하게 세상을 보고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좁은 세계는 완결되어 있으며 완벽한 법칙에 의해 흠결없이 유지된다. 그것을 유지하는 것 또한 그같은 단순하면서도 완벽한 자신들의 정의일 것이다. 그에 비하면 여타의 기존의 가치란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고 효율까지 떨어지는 쓸데없는 것들이다. 그들의 자신들의 정의나 그 정의를 주장하는 근거에 대한 확신에는 그같은 자신감까지 더해진다. 충분히 자신들은 기존의 것들을 비웃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

'일베'란 물론 특정한 사이트와 그 사용자들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속에, 그리고 지금도 현실에서 흔히 발견하고는 하는 일반적 현상이기도 하다. 파시즘이란 근대의 산물이었는가? 그보다는 아직 남아있던 전근대의 잔재가 무지와 방심에 기대어 단지 근대를 치장하려 한 것은 아니었는가? 보편화된 세계를 보지 못하는 편협함과 이성적 사고가 결여된 감정에 대한 객곽화와 절대화가 근대라고 하는 형식을 빌어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매우 주관적이고 직관적이며 즉흥적인 정의가 근대의 문법을 빌어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진실로 확정된다. 그렇게 믿어진다.

파시즘이란 다시 말해 매우 쉬운 것이다. 고민이 필요없는 것이다. 나쁜 것을 쳐내면 된다. 유해한 것들을 도려내면 된다. 문제가 되는 것들을 따로 격리하고 배제한다면 더 이상 문제가 될 것이 없어진다. 학교폭력이 문제가 되면 그 가해자만을 따로 엄벌에 처하고, 흉악함 범죄가 일어나게 되면 그 범죄자에 대해 가혹한 형벌로써 일벌백계하고, 경제가 안좋다면 그에 저해되는 요소들을 엄격히 제제하여 문제를 제거한다. 더 이상 아무런 노력도 고민도 필요없다. 이렇게 쉬운데 어째서 사람들은 그리 고민하고 또 갈등하는가.

그토록 논란이 되고 있음에도 오히려 '일베'에 이끌리는 특히 젊은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만큼 유혹적이다. 쉽다는 것은. 굳이 배우지 않고도 충분히 알 수 있으며, 노력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말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다. 심지어 그것이 정의다. 그를 위한 무대까지 만들어졌다. 인간의 가장 큰 장점인 커뮤니케이션이 그 관계를 심화시켜준다. 외롭지 않다. 일베는 어떤 형태로는 앞으로도 계속 커지게 될 것이다.

하기는 '일베'가 처음은 아니었다. 과거 '디시인사이드'의 폐인문화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과 얼마전 있었던 '타진요' 사태 역시 그같은 한 일면이 만들어낸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일베'라고 하는 하나의 핵을 형성해 융합을 시도하고 있을 뿐. 그로부터 뻗어나온 가지들이 인터넷 이곳저곳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시도는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어느 사회에나 있다. 다만 그것이 주류로까지 성장하는가. 아니면 단지 룸펜들의 넋두리로 끝나고 마는가. 사회의 건강성은 바로 거기에 달려있다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과연 건강한가. '일베'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우리 사회의 건전함이 더 문제인 것이다.

상당히 심각하기는 하다. 여러가지로 눈쌀을 찌푸리게 되는 것들이 많다. 그것을 수용하는 반응들 역시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한다. 보편의 선과 정의란, 윤리와 가치란 그만한 이유가 있기에 모두가 지키고 추구하고자 하는 것일 텐데. 무지란 그래서 무섭다. 게으르기까지 한 무지는 그래서 악과도 같다. 불관용에 관용은 없다. 관용이란 공존을 즉 존중을 말할 수 있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들의 무례는 그런 것들에 대한 경멸을 뜻한다.

정치적인 성향이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 그 자체가 문제다. 그들의 위악과 독선이, 그것으로 인해 피해입고 상처입는 이들이 문제인 것이다. 정치적으로 접근하려 하면 오히려 답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아직은 괜찮다. 그러나 위험하다. 경계한다.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