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03.12 09:08

최고다 이순신 "이순신과 이순신, 논란의 이유에 대해..."

이순신은 오직 하나, 드라마의 의도가 논란의 이유가 되다.

▲ 사진제공=에이스토리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이름이란 곧 기호다. 기호란 또한 그 수단인 기표와 그 목적일 기표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기표란 인지의 영역이고 기의는 인식의 영역이다. 아마도 아이의 부모는 자신들의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구분짓기 위해 고심해서 이름을 지어붙였을 것이고, 어느새 아이와 관계를 맺게 된 많은 사람들은 그 이름을 통해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을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그래서 하나하나의 이름은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아마 이번 KBS의 새주말드라마 <최고다 이순신>과 관련하여 일고 있는 논란의 이유일 것이다. 아니 사실 이런 논란들이야 말로 <최고다 이순신>이라는 드라마가 기획되고 실제 제작되게 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400년 전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초유의 국난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구국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 충무공 이순신이 활약하던 바로 같은 시기에 그의 휘하에도 한자만 다른 무의공 이순신이 존재했었다. 그리고 드라마에서도 20대 초반의 취업을 걱정하는 어느 평범한 젊은 여성이 같은 이름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다.

과연 묻게 된다. 이순신이란 충무공 이순신인가? 아니면 취직을 걱정하는 어느 평범한 젊은 여성을 뜻하는가? 그래서 이번에 문제가 된 장면이나 대사들도 나오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름은 같다. 그러나 그 대상은 전혀 다르다. 이름을 통해 대상을 인지하고 인식하게 되는데 그 대상이 다름으로써 기호적인 혼란이 오게 된다. 익숙하다면 당연히 전혀 거리가 먼 젊은 여성의 이름으로도 '이순신'을 인지하고 쓸 수 있을 테지만,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혼란이 사뭇 당황스럽고 얄궂기까지 하다. 그래서 무심코 말하게 된다.

"당신이 (그) 이순신인가?"

그런 의미다. 독도나 지키라는 것은. 100원짜리라 부르는 것은.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통해 익숙지 않은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과정에서 보다 익숙한 역사속 인물을 매개로서 사용하다 보니 그 혼란이 말로써 표현되는 것이다. 대상은 젊은 여성인데 역사속 인물을 비교하여 그 위화감을 해소하려 시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독도를 지키라'는 말은 역사속 '이순신'을 전제한 말이지만 결국 역사속 '이순신'과 같은 이름을 갖는 눈앞의 젊은 여성에 대해 자신의 어색함을 표현한 말이며, '100원짜리' 역시 역사속 '이순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만만한 대상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빗댄 비하와 조롱의 표현인 셈이다.

사실 굳이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흔히 마주하게 되는 장면들이기도 하다. 어렸을 적 친구 가운데 하나가 당시 북한군 인민무력부장이던 '오진우'와 같은 이름을 쓰고 있었다. 당연히 주위에서는 단지 이름만 같을 뿐 같은 '오진우'가 아님을 알면서도 둘을 동일시하며 유희를 즐겼었다. 그렇다면 당시 친구 '오진우'에게 했던 많은 짓궂은 말이나 행동들은 북한군 인민무력부장이던 '오진우'를 대상으로 한 것들이었을까. 하지만 역시 드라마에서도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들으며 역사속 '이순신'을 떠올리고 마는 것처럼 시청자 역시 '이순신'이라는 이름에서는 성웅이라 추앙하는 역사속의 충무공 이순신을 먼저 떠올리고 마는 것이다. 표현의 목적은 그것이 아닐지라도 수단이 그러하기에 보다 강하게 각인된 기호가 먼저 작용하고 만 것이다. 역사속 '이순신'을 빗댄 것이지만 그조차도 '이순신'을 향한 것이다. 역시 기호의 혼란이다.

하기는 지금의 논란들이 과연 옳다면 처음부터 <최고다 이순신>이라는 드라마는 만들어져서는 안되었을 것이다. 굳이 주인공의 이름이 이순신이어야 하는 이유부터가 역사속 이순신과 전혀 다른 현실의 젊은 여성이 단지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겪게 되는 여러 헤프닝들을 의도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역사속의 같은 이름을 가진 위대한 이와 비교될 수 없을 것이기에 그로 인한 부조화는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통해 주인공에게 비난과 조롱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것이 감당하기에 너무 큰 이름을 가졌기에 겪게 되는 주인공의 고난이었을 것이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바로 그 장면들처럼 말이다. 설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이순신'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주인공을 떠받들고 어려워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또한 부조화와 모순을 보여주고 말 뿐이다. 어느 쪽이든 문제가 된다.

결국 이순신이라는 이름이 현대의 한국인에게 어떤 의미로, 얼마만큼의 크기로 존재하는가 보여주는 한바탕의 헤프닝일 것이다. 거의 신성불가침이다. 무조건반사다. 이순신이라는 이름에 무조건적으로 반응하고 본다. 그 반응은 그 이름 뒤에 가려진 또다른 같은 이름을 가진 젊은 여성에게까지 미치지 않는다. 말했듯 드라마의 기획의도일 것이다. 너무 큰 이름에 가려져 그것이 짐이 되어 버린 가엾은 젊은 여성의. 그래서 다시 헤프닝은 일어난다.

어쩌면 경솔했던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기호의 사용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작가도 경솔했고, 극중 주인공의 부모도 경솔했다. 이름을 지나치게 크게 지으면 자식이 고생한다. 그 이름에 반응할 사람들에 대해서까지 고려해서 이름을 지었어야 했다. 그런 것까지 고려해서 장면을 설계하고 내용들을 구성했어야 했다. 어찌되었거나 보통의 대중을 상대로 한 통속드라마 아니던가. 통속이란 보편의 일반적인 감정을 뜻한다. 그렇더라도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받아들일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이순신이라는 이름이 익숙한 것만 생각했지 친근한 것을 넘어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드라마 자체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그다지 큰 기대가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주연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조역과는 다르다. 주인공이 확실히 드라마의 중심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드라마는 산으로 가고 어디론가 표류해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게 된다. 설마 이런 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필자 자신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지나치게 통속드라마의 문법을 따르려는 모습이 진부하게 여겨지고 있었을 뿐이다. 이 또한 그래서 흥미롭다. 재미있다.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