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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02.02 11:57

드라마 '대풍수'를 통해 보는 고려와 조선의 가족관계 변화

계부와 계모, 혹은 양부와 양모를 의붓이라 칭하는 이유

▲ 사진제공=SBS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드라마 <대풍수>를 보고 있으면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이성계의 둘째 아내인 강씨부인을 '어머니'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사소한 고증의 오류일 것이다. 조선 전기까지도 과연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다른 아내에 대해서까지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해야 하는가를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조선후기까지도 전처의 자식과 계모와의 사이란 여전히 어렵기만 해서 그를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었을 정도다.

낳아준 부모가 아닐 때 그 앞에 '의붓'을 붙여 부르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부모는 물론 형제에 대해서도 그렇게 부른다. 의붓아버지, 의붓어머니, 의붓형, 의붓누이, 여기서 의붓이란 의부義父+ㅅ이다. 한 마디로 의리로 맺어진 아비라는 것인데 그것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천륜을 대신한 인륜의 관계를 정의하는 접두사로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의모義母가 아닌 의부인 것일까? 전통사회에서 의붓아버지를 만나기보다 의붓어머니를 만나기가 더 쉬웠을 텐데. 조선 이후로는 여성의 재가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은 이 또한 고려로부터 비롯된 모계사회의 흔적이라 할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얼핏 이해가 되지 않을 테지만, 고려사회에서는 부부 가운데 어느 한 쪽이 사고를 당하거나, 혹은 서로 이혼하여 갈라섰을 때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 쪽에서 아이를 맡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라 어머니가 병으로 죽거나 해서 부재할 때 아버지가 아이들을 맡아서 기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친정 - 즉 외가에서 아이들을 데려다 길렀다. 어머니가 재가를 할 때도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갔으니 고려사회에서는 의붓어머니를 만나기보다 의붓아버지를 만나기가 더 쉬웠던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상식과는 다르게 고려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버지가 같은 경우보다 어머니가 같은 경우에 더 우애가 깊었다. 당연했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데려갔다. 어머니가 데려가서 새로운 아버지에게서 낳은 아이들과 함께 기르고 보살폈다. 그에 비하면 아버지의 다른 자식들과는 굳이 일부러 만나려 하지 않는 이상 만날 일이란 거의 드물었다. 신돈이 죽을 때 그의 아버지가 다른 동생인 강성을이 함께 죽고, 염흥방의 아버지가 다른 형인 이성림 역시 염흥방이 숙청될 때 함께 처벌받고 있었다. 반면 어머니가 다르고 단지 아버지가 같을 뿐인 형제들 사이에서는 서로 결혼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니, 고려 중기 이후 유교적 가족질서를 강조하기 시작하며 이를 금지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고려 후기에나 가서야 정착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어머니가 같아야 형제지 아버지만 같아서는 형제가 아니다. 더 나아가 단지 아버지의 아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낳아주지도 않은 여자를 두고 어머니라 부를 이유란 없었다.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더라도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다른 아내를 섬기거나 보살필 이유 또한 없었다. 하긴 굳이 전처의 자식들이 신경써주지 않더라도 자신이 알아서 자기의 살 길을 찾았을 것이다. 조선에 들어와 가부장적 질서가 강조되던 와중에도 그같은 전통적 가족관계는 여전히 위력을 발휘해서 조선중기, 아니 조선후기에 들어서까지 전처의 자식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많은 후처들에게 노후를 대비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이를테면 전처의 아들에게 자신의 조카나 다른 가까운 친척의 여성을 중매하여 전처의 아들과 직접적인 인척관계를 맺는 것이 그 한 가지 방법이었다. 비록 배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그 아내가 자신의 친척이니 늙어 혼자가 되어서도 버림받지 않고 웃어른으로 예우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방책은 되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무려 조선후기인 18세기 이후까지 조선사회에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아내이니 어머니라는 전통의 관념이 의외로 그렇게 오래된 전통은 아니었던 셈이다. 오히려 전통사회에서는 아버지쪽의 친가보다는 외가쪽이 더 가까웠고 아버지의 친척들보다는 어머니의 친척들과 더 유대도 깊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전통의 가족관념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참고로 조선에서 유독 서자를 차별하게 된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같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어머니까지 같은 것은 아니었다. 남편의 자식이지 아내의 자식은 아니었다. 본처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더구나 출신까지 비천한 다른 여자에게서 낳은 자식들을 자기 자식들과 똑같이 대우하고 싶을까? 조선후기로 가면서 오히려 가부장적 가족관계가 강화되면서 서얼에 대한 차별이 철폐되거나 완화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자식은 아버지의 자식인 동시에 어머니의 자식이기도 하다. 아내와 그의 친정의 입장을 생각했을 때 외도하여 자식을 낳는 것은 용납해도 그를 똑같은 자식으로서 인정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과연 1차 왕자의 난 당시 방번과 방석 등 자신의 형제들을 죽이면서 태종 이방원은 그들에 대해 형제로서의 정을 느끼고 있었는가? 그에 비하면 2차 왕자의 난 당시 이방원은 직접 자신과 창칼을 겨누었던 사이임에도 형인 방간을 유배하는 것으로 끝내고 있었다. 방번과 방석의 생모인 신덕왕후에 대한 이방원의 저주에 가까운 증오는 그렇게 설명된다. 아버지의 아내일 뿐 자신의 어머니는 아니다. 반면 광해군은 자신의 생모도 아닌 인목대비를 폐서인한 일로 해서 왕위에서 내쫓기고 있었다. 역시 변화된 조선전기와 중기의 가족관계를 보여준다 하겠다.

부부가 서로 헤어지더라도 자식은 어머니가 챙긴다. 남편은 차라리 다른 여자의 다른 남자와 낳은 자식들을 자기 자식처럼 거두어 기른다. 자식은 어머니를 따르고 남자는 아내의 자식들까지 남편으로써 거두어 기른다. 자신을 거두어 먹이고 입히고 기르고 가르치는 남자는 아버지라 할 만하지만 단지 아버지와 함께 살 뿐인 여자를 어머니라 부를 수는 없다. 그래서 의붓義父이었다. 이제는 지나가 버린 오랜 시대의 흔적이라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 드라마 <대풍수>에서 같은 어머니의 아들들이기에 스스로 형제이고자 하는 이정근과 목지상의 관계는 매우 고증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가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어머니가 거둔 자식이고 그리고 어머니가 낳은 자식이다. 그들은 그래서 아버지가 달라도 형제다. 심지어 낳아준 어머니가 달라도 형제다.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자식이란 오롯이 어머니에게 속한다. 지금은 아버지에게 속한다. 상전벽해라 하겠다. 오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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