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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01.31 16:19

전우치 "마숙의 죽음과 출생의 비밀, 그러나 밋밋하다."

고조되어야 할 때 고조되지 않는 감정이 허탈함과 체념을 불러오다.

▲ 사진제공=KBS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바로 이런 것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굳이 그 장면에서 마강림(이희준 분)의 출생의 비밀이 나왔어야 했던 이유란 무엇일까? 뜬금없었다. 놀랍지도 않았다. 단지 황당했을 뿐. 어느 콩트코미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침입자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눈 먼 칼에 맞아 허무하게 죽어가던 보스가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던 부하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실은 내가 네 아비다."

바로 직전까지도 아무런 암시도 예고도 없다가. 그렇다고 그것이 이후의 전개에 있어 필연적이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큰아버지라 부르던 아버지가 죽었다. 큰아버지라 부르며 따랐던 이가 사실은 자신의 친아버지였다. 그런데도 아버지라 한 번 불러보지도 못하고 - 아니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는 그 순간에조차 그는 습관처럼 그를 '백부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여자가 그런 아버지를 죽였다. 죽어가면서까지 자신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려 했던 그를 죽이고 말았다. 그저 눈물 몇 방울 흘리고 말 일이던가.

폭풍이 휘몰아칠 것이라 생각했다. 애정이 깊을수록 원망도 깊다. 증오 또한 깊어진다. 잠시는 냉정할 수 있어도 결국 누르지 못한 감정이 폭발하고 마는 순간이 오고야 말 것이다. 더 이상 그에게 지시와 명령을 내리고 멋대로 튀어나가지 못하도록 눌러줄 그 존재가 사라지고 말았다. 좌의정 오용(김병세 분)는 단지 잠시 필요에 의해 서로를 이용하고 이용당해주는 관계에 불과했었다. 그나마도 오용이 궁지에 몰린 마강림을 외면함으로써 그 의리마저 끝나고 말았다. 무엇보다 마강림에게는 죽음을 앞둔 마숙으로부터 전해받은 도력이 있다. 힘이 있는데 더 이상 마강림이 참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를 위한 장치라 생각했었다. 죽음에 이르러 마숙이 전혀 뜬금없이 마강림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밝힌 자체가 결국 마강림을 폭주케 하기 위한 의도된 장치였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아들이라고 더 살갑게 대한 것도, 그렇다고 더 엄격하게 대한 것도 아닌 그저 남보다 조금 나은 큰아버지와 조카 사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었다. 그런데 아들이라니. 그러나 시청자가 받은 느낌보다도 마강림에게는 전혀 아무런 느낌도 없었던 모양이다. 눈물만 조금 흘리고 만다.

차라리 오용에게마저 버림받은 채 왕의 앞에까지 나가 국문을 받을 때 모든 것을 뒤엎으려 했다면 납득이 갔을 것이다.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는 사이 전우치(차태현 분)와 그 무리들에 의해 기껏 이루어놓은 것들이 무너져가는 현실에 분노하여 일어나는 것도 좋았을 것이다. 옥을 부수고 나와 자신을 배신한 오용을 죽이고 왕을 인질로 삼아 궁궐을 장악한다. 조정의 중신들을 어르고 달래며 전우치와 마지막 싸움을 시작하기까지 그렇게 짧지만 자신만의 천하를 조선이라는 현실 위에 세우게 된다. 비천한 무당의 자식으로 태어난 마숙(김갑수 분)과 그런 자신의 출신으로 인해 아버지이고 아들이라는 사실조차 밝히지 못했던 마강림이 조선의 왕과 뭇사대부들 위에 우뚝 군림하여 선다. 파멸의 순간처럼 그 짧은 영광은 화려했을 터다.

그러나 아니었다. 왕이 체포하여 가두라 명하자 마강림은 순순히 그 명령에 따르고 있었다. 얌전히 옥 안에 갇힌 채 둥개(신승환 분)가 찾아오기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숙과 자신이 일군 조직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전우치에 대해서도 옥에서 나오기 위한 방법으로 오용을 찾아가고 있었다. 도대체 이렇게 냉정하고 침착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떻게 율도국에서는 사소한 이유로 그런 끔찍한 살겁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인지. 그러나 반면 그런 마강림의 냉정함이 자칫 비장해질 수 있었던 마숙의 죽음과 마숙과 마강림 자신의 관계에 대한 놀라운 비밀마저 흐지부지 퇴색시켜버리고 말았다. 이제 와서 마강림이 분노한다고 친아버지의 죽음을 - 그것도 친아버지의 남은 도력을 자신이 모두 흡수하여 죽음을 도운 그 끔찍한 순간들이 다시 되살아나겠는가. 절정의 순간에서 그렇게 드라마는 한 걸음 물러서 버리고 말았다.

항상 지적하는 것이다. 바닥을 쳤으면 최고점까지 치고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최고점까지 치고 올라갔으면 이번에는 최저점을 찍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산이 가파를수록 그 절정에서 더 큰 감동과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계곡이 깊을수록 그 바닥에서 한없는 슬픔과 분노와 절망, 좌절을, 그렇기 때문에 다시 올라가고자 하는 간절한 욕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없었다. 내려갈 때도 조금씩 단계를 밟아가며 지쳐버린 나머지 포기하도록 만들고, 올라갈 때도 쉬엄쉬엄 천천히 올라가며 이곳에 꼭데기인가도 모르게 만들어 버린다. 이제 와서 마강림이 분노하고 마강림과 전우치가 부딪힌다고 어떤 극적인 짜릿함이 있겠는가.

조금은 자극적이어도 좋다. 드라마란 원래 자극적인 것이다. 짜릿한 쾌감은 불쾌감의 다른 느낌이다. 너무 친절하다. 너무 착하다. 너무 착한 나머지 심지어 악역인 마강림마저 일정한 선을 넘는 것을 꺼려한다. 밋밋하다. 마지막 순간에마저 이래서야 마숙도 죽고 없는 지금 마강림과 전우치의 대결에 대한 기대가 생길리 없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전우치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마저 차라리 예능에 나와 개인기를 선보이는 듯하다. 맥이 끊긴다.

이희준에게도 벌써 몇 번이나 지적하고 있었을 것이다. 보다 과장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라. 억누를 필요 없다. 악역이다. 전우치의 반대편에서 주인공이 갖는 무게 만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야 하는 것이 악역의 역할이다. 연기는 훌륭하지만 그 순간 마강림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후로도. 최소한 마강림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해주었어야 했다.

미미하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못하고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하지 못한다. 공포의 순간에 공포를 느끼기보다 허탈함을 느낀다. 감정의 극치를 경험하지 못하니 감정의 정화조차 없다. 카타르시스가 없다. 밋밋하게 그저 흘러갈 뿐이다. 완만한 산등성이처럼 오르는 줄도 모르고 오르다가 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내려간다. 벌써 마지막이 다가오는데. 안타깝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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