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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7.22 15:46

넝쿨째 굴러온 당신 "방장수 부자의 실수,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다."

▲ 사진='넝쿨째 굴러온 당신' 포스터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실제 일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가까운 사람 둘이 서로 싸운다. 싸움 끝에 감정이 틀어져 다시 보기가 어색하고 민망하다. 중간에서 화해를 시키려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만나서 얘기는 해보도록 하자. 선의의 거짓말을 한다.

"그쪽에서 굉장히 미안해 하고 있더라구. 잘못을 사과하고 싶어하던데?"

상대가 먼저 잘못했다고 하는데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끝까지 고집을 세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착각을 한다. 저 말을 듣고 자기도 너무했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사과하고 화해하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만 전제가 붙는다. 일단 먼저 상대편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싶어하니 내가 마음 넓게 그것을 받아주려 한다.

분명 상대가 먼저 더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하지만 사과를 하려 한다.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사과를 받아주려 한다. 생각해 보니 자기도 아주 잘못한 부분이 없지는 않다. 여기서 전제해야 하는 것은 상대가 자신의 잘못을 먼저 인정하고 사과하려 한다는 부분이다. 그에 대해 관용을 보이는 차원에서 자신도 사과하겠다는 것이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서가 아니다. 그런데 정작 상대가 미안해하고 사과하고 싶어한다던 말이 거짓말이었다. 오히려 역효과만 나고 만다.

여전히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대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사과를 한다면 상대가 먼저 사과해야 한다. 용서를 구한다면 상대가 먼저 굽히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책임도 상대가 먼저 더 크게 져야 한다. 그런데 단지 말 몇 마디에 자기가 먼저 잘못을 인정한 것이 되어 버렸다.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자존심이 상한다. 더구나 남편이다. 자신을 가장 지지해주고 응원해주어야 할 남편이 정작 며느리와 시어머니 앞에서 자기가 원치 않는 인정과 사과를 하도록 만들고 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배신감과 상처입은 자존심으로 인해 충분히 화해할 수 있는 일마저 고집을 세우도록 만든다.

어째서 내 잘못이라 말하는가?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더라고 멋대로 말하는가? 차라리 남편으로써 전적인 위로와 지지를 보내느니만 못한 것이다. 아내의 주장과 입장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대신 아주 안 볼 사이도 아니니 관용을 보이라 말한다. 역순이다. 어머니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설득한다. 아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아내의 판단을 가리는 집착과 고집을 충분히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여유를 가지고 돌아보도록 만든다. 상처를 가지고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서러운 것이지, 인정받고 위로받을 수 있다면, 지지까지 받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서러움은 상당히 덜게 된다. 여유가 생긴다.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누군가 떠밀어서 되는 것은 안된다. 하물며 속기까지 하고 있다. 믿었던 남편에게 속아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원하지 않는 사과까지 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닌 남편에 의해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 그것이 다시 상처가 된다. 차라리 남편이라는 든든한 아군을 두고 만족할 만큼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아파할 수 있다면 여유를 되찾을 수 있다. 평안을 얻고 나서 여유를 가지고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생길 수 있다. 감정은 극한에서 정화된다. 억지로 꺾거나 틀어버린다면 덧나기 쉽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경우라면 그 덧난 자리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아닌 남편 방귀남(유준상 분)과 방장수(장용 분)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는 것이리라. 원래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법이다. 그런 이유다. 자기 연민은 또한 치유의 과정이다.

그렇게밖에 보고 듣고 배우지 못했다. 그렇게 겪으며 살아왔다. 자기연민이다. 자기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불쌍히 여겨주기를 바란다. 지지해주기를 바란다. 자식 앞에서. 남편 앞에서. 그리고 정작 그로 인해 상처입은 며느리에게도. 응석이다. 엄청애(윤여정 분)의 말 그대로다. 가족이기에 응석을 부린다. 시어머니(강부자 분)와 남편에게 부리지 못하는 응석을 그나마 만만한 며느리에게 부린다. 그동안에는 딸인 방일숙이 그 대상이었다. 상처입는 사람이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어째서? 자기가 가장 불쌍하니까 자기 역시 시어머니로부터 그렇게 당해왔다.

사실 이 또한 많은 가정에서 보이는 모습 가운데 하나다. 우리 사회의 많은 어른들이 오히려 젊은 세대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동정은 존경과는 거리가 멀다. 연민 또한 인정과도 거리가 한참 멀다. 자신이라고 하는 인격을 인정받기보다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기억들을 인정받고자 한다. 세대갈등의 시작이다. 과거에 머물려 하고, 그 과거에 머문 자신을 불쌍히 여기기를 기대한다. 그러면서도 존경받기를 바란다. 지금을 말해야 한다. 지금을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방일숙(양정아 분)이 마침내 엄청애로부터 인정받는 것도 엄청애로 인해 상처받았던 과거의 기억이 아닌 현재의 매니저로서 충실한 자신의 모습이었다. 우리 사회의 또다른 단면을 드라마는 보여준다.

그같은 엄청애의 자기연민에 며느리와 화해하도록 선의에서 그랬다고는 하지만 엄청애가 먼저 잘못을 인정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으니 자기가 가장 불쌍해야 하는데 며느리인 차윤희(김남주 분)가 더 불쌍하다. 자기가 오히려 며느리인 차윤희를 동정해야 한다. 인정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차윤희 역시 일방적으로 자신을 이해해달라는 엄청애의 입장에는 절대 동의하지 못한다. 상처입은 것은 자신이다. 자기가 가장 상처입었다. 인정받고 싶다. 상처입고 소외당하는 것보다 서러운 것은 없다. 그런데 여전히 엄청애는 자기가 옳다고 말한다. 남편인 방귀남은 어머니인 엄청애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다시 상처가 된다. 상처가 덧난다. 다행히 그녀는 현명하다. 엄청애 또한 단지 잠시 뒤틀려 있을 뿐이다.

마침내 차세광(강민혁 분)과 방말숙(오연서 분)의 사이를 누나 차윤희에게 들키고 말았다. 차세광의 누나에 대한 마음이 절절하다. 무서운 것은 차윤희의 폭력이 아니라 그녀의 사랑이었다. 차세광이 진정 겁내는 것은 차윤희의 폭언이 아닌 그녀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었다. 가족 사이란 그렇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무서워하고 겁낸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가장 무겁다. 그 무게를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방말숙에 대한 마음이 깊다.

건전한 커플일 것이다. 그보다는 가족드라마라는 한계일 것이다. 그렇게 차윤희에게 들키고는 둘이 도망쳐서 고작 간다는 곳이 바로 찜질방이다. 누나와 오빠는 열심히 불순한 상상력을 키우며 자신들의 과거를 추억하고 있는데 그들은 바로 찜질방에 갔다가 각자의 어머니의 집으로 가서 편안히 밤을 보내고 만다. 시간대만 조금 늦은 시간대로 옮겼어도 상당히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었을 텐데. 아무리 봐도 시대착오적으로 순수한 젊은이들이다. 이리 애절한 사랑이야기도 꽤나 오랜만이지 않은가.

천재용(이희준 분)과 방이숙(조윤희 분) 커플도 비로소 한 걸음 전진하려는 모양이다. 오해하고 체념하고 질투하고 그리고 다시 만난다. 멋대로 오해해서 방이숙을 떠나보내고, 체념하여 소개팅을 받아들이고, 그런 천재용을 방이숙은 뒤늦게 질투한다. 그같은 방이숙에게서 천재용은 야릇한 충동을 느낀다. 입맞춤을 한다. 밤늦은 놀이터 그네에서 아이같은 그들의 천진한 사랑이 입맞춤으로 한 고비를 넘긴다. 하지만 갈 길은 멀다. 천재용이나 방이숙이나 평탄한 사랑을 하기에는 거리가 먼 성격들이다.

방일숙이 비로소 어머니로부터 인정받으려 한다. 그것은 계기가 될 수 있다. 한심스럽게만 여기던 딸이 어느새 매니저로써 연예인으로부터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까지 듣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고마움의 표시로 받은 개런티 전부를 매니저인 방일숙에게 건네고 있었다. 방일숙이란 엄청애가 생각하는 그런 못난 딸이 아니었던 것이다. 엄청애의 세계가 깨져나가기 시작한다. 차윤희의 충격에 그리고 방일숙의 감동으로. 그녀는 비로소 자기연민에서 벗어나 주위를, 사람들을 바로 볼 수 있게 될까?

할머니가 마침내 장양실(나영희 분)이 과거 어떤 짓을 저질렀는가를 눈치채기 시작한다. 아니 거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상처가 깊다. 그토록 가엾게 여기던 며느리다. 그토록 자신에게 살갑게 정성을 다하던 며느리였다. 그런 며느리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미워하기보다는 불쌍하고, 화를 내기보다는 그저 미안하다. 그러면서도 원망할 수밖에 없다. 가장 잔인한 것이다. 사랑하는 이로 하여금 그를 원망하도록 만든다는 것은.

두 남자가 쫓겨나듯 정원에 나와 하늘을 보고 섰다. 어머니 마음만 헤아릴 수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가장 가까이서 부대끼며 사는 것은 아내인 셈이다. 자식과도 가장 깊숙이 얽히는 것이 어머니인 아내다. 결혼의 의미를 되새긴다. 부부가 된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누구인가? 누구에게 가장 크게 마음을 기울여야 하는가? 아버지의 지혜가 아들에게로 전해진다.

무리수다. 그러나 이해한다. 대사를 외우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이던 방장군(곽동연 분)이 시험마저도 대본을 외우듯 외워 치른다. 음악인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다. 난독증이라 책을 읽지 못하는데 노래 가사는 기가 막히게 외운다. 외국어도 노래가사로 배웠다. 방장군도 그런 케이스일까? 무리수인 듯 싶으면서도 어쩐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재미가 없다. 방장군은 꼴찌를 다투어야 멋있는 캐릭터다. 시험까지 잘치면 그게 무슨 방장군인가?

정리 수순에 들어간다. 엄청애와 차윤희의 갈등 역시 그리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난관이 하나 버티고 있다. 입양에 대한 이야기가 그냥 들어가 버렸다. 차세광과 방말숙도 어떻게 해결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갈 길은 멀다. 고비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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