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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6.07 13:34

추적자 "백홍석과 강동윤, 가난이 슬픈 초상들에 대해서..."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절박함과 체념에 대해서, 모순을 묻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아주 어렸을 적 필자가 살던 동네도 꽤나 외지고 허름한 곳이었다. 아저씨들은 낮부터 술에 취해 있고, 아주머니들은 알몸이 되어 머리를 붙잡고 싸웠다. 아이들은 쉽게 어른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 이미 술과 담배를 하는 녀석이 있었을 정도이니. 또래 녀석들 모여서 하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놀랐었다. 자전거를 훔쳐서 팔아먹을 모의를 하고 있었다. 녀석들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놀이였다.

도대체 신문따위 팔아봐야 얼마나 된다고 그것을 탐을 내겠는가? 자전거 훔쳐서 팔아봐야 그렇게 많은 돈을 받기란 어렵다. 아마 조금 산다 하는 집 아이들이라면 며칠 용돈 정도나 겨우 될 뿐이다. 그것으로 그렇다고 대단한 일들을 하는가? 하지만 그조차도 아이들에게는 대단한 사치일 수 있는 것이다. 놓기에도 포기하기에도 너무 아깝다. 간절함이 의지가 된다. 당연하게 그것을 가지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난다. 고작해야일 텐데도 말이다. 고작 그런 수준이다.

바로 김동인의 소설 <감자>에서도 그래서 가난하지만 올곧은 집안에서 제대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주인공 복녀가 어떻게 도덕적으로 타락해가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결국은 가난이었다. 가난이 복녀로 하여금 팔려가다시피 한참 나이도 많은 홀아비를 남편으로 맞이하도록 만들고, 남편의 게으름과 무능으로 인한 빈민굴의 험난한 삶이 그녀를 매춘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의 몸을 사주던 왕서방이 새로 여자를 들이자 그를 질투하여 악다구니를 쓰다가 초라하게 죽어 묻히고 만다. 그녀의 죽음은 고작 몇 푼의 돈으로 거래될 뿐이었다. 과연 무엇이 복녀로 하여금 그렇게 비참하게 죽게 만들었던 것일까? 누가 그녀를 그렇게 족도록 만든 것일까?

말한다. 성매매가 나쁘다. 부도덕하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이 있다. 아직 어린 딸에게 성매매를 강요하고 그 수입으로 일가족이 먹고 산다. 성매매를 하지 말라고 한다면 결국 가족은 굶지 않으면 안된다. 아마 굶어보지 않은 사람만이 차라리 굶을 지언정 그럴 수는 없다고 단호히 말할 수 있으리라. 미성년자에 대한 노동력착취를 국제사회에 보고했지만 돌아온 것은 그나마의 일자리마저 잃고 더 깊은 가난이라고 하는 절망에 신음하는 부모들이었다.

오죽하면 제 3세계에 이은 제 4세계라 한다. 기존의 보편적 가치와 윤리가 통용되지 않는 또다른 세계라는 뜻이다. 미국의 할렘은 그같은 우범지대의 대명사로 쓰인다. 프랑스에서도 저와 같은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 외부와 격리된 채 가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는 일가족으로부터였다. 교육을 받을 기회도, 프랑스의 사회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를 학습할 기회도 없는 프랑스 사회의 이방인이었다. 어쩌면 필자가 살던 동네도 비슷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이루는 어떤 구성원도 초등학생이 술과 담배를 하고 도둑질을 하는 모습을 정상으로 여기지는 않을 것 아닌가.

굶기를 밥먹듯하다가 어느날 아버지가 손님의 지갑을 뒤져 훔친 돈으로 몇 끼 마음놓고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대학등록금을 걱정하는데 다행스럽게도 누이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으면서 얼마간의 보상금을 받아 챙길 수 있었다. 인간으로서 어찌 그럴 수 있는가? 하지만 그러면 굶을까? 그러면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대학을 포기하기라도 했어야 했던 것일까? 누군가는 그런 일로 굳이 대학을 그만둘 필요가 없을 텐데, 누군가는 가난을 이유로 그것을 강요당해야 한다. 꿈이 그토록 크고 간절하다면 누이의 죽음 또한 단지 기회에 불과할 수 있다. 다른 기회란 없으므로.

대통령이 되고 싶다. 반드시 대권을 손에 쥐고 싶다. 하지만 그런 강동윤(김상중 분)에게 주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이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가 그의 적이었다. 모두가 그의 앞을 막으려 하는데 그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해야 하는가? 만일 포기한다면 그가 이루려고 하는 꿈의 가치란 고작 그런 정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꿈을 포기할 수 없기에 그는 무리한 행동을 저지르고 만다. 사람을 죽이고 한 가족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어쩔 수 없다는 변명과 함께. 그는 정치인이었다.

백홍석(손현주 분)이 경찰로써 동료인 조형사(박효진 분)의 권총을 빼앗아 신성한 법정에 난입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백홍석의 딸 백수정(이혜인 분)의 명예가 더렵혀지는 과정이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돈이 없다. 힘이 없다. 영향력이 없다. 바로 앞에서 이루어지는 더러운 수작을 말릴 아무런 수단이 없다. 저들이 만들어 놓은 룰 위에서, 저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모든 것들로 인해, 그렇게 백홍석의 딸 백수정은 마약을 상습적으로 하며 원조교제까지 하는 부도덕한 여학생의 상징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것을 백홍석은 단지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전직 경찰로써 법을 어기고, 동료의 총을 훔쳐 곤란에 빠뜨리고, 그리고 마침내 사람을 죽인다. 하지만 과연 그에게 힘이 있었다면. 그의 직업이 검사이고, 그의 아내가 판사였다면. 혹은 정치인이거나 대기업 오너를 아버지로 두고 있었다면. 하기는 검찰이더라도 최정우(류승수 분)와 같이 연고없이 외로운 처지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래도 백홍석보다는 나았을까? 아무튼 그랬더라도 백홍석은 굳이 총을 들고 법정에 난입했어야 했을까? 살인법을 체포하는 경찰에서 살인자로 처벌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어야 했을까?

하기는 그렇다고 과연 가난해서만 죄를 짓는가? 그러면 강동윤은 지금 현재 가난한가? 가난이란 상대적이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최소한도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가난한 것이다. 천억을 가지고 있어도 천백억에 미치지 못하면 가난하다. 그래서 나머지 백억을 위해 사람은 양심을 판다. 조금의 권력을 위해, 조금의 명예를 위해, 조금의 인기를 위해, 그래서 PK준도 자신의 양심을 저버렸다. 그에게는 무엇보다 지금의 성공이 너무 소중했다. 사람의 목숨따위보다 더 소중했다. 그에 비하면 돈이 필요해서 조직폭력배에게 약간의 돈을 받아챙긴 황반장(강신일 분) 정도야 얼마나 준수한가? 그는 진짜 돈이 없어 가난했을 뿐이다.

아무리 봐도 악역만은 아니다. 단지 백홍석이 타도해야 할 악으로서만 강동윤은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백홍석과 강동윤의 사이에도 반드시 깨부숴야 하는 벽이 존재하듯 강동윤과 서회장 일가 사이에도 반드시 넘어야 하는 벽이 존재한다. 그래서 발버둥을 친다. 한 사람은 테러리스트가 되어. 다른 한 사람은 반역자가 되어. 아무것도 없이 그 벽을 부수고 위로 올라가려면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파괴자가 되거나 반역자가 되어 기존의 틀을 무너뜨려야 한다. 결국은 강동윤의 최후도 백홍석에게 달려 있지만 강동윤의 역할 또한 그래서 그때까지 무척 중요하다.

포기하면 편하다. 욕심을 버리면 그럴 일도 없다. 역시 남의 일은 항상 말하기 편하다. 그럴 수 없기에 죄를 저지른다. 죄를 저질러서까지 그것을 이루려 한다. 그런 자신을 연민한다. 항상 감탄하는 부분이다. 죄책감이 자기연민으로 바뀌고 그것이 다시 권력의지를 다지는 수단으로 쓰이는 것에. 그런데 그저 현실이 따라주지 않으니 포기하라? 백홍석은 현실이 모두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니 진실도 양심도 모두 저버려야 했던 것일까? 그것이 현실이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저들은 싸우기로 결심한다.

꿈을 위해 죄를 짓지 않아도 되는 사회. 강동윤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멈추거나 뒤로 갈 수 없아. 바로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밟고 포기하고 올라온 자리다. 그렇다면 그로 인해 희생된 이들의 가치란 어떻게 되겠는가? 강동윤 나름의 속죄라고나 할까? 그는 뭐라해도 정치인이었다. 모든 것은 지상명제 - 권력 이후로 미뤄진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권력을 쥐겠다. 이 얼마나 비루하고 비참하며 비장한 다짐인가. 그렇게밖에는 그는 이미 살아갈 수 없다.

우울하다. 먹먹하다. 어째서 이리 가엾은 이들만이 보이는 것일까? 주인공 백홍석도. 마침내 그가 부딪혀야 하는 강동윤도, 백홍석의 딸을 죽인 PK준의 뻔뻔함도, 비리경찰관 황반장이나 불륜을 저지르는 아내 서지수(김성령 분) 역시 마찬가지다. 악조차 서럽다. 죄조차 외롭다. 무엇이 그들을 죄짓게 만드는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가?

사람이 슬픈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아픈 것인가? 사람이 악해서 죄를 짓는가? 사람이 죄를 짓기에 악한 것인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지키는 것조차 버거운 이들에 대해서다. 너무나 쉬운 것들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어렵다. 너무나 많은 자신들의 이야기다. 혁명이라도 하자는 것일까? 무겁다. 단순한 드라마라 하기에 미안한 까닭이다. 생각한다. 무모할 정도다.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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