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5.23 07:57

패션왕 "굿바이, 젊은 날의 꿈이여..."

뉴욕의 화려함과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강영걸 패션왕이 되어 눕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처음에는 결국 벌려놓은 일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또 밀어내기식 엔딩으로 나가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강영걸(유아인 분)의 몰락은 갑작스러웠다. 그리고 이가영(신세경 분)의 캐릭터 또한 어정쩡하게 겉돌고 있었다. 결국은 혼란스럽기만 하다가 아무것도 없이 끝나는 것일까?

하지만 끝내 정재혁(이제훈 분)과 미국으로 떠나기 전 서럽게 오열하던 이가영의 모습에서 어떤 진부한 주제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 화려한 뉴욕의 밤거리가 내려다 보이는 자신의 아파트 옥상에서 사치스런 모피를 걸치고 풀장에 누워 최후를 맞던 강영걸의 모습에서 마침내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강영걸에게 이가영은 마지막 인사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총소리와 함께 아련한 그리움과 더불어 스산한 마지막 작별의 말이었다.

정재혁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기 전 짐정리를 하던 도중 이가영이 서럽게 오열하고 있을 때 필자의 머릿속에는 어떤 노래의 한 귀절이 마치 배경음악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노래의 전체 내용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그 귀절에 들어 있는 단 한 마디의 가사가 마치 주제처럼 떠오른 것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어쩌면 드라마의 주제였을 것이다. 아니 그래서 아마 필자 역시 얼마전 드라마의 제목이 어째서 <패션왕>인가에 대해 나름대로 풀어 본 적이 있었다. <패션왕>에서 말하는 '패션'이란 아마도 풀에 누워 최후를 맞은 강영걸이 걸치고 있던 사치스런 모피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가 바라보던 뉴욕의 하늘이었을 것이다. 그가 배경으로 삼은 뉴욕와 화려한 밤거리였을 것이다. 그가 누워 있는 부와 사치의 상징인 개인풀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한순간의 꿈과도 같다.

꿈을 꾸었다. 한 바탕의 정말 멋지고 화려한 꿈이었다. 부를 이루었다. 사회적 성공을 이루었다. 저 대단한 멋진 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었다. 자기가 받았던 모든 설움과 굴욕을 통쾌하게 되돌려주었다. 비록 바로 문앞에서 미끄러지고 말았지만 이만하면 꽤나 괜찮은 멋진 꿈이지 않은가. 그래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최안나(유리 분)와도 강영걸은 만족스런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물론 그 순간 강영걸에게는 다른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강영걸에게 인사를 건네는 최안나의 모습은 자못 후련하기까지 했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문제는 이가영이다. 그렇다면 이가영은 무언가? GG는 이가영의 꿈이 아니었다. 이가영의 꿈이었던 YGM으로부터는 강영걸의 억지로 인해 스스로 물러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신 어머니의 가게를 돌려준다. 그리고 자기만의 패션쇼를 열어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 직전 강영걸은 떠나고 말았다. 자신을 미끼로 정재혁을 이용해서 무려 1500억이라는 돈을 투자의 명목으로 가로챈 뒤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가영은 홀로 남겨졌다.

강영걸이 자신을 이용했다는 사실은 이가영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자신을 이용해서 정재혁을 끌어들여 이익을 취했다는 것 역시 이가영에게는 그다지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것은 배신조차도 아니었다. 정재혁의 말처럼 그녀는 강영걸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보다 더 강한 유대로서 그녀는 강영걸에 얽매여 있다. 그렇더라도 좋다. 자신을 버려두지만 않는다면. 자기만 혼자 남겨두지만 않는다면. 감옥에 갔을 때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약은 있었다.

최안나는 그나마 후련하기라도 했다. 강영걸은 자기가 하고자 한 바를 거의 이루었다. 정재혁은 이가영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이가영은 어쩌는가?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마지막회를 보며 내내 불편하고 거북했던 이유였다. 이가영의 캐릭터가 자꾸 부대끼고 있었다.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녀는 그동안 도대체 무엇을 했고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바로 그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데 그냥 끝나버렸다. 자기와는 상관없이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혼자 남겨지고 말았다. 배신감보다 더한 상실감이다. 분노보다도 더한 허무다. 그녀는 강영걸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것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이제 다시는 강영걸이 자신을 남겨둔 채 멋대로 떠나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꿈을 꾸었다. 최안나의 꿈은 인정받는 것이다. 굳이 정재혁이 아니어도 좋다. 자신의 가치를, 존엄을, 자기를 무시한 모두로부터 인정받는다. 강영걸의 꿈은 성공이었다. 번듯하게 성공해서 자기를 무시하고 모욕한 모두에게 그대로 되갚아준다. 정재혁의 꿈은 부모로부터 벗어나 홀로 서는 것이었다. 부모의 아들이 아닌 한 여자의 남자가 되어 오롯하게 그를 책임진다. 자기라면 얼마든지 이가영이 머물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고 그녀로 하여금 의지하게 할 수 있다. 필요할 때만 자기를 찾는 이가영에게 불만을 말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찾아와 부탁해 오는 이가영이 그로서는 반갑고 고마운 것이다. 이가영과 함께 있을 때 정재혁 역시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는다. 그렇다면 이가영에게 꿈이란 무엇이었을까?

조순희(장미희 분)의 가게는 그녀에게 자궁과 같았다. 아니면 무덤이기도 했다. 바깥세상의 여러 사연따위 알지 못하도 되었던 낙원이었고, 하지만 그렇기에 항상 억압되고 강제당하며 살아야 했던 지옥이기도 했다. 어느날 그녀는 성인이 되어 그곳으로부터 쫓겨났다. 하필 그때 이가영의 나이가 스무살이었다. 아무런 희망이란 없던 그런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주고 희망이라는 따뜻한 기대를 가질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바로 강영걸이었다. 그녀가 미처 꾸어보지 못한 너무나 간절한 꿈이었다. 그 꿈을 강영걸이 보여주었다. 다시 조순희의 가게로 찾아갔을 때도 강영걸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그곳에서 데리고 나와주었다. 그러고 보면 자신을 절망으로부터 데리고 나왔던 그 손이 자신을 버리고 혼자서 어디론가 떠나가 사라져 버렸다. 그 상실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랑하기에 오히려 죽이고 싶다.

정재혁의 말처럼 이가영이 끊임없이 정재혁이라는 현실이 보여주는 달콤함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끝내 다시 강영걸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그것은 강영걸이 마지막 순간에조차 그토록 이가영을 이용해가면서까지 정재혁으로부터 돈을 얻어내려 했던 것과도 같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가 행려병자 수용소에서 허무하도록 비참하게 죽어갔었다. 그의 세상에 대한 분노와 뿌리깊은 열등감은 결코 그같은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다. 마지막까지 발버둥친다. 마지막 순간까지 한 가닥 꿈을 부여잡고 놓지 않으려 버둥거린다. 때로 그래서 이가영마저 버려둘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만큼 간절하고 절박하기에 이가영 역시 그런 강영걸을 놓아 버릴 수 없다. 그녀의 강영걸에 대한 사랑은 차라리 신에 대한 숭배와도 같다. 강영걸과 함께 있으면 꿈을 꿀 수 있다.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따뜻함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그토록 상처입고 그토록 정재혁에게 유횩당하면서도 다시 강영걸의 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강영걸로부터 이가영은 버림받고 말았다. 그녀로서 어찌해야겠는가?

결국 끝나버린 것이다. 억지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꿈으로부터 버림받았다. 그녀가 정재혁과 미국으로 떠나기 전 서럽게 오열하고 만 이유였다.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이제는 다시 무엇도 되돌릴 수 없다. 강물이 흘러가듯 흘러가는 시간 속에 영영 떠나보내야 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장기에 겪는 아픔 가운데 하나다. 젊은 날의 순수하지만 치열했던 꿈과 억지로 작별해야 하는 순간이다. 흔하 말하는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할 수 있는 일과의 경계에서 고민하고 갈등하고 투쟁하며 좌절하고 절망하다가 끝내 꿈으로부터 배반당하고 홀로 남겨져 이별의 의식을 치르고야 만다. 그때 그리도 서럽고 아팠었다. 눈이 아프도록 울고 머리가 멍하도록 다시 울었었다. 그런데 그 꿈이 다시 손에 와 닿는다. 어쩌면 이가영은 뉴욕패션스쿨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강영걸을 본 것이 아닐까? 다시는 돌아갈 수 없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꿈이 눈앞에 나타난다. 이미 의식을 끝냈다.

이미 눈물로써 그를 떠나보냈고, 이제 마지막 가는 그에게 인사의 말을 건넨다. 차라리 잊을 수 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차라리 잊고 모르는 채 살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처럼 그냥 스쳐지나갈 수 있었다면. 그것은 차라리 더한 절망이다. 그럴 수 없기에 차라리 죽이려 한다. 차라리 지워버리려 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다시 이가영과 만난다. 추억이란 이미 죽어버린 기억의 흔적이다. 아무런 갈등도 고뇌도 없이, 심지어 싸우고 절망하며 좌절했던 시간마저 아름답게 채색된다. 다시 만난다면 그것으로 좋다. 잔인하게 그녀는 어른이 된다. 처음 조순희의 가게로부터 쫓겨나 마치 아이와도 같이 세상과 만나던 그녀가 잔인하게 어른이 된다. 비록 그것이 중간에 정재혁이 강영걸이 보낸 편지를 가로챈 데 따른 오해의 결과라 할지라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정재혁 또한 그녀 앞에 놓인 현실이다. 그녀와 함께 하고 있는 현실이다.

정재혁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정재혁이 강영걸을 죽이려 그리 중간에 우편물을 빼돌린 것은 아니었다. 후회하고 있었다.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이가영에게 뉴욕에 있는 강영걸을 만나지 않겠느냐 물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그가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다. 그는 약간의 후회와 미안함 대신 이가영을 얻을 수 있었다. 대신 이가영의 강영걸에 대한 증오와 집착 또한 얻었다. 그래도 정재혁이 바라던 것은 이가영이었으니 그로서는 해피엔드 아니겠는가? 정재혁의 곁에서 이가영도 웃을 수 있었다. 아마 정재혁은 강영걸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아니 관심도 없다. 그의 세계에 더 이상 강영걸이란 없다. 그는 행복하다. 사람은 의도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큰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죄를 짓기도 한다.

결국 기대했던 대로였다. 해피엔드였다. 모두는 원하는 것을 얻었다. 강영걸은 돈을 얻었다. 그것은 이가영을 포기하더라도 그가 간절히 얻고자 했던 것이었다. 더불어 이가영도 얻었다. 돈을 얻은 그가 다시 간절히 바란 것은 이가영과의 지난날의 따뜻하고 행복하던 기억이었다. 그를 죽이고 싶어했던 이가영의 진심이 이제 영원히 그와 함께 할 것이다. 차라리 죽이고 싶도록 그를 사랑한다. 반면 정재혁은 비록 돈과 아버지의 신뢰를 잃었지만 이가영을 얻었다. 이가영과 함께 뉴욕에서 이가영의 남자로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최안나는 기회와 인정을 얻었다. 그러면 이가영은?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그녀가 머물 자리와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소망하던 강영걸을 그녀 또한 모두 얻을 수 있었다. 마치 꿈처럼. 현실은 그렇게 가혹하다. 행복이란 그렇게 잔인하고 가혹한 것이다. 그래서 모두는 해피하다.

젊은 그들의 좌절의 기록이다. 모두는 소망한다. 모두는 바라고 꿈꾼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현실이란 젊은 그들의 것이 아닌 그들과 같은 시간을 거쳤던 더 노회한 더 많은 것들을 가진 누군가들이다. 그들을 흔히 기성세대라 부른다. 젊은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틀을 그들이 짰다. 현실의 모든 상식과 가치와 규칙들을 그들이 만들었다. 아무리 발버둥치려 해도 그것은 완고한 그물과도 같다. 그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부서지고 버려진다. 그런 현실 속에 젊은 그들이 꿈꾸는 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란 때로 비루할 수밖에 없다. 비굴하고 비겁하고 잔인하다. 아직 세상이 그들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파격이 필요하고 파격은 필연 억압을 불러올 것이다. 그 억압을 이길 힘이 있는가? 기성세대에 편승하거나, 아니면 힘으로 그들이 만든 강고한 구조를 깨뜨리거나. 하지만 대부분은 실패하고 좌절하고 만다. 강영걸만 좌절한 것이 아니다. 정재혁도 좌절했다. 최안나도 좌절했다. 이가영도 좌절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얻었다. 젊다는 것은 그래서 무한하며 아름답고 잔인하고 허무하다. 삶이란 바로 그같은 기록의 누적인 것이다. 언젠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그래서 결국 강영걸은 패션왕이 되었다. 뉴욕의 호화스런 아파트에서, 사치스런 모피를 걸치고, 꿈과 같은 개인풀에서, 환상과도 같은 뉴욕의 화려한 불빛과 어둑한 하늘을 배경으로 최후를 맞는다. 그곳은 지옥이었을까? 아니면 천국이었을까? 그래도 그 순간 그에게는 한 겹 모피가 피와 함께 남아 있었다. 그가 꾸었던 꿈의 증거였다. 그리고 그가 패션왕이 되어 떠나버린 뒤로 알몸이 된 이가영이 남는다. 또다시 그녀는 남겨진다. 그래도 그녀는 자기가 바란 한 조각을 얻는다. 그녀는 옷을 디자인하는 사람이지 옷을 탐내며 입는 사람이 아니다. 알몸이 되어 강영걸에게 옷을 입힌다. <패션왕>이라는 제목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무모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이런 것은 조금 마니악하다. 너무 어둡고 우울하다. 그렇지 않아도 현실은 어둡고 우울하다. 그 극단을 보여준다. 소설이나 혹은 만화나, 영화, 자기가 선택해서 볼 수 있는 장르였다면 마니아적인 흥미는 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진부하다고 말한다. 어떤 장르에서 이와 같은 결말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공중파이기에 이것은 충격이 되고 혼란이 된다. 마지막회가 끝나고 시청자들의 반응이 그래서 우려스럽다. 만족스런 엔딩이기는 하지만 공중파드라마로서는 부적절했다. 드라마작가이기에 이 점은 지적할 부분이다. 한두사람이 참여하는 것도 아니고 한두푼 들어가는 작업도 아니다. 공중파 드라마에 작가주의는 위험하다.

재미있었다. 혼란스러운 듯하면서도 전반적으로 일관성을 가지고 전개되는 정교함이 있었다. 전혀 예측할 수 없이 사방으로 튀면서도 결국은 하나의 분명한 중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심이 마침내 지향하는 곳을 보았다. 강영걸이 죽던 밤하늘처럼 한결 어둡고 음울하던 그곳이었다. 강영걸의 꿈이고 강영걸이 살았던 현실이다. 이가영의 꿈이 이른 곳이었다.

반전이 놀라웠다. 물론 예상한 범위였다. 다만 상당히 과격해서 많은 시청자들이 놀랐을 듯하다. 버려진 이가영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허무와도 같은 상실감과 절망 속에 이가영은 강영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드라마로 드라마를 쓴다. 설득되고 말았다. 흥미롭다. 재미있다.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