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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4.22 14:41

서태지와 이지아, 그리고 대중의 알 권리에 대해!

누구에게나 개인의 사적 영역을 보호할 권리가 있다.

 
흔히 알 권리라 말한다. 모두에게는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 알아야만 하는 권리가 있다. 따라서 그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런 건 어떨까? 화장실에서 용변을 볼 때 어떤 자세로 보는지 누군가 무척 알고 싶어 한다. 알 권리가 있을 터다. 말해주어야 할까?

누구에게나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개인적 사정이라는 것이 있다. 굳이 다른 누군가와 공유할 수 없는 이야기다. 더구나 전혀 모르는 타인이라면. 그래도 알 권리란 적용되는가?

오해다. 알 권리란 원래는 정보로부터 소외되지 않을 권리다. 회사의 주주인데 회사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 전혀 모른다. 주주로써 권한을 행사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다. 국민 개개인이 주권자다. 판단을 내려야 한다. 나 자신에 이익이 되도록. 내가 속한 집단, 사회에 이익이 돌아오도록. 그런데 제대로 된 정보를 알지 못한다.

모든 권리는 공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권리는 권력과의 계약관계라 할 수 있다. 권력을 통하지 않은 권리란 단지 개인적 관계에 불과하다. 사적 관계밖에 없다.

법은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할 것을 명문화하고 있다.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 누구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런데 알 권리라는 이유로 개인의 호기심이 그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려 한다면? 모순이 발생한다. 무엇이 우선일까?

보호가 우선이다. 항상 보호가 우선이다. 부당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의도하지 않은 일로 인해 개인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물론 정치인과 같이 그 말과 행동이 개인의 생활에까지 밀접하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경우라면 예외일 것이다. 정치인의 사생활은 개인의 생활과도 연관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개인의 권리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결국은 이익이다. 특히 권리라 할 때는 공적인 이익을 이야기해야 한다. 개인의 사생활을 파헤쳤을 때 얻어지는 공공의 이익과 그로 인한 개인의 피해에 대해서. 그만한 피해를 감수할만한 가치가 알 권리에는 있는가?

물론 그럼에도 유명인이기에 그들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자 하는 대중의 욕구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파파라치도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개인에게 자신의 사생활을 공개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가? 대중의 욕구와 그로 인한 필요도 존재하지만 그에 대한 방어권도 인정한다. 자신의 사적인 영역을 지킬 권리다.

얼마전에도 가수 박상민이 이미 오래전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있었음에도 그 사실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 드러난 적이 있었다. 이유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더불어 연예인이기 이전에 한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연예인의 가족이라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스트레스일 수 있다. 인기연예인과 사귀고 결혼하고 함께 산다는 것은 그를 좋아하는 대중의 지나친 관심에 노출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것을 즐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라면 어떻게 할까? 같은 연예인이더라도 부담일 텐데 하물며 연예인이 아니라면. 이번 서태지의 경우는 이지아의 나이가 결혼 당시 상당히 어렸었다.

그리고 결혼생활에 대해서는 사적인 영역으로써 보호받고 싶은 게 있었겠지. 아무리 대중을 상대로 하는 연예인이라 할지라도 자기만의 숨 쉴 공간은 필요했을 것이다. 청룽도 그같은 요지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류더화의 비밀결혼에 대해 옹호하면서. 항상 대중에 노출되어 있기에 결혼에 대해서만큼은 자기만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다.

물론 말했듯 그런 것들까지 알고자 하는 것이 연예인을 대하는 대중의 욕구니까. 그것을 스스로 알아내거나 알아내도록 미디어 등을 압박하는 것도 크게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단지 그로부터 자신의 사생활을 보호할 권리는 연예인에게도 있다. 거짓말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 가운데 하나다.

서태지가 과연 미혼이기 때문에 인기 있었는가? 서태지가 인기있는 것은 그의 음악 때문인가? 아니면 단지 결혼하지 않은 미혼의 신분이었기 때문인가? 서태지의 정체성은 단지 미혼이라는 이미지인가? 그의 음악인가? 사기가 아니라면 거짓말조차 자위수단의 하나로써 인정해 줄 수 있는 것이다. 대중의 알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자신을, 주위를 지키려 한다.

하기는 그동안 서태지의 이른바 ‘신비주의’에 대한 반감이 누적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미디어를 통해서. 대중들 사이에서.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대중들에게 그것은 자칫 오만으로 비쳐질 수 있었다. 그것이 이번 이지아와의 이혼사태를 계기로 그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도 권리다. 권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여튼 뒤틀린 현대사로 인한 부작용이었을 것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 국민들은 항상 소외된 채 주변에 머물고 있었다. 알지도 못했고 알아서도 안 되었다.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그 시절 국민들의 욕구를 채워준 것은 단지 몇몇 믿음과 유언비어 뿐이었다.

그러다가 민주화가 찾아오고 자유라는 것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비로소 주권자로서 정보를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알아야 하는 것이 마치 권리처럼 모든 것을 알려 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개인의 사생활이라고는 없이.

오죽하면 유명인도 아닌 일반인의 일상마저 ‘턴다’라 말하며 파헤치고 하겠는가? 네티즌 수사대라는 이유로 억지로 파헤치고서는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 한 인간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매장시킬 수도 있음에도 그것이 권리라며. 준비되지 않은 자유의 부작용이랄까? 아무리 자유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타인의 사적인 영역에 대해서까지 - 개인의 사적 권리에 대해서까지 침해해가며 누릴 자유는 없는 것이다.

연예인이란 공인인가? 그렇게 볼 수도 있다. 다만 연예인의 사생활이 공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연예인의 사생활이 공공의 대중들에게 있어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가?

서태지와 이지아의 이혼파동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대중은 어디까지 알아야 하고 어디까지 알 것을 요구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 연예인은 - 개인은 협력해야 하는가?

얼핏 서태지의 여자로 살아야 했던 부담감을 토로하는 이지아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이지아를 감추어 놓을 수밖에 없는 서태지의 입장도 그래서 이해한다. 드러나지 않은 채도 그렇게 부담이었다면 온갖 미디어와 대중들에 노출되고 나서는 어땠을까? 많은 연예인들이 가족을 - 자식들을 해외로 내보내는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했으면 싶었지만. 서태지라는 아티스트가 행복한 일상을 영위했으면 싶었다. 하긴 그다지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누구와 사귀고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고... 이번 일이 터지면서 겨우 서태지도 결혼을 했구나.

어차피 알려진 것 한 번은 홍역을 치러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연예인의 숙명이다. 다만 그것을 굳이 그들에게 강요하거나 강제해야 하겠는가? 단지 개인의 행복을 위해 지금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그 뿐 아닐까? 알아가는 것은 대중의 몫이더라도.

느닷없는 뉴스에 참 혼란스럽다. 놀랍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그 뿐. 타인이란 멀기에 오히려 더 존중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내가 알고 싶다고 다 알려 해서는 안 된다. 어려서 부모님들로부터 들어 배우는 이야기일 테지만.

좋게 잘 해결되어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다. 뜨겁게 달구어졌던 대중도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서태지도 한 인간이었다. 아이돌이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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