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4.22 09:05

불후의 명곡2 "도시인 윤수일, 경계의 소외와 고독을 노래하다."

김구라의 마지막 방송, 그러나 편집할 수 없는 비중을 확인하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1960년대 이후 급속히 사회가 산업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로 향했다. 꿈을 쫓아 기회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그 가운데 서울로, 서울로 모여들었다. 서울은 타향이며 고향이었다. 낯선 타향이면서 그들이 살아가야 할 터전이었다. 1980년대 어느새 서울에 정착해 살기 시작한 그들의 정서를 노래한 이가 있었다. 자신 또한 경계에 있었던 바로 윤수일이었다.

윤수일은 흔히 말하는 혼혈아였다. 본토에 아내와 자식까지 있던 주한미군 조종사가 그의 아버지였다고 한다. 그나마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는 졸지에 유복자까지 낳은 미혼모가 되어야 했고, 그는 당시 이 땅의 많은 혼혈아들처럼 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른 채 어린시절을 차별속에 보내야 했었다. 그래도 그가 다른 혼혈아들에 비해 운이 좋았다는 것은, 그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어머니와 비록 그를 호적에 넣고자 선택한 남편이었지만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던 그에게 '윤'이라는 성을 준 의붓아버지가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는 정상적인 가정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는 매우 드물게 운이 좋은 경우였을 것이다.

더구나 또 하나 윤수일이 운이 좋았던 것이, 유독 순혈주의의 배타성이 강했던 한국사회에서 유일하게 혼혈에 대해 관대했던 것이 한국 대중음악계였다는 점일 것이다. 아무래도 미 8국무대에서 음악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한 경우가 많다 보니 그만큼 다른 피부색과 외모에 대한 거부감도 덜했던 때문이엇을 것이다. 당장 생각나는 이름만도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박일준과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인순이일 것이다. 아주 최근까지도 외모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동아시아계를 제외하고 한국사회에서 성공한 몇 안 되는 케이스들이었다. 하나같이 대중음악인들이었다. 윤수일 역시 어머니의 응원에 힘입어 당시 펄벅재단이 후원하던 골든 그레입스라는 혼혈인으로 이루어진 밴드에서 기타를 치며 자신의 첫음악인생을 시작한다. 바로 이 골든 그레입스를 프로듀스하던 것이 당대 최고의 음악인이던 신중현이었다.

한국인이되 한국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혼혈아, 더구나 고향이 저 먼 울산이었다. 한국이란 그에게 태어난 고향이면서 영원한 타향이었으며, 그가 살고 있는 곳 역시 고향이 아닌 낯선 서울이었다. 그같은 이방인의 정서를 고스란히 녹여낸 것이 윤수일의 첫 자작히트곡 '제 2의 고향'이었다. 어느새 아파트로 대변되는 '아파트'에서의 서울의 쓸쓸한 정취와 화려한 네오사인 아래 '황홀한 고백'의 사무치는 외로움, '아름다워'는 그같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였다. 낙원에 대한 지향이었다. 그것은 2006년 발표한 앨범 'Remodeling'의 타이틀곡 '숲바다섬마을'로 이어진다. 그가 시대와 만났다. 경계인이던 윤수일이 아직 새로운 삶이 어색하던 당시의 쓸쓸한 이방인의 정서와 만났다.

윤수일을 이야기하자면 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70년대 후반 유행하던 '라쿠뽕'이라고도 불리우던 트로트고고라는 장르일 것이다. 댄스음악인 고고의 흥겨운 리듬에 클럽무대를 통해 체화한 밴드사운드를 실어 트로트의 구성진 멜로디를 들려준다. 대마초파동 이후 록이라는 장르가 주류무대는 커녕 클럽무대에서까지 자취를 감추며 겨우 살아남은 음악인들은 새로운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생존을 위해 대중이 좋아하는 트로트라는 장르를 선택했지만 그것을 구현하는 방식은 이제까지 그들이 추구해오던 밴드음악의 그것이었다. 윤수일도 비록 트로트로 데뷔했지만 그 형식은 '윤수일과 솜사탕'이라는 밴드를 통해서였다. 밴드를 하며 트로트를 한다는 것이 당시로서는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조용필도 자신의 밴드 '위대한 탄생'과 함께 트로트를 연주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다. 트로트란 대중과의 접점이다. 록은 그가 추구하던 음악적 지향이다. 처음에는 트로트에 치우친 트로트고고였지만 점차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음악과의 접점을 찾아내게 된다. 그 대표적인 노래가 '아파트'다. 트로트인 듯 뽕끼 가득한 친숙한 멜로디에, 그러나 사운드는 당시 드물게 하드한 록의 사운드였다. '황홀한 고백'은 차라리 댄스음악에 가까운 빠르고 강렬한 비트를 들려주고 있었다. 소방차가 나타나기까지 윤수일의 '황홀한 고백'은 가장 과격한 댄스음악으로 꼽히고 있었다. 춤 좀 춘다 하면 윤수일의 춤을 따라추고 있었다. 그리고 '아름다워'가 있었다. 최초의 뉴에이지. 그보다는 그가 찾아낸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가장 음악적으로도 세련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었을 것이다. 90년대 일부의 록마니아들이 한국적인 록을 고민하고 있을 때 윤수일은 이미 80년대 한국대중이 즐겨듣고 부르는 록을 완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용필과 윤수일이 한국대중음악사에서 갖는 위치일 것이다. 50년대 이후 미군을 대상으로 한 클럽무대에서 본토의 음악인들과 경쟁해가며 치열하게 베껴온 노하우가 있었다. 비록 자작곡은 얼마 없었지만 기술적 역량만큼은 미국의 음악인과 비교해 결코 뒤지지 않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것이 어느새 경제성장과 더불어 늘어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밤무대에서 한국의 대중을 위해 부르던 통속적인 트로트와 만났다. 만난 것을 넘어 주류무대로 도약하게 되었다. 조용필이 조금 더 대중적이고 윤수일이 조금 더 마니악했다. 80년대 중반 메탈붐이 일기까지 가장 하드한 록사운드를 들려주던 것이 윤수일이었다. 최초의 뉴에이지와 소방차 이전에 가장 과력한 댄스음악도 윤수일의 몫이었다. 그들에게는 70년대까지의 한국 대중음악의 모든 성과가 집약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70년대가 80년대로 이어지고 80년대 후반 한국대중음악의 르네상스로 이어지고 있었다.

다만 아쉽다면 윤수일의 가장 전성기인 80년대 중반 모종의 일로 MBC의 PD와 다툰 끝에 출연정지를 당하며 당시 윤수일의 음악적 성과에 대한 평가가 절반에 그치고 말았다는 점일 것이다. 윤수일의 대중음악인으로서의 커리어도 이 무렵 정체된다. 음악적으로 가장 왕성하던 시기에 KBS만으로 활동무대가 한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대중음악인으로서 대중의 평가를 받는데 있어 불리하게 작용하고 말았다. 어쩌면 가장 높이 평가되어야 할 음악인이면서 가장 저평가된 음악인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 지금 들어도 윤수일의 음악은 놀랍기만 하다. 모두 전문적인 교육이나 훈련 없이 독학으로 일구어낸 성과들이다. 최근의 음악들도 물론 여전히 좋다. 만에 하나라도 그때의 불운한 사건만 아니었다면 그에 대한 평가도 상당히 달라져 있지 않았을까? 더구나 윤수일의 음악 대부분이 그의 자작곡이다. 그의 재능과 노력이 일구어낸 결과물들이다.

아무튼 너무나 당연하게 기다리고 있던 전설이었다. 당연히 출연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윤수일이 빠져서는 안된다. 전설을 말하는데 윤수일을 빼고서 말할 수는 없다. 많이 늙었지만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와 묵직한 미성은 여전하다. 타잔옷을 입고 코미디프로그램에서 줄을 타던 모습이 기억난다. 당시 윤수일이 출연하던 코너에 얼굴을 비췄다가 스타로 발돋움한 것이 이주일이었다고 한다. 거기까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머리를 단정하게 깎고 트로트만 부르고 있었는데. 그러나 필자의 기억에 그는 머리를 기르고, 상당히 반항적으로 옷을 입고 무대메너를 선보이던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카리스마 그 자체였다. 그저 고마울 뿐. 다시 볼 수 있어 그저 감사하다.

과연 노브레인의 '사랑만은 않겠어요'는 앞서 말한 트로트고고의 본질을 보여준다. 과격한 메탈의 사운드와 구성진 트로트의 멜로디. 원래 그랬다. 유현상의 '갈테면 가라지'에서도 일렉트릭 기타는 시끄럽고, 최백호의 '영일만 친구'에서도 드럼과 베이스, 일렉트릭 기타는 분주하다. 너무나 잘 어울리고 있지 않은가? 원래의 폭스트로트의 2박자 리듬에, 고고의 리듬이 더해지고, 록의 비트가 더해진다. 너무 어색하지 않아서 노력이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멜로디와 연주를 보다 깎고 다듬어 세련됨을 더하면 윤수일의 음악이 된다.

태민의 '황홀한 고백'은 임태경이 말한 그대로 '나르시스' 그 자체였다. 고백이 황홀한 것이 아니다. 고백하는 자신이 황홀하다. 다른 사람이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태민 자신이 고백하는 것이다. 너무 폼을 잡는다. 노래며. 춤이며. 그러나 그것이 본질이다. 윤수일의 원래의 '황홀한 고백'도 상당히 자아도취적이다. 강렬함과 뜨거움은 윤수일이 우위에 있지만 정제된 세련됨은 태민이 낫다. 시간이 그냥 흐른 것은 아니다. 태민은 춤을 추는 아이돌가수다.

린의 뽕끼는 타고났다. 트로트를 부를 때 혈관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낀다면 그것이 소울이다. 역시 그동안도 <불후의 명곡2>를 통해 느껴오던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오래된 본래의 트로트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요즘의 기교적인 양식화된 트로트가 아닌 원래의 트로트가 갖는 구성짐이다. 성격까지 딱 어울린다. 알리의 '떠나지마'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던 강렬한 록사운드를 록보다 더 강렬한 블루스로 완성해낸다. 소화하지 못하는 장르가 없다. 더구나 너무 쉽다. 노래를 너무 쉽게 잘 불러도 문제가 된다. 경연이다. 노래 잘한다는 말도 이제는 지겹다.

임태경은 반칙을 썼다. 이건 노래가 아니다. 뮤지컬이다. 뮤지컬의 한 장면을 옮겨다 놓았다. 노래가사 그대로다. 아마 60년대 미국의 어느 도시의 풍격이었을까? 50년대일지도 모르겠다. 스윙리듬에 실린 고풍스러운 뮤지컬 스타일이 오래된 어느 작품을 떠올리게 만든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문명과 아직 간직하고 있는 전통의 낭만, 치열한 첨단의 도시 속에 방황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다. 80년대의 '아파트'가 들려주는 정서와 같다. 아파트란 당시 최첨단의 문명이었지만, 그를 대변하는 정서는 별빛과 다리, 바람과 구름이다. 전화를 통해 상대의 목소리를 듣는다.

에일리의 '제 2의 고향'에 대해서는 신동엽의 촌평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원래의 '제 2의 고향'에 담긴 정서는 어느새 도시에서의 삶에 익숙해진 사람의 소외와 외로움이다. 처음 고향을 떠나 도시로 왔을 때야 당연히 모든 것이 신기하고 즐겁기만 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게 되면 도시에서의 삶에 익숙해지는 만큼 스스로 지쳐간다. 향수병이라는 것도 생기게 된다. 고향이 그립고 지금의 삶으로부터 다시 도망쳐 버리고 싶다. 그럴 수 없기에 굳이 '제 2의 고향'이라며 다짐도 해본다. 그에 비하면 에일리의 '제 2의 고향'은 너무 상큼하지 않았을까? 갓 도시로 올라온 시골처녀의 모습이 보인다. 어쩌면 가수로서 데뷔한 지 얼마 안되는 자신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성훈의 '아름다워'는 상당히 직접적이다. 그야말로 클럽에서 여자꼬시는데 쓰이는 작업용 멘트다. 윤수일의 '아름다워'는 그보다는 상당히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다루고 있었다. 누구를 지칭하지 않는다. 특정한 대상을 지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만큼 성훈의 '아름다워'는 흥겹다. 아름다움에 대한 찬가일 것이다. 듣는 사람이 즐겁다. 아쉽게 졌다. 상대가 나빴다.

김구라의 마지막방송이었다. 다행히 편집하지 않고 그대로 내보냈다. 김구라 분량 빼면 <불후의 명곡2>에서 예능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얼마 없다. 스스로 대기실에서 참가자들을 공격하고 또 공격당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노브레인의 보보를 계속해서 공격하며 캐릭터를 잡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안조았다. 누가 김구라의 대신이 될까?

빵이란 곧 본능일 것이다. 식욕이란 인간이 갖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다. 어째서 가수들이 모여앉은 대기실에 빵을 갖다 놓고 있는가? 무대에서의 정교하게 다듬어진 아름다움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순수하게 식욕이라고 하는 본능적 욕구에 의해 빵을 집어들고 먹는다. 대단한 전설을 앞에두고 애써 준비한 무대를 보여주려는 진지한 순간이라 그 대비는 더욱 분명해진다. 맛나게 빵을 먹는 가수들의 허술함과 그들의 최선을 다한 무대가 있었다.

과연 대선배일 것이다. 전설이다.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데뷔한 지 35년, 자신의 데뷔연차도 되지 않을 어린 후배들이 자신의 노래를 자기들의 세대에 어울리는 방식오 다시 편곡해서 무대에 올린다. 그보다는 후배인 것이 좋지 않았을까? 음악을 한다는 것이 좋다. 까마득한 후배들임에도 무대에서 요구하는 것들에 누구보다 적극적이다. 객석에서 하나가 되어 있다. 즐겁다. 흥미롭다.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