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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4.15 09:30

불후의 명곡2 "현인 10주기, 그러나 노래가 불리는 한 그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선인은 떠났어도 후인이 남아 그 생명을 이어간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대한민국 첫가수. 또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은 현대 한국 대중가요의 첫가수. 해방이 되고 가장 처음으로 음반을 낸 가수였다. 처음으로 메가히트를 기록했고 처음으로 번안곡 히트곡을 내었다. 대한민국이 가장 어려울 때 가장 위로가 되었던 가수였다. 현인. 그를 기억한다.

그는 원래 성악을 했다. 부산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음악학교를 나왔다. 그의 독특한 창법은 그같은 탄탄한 음악적 기초와 이론 위에서 만들어졌다. 전통 대중가요의 구성짐과 새로 밀려드는 미국 팝음악의 세련됨이 과장된 비브라토를 스타카토로 끊는 특유의 창법을 통해 만났다. 그것은 마치 악기소리와도 같았다.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로 연주를 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미성과 세련된 창법이 남자다운 멋진 외모와 스타일이 만났다. 그는 스타였다.

그는 어쩌면 해방이 만들어낸 슈퍼스타였을 것이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미군이 일본을 대신해 점령군으로 이 땅에 들어왔다. 그리고 미군과 더불어 미국의 대중문화도 이 땅에 소개되고 있었다. 그는 음악을 전공했다. 전문적인 지식과 훈련을 갖추고 있었다. 새롭게 밀려드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음악과 전통적인 대중적 정서와의 접점을 그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그것을 구현해내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의 첨병이었다. 그는 전통대중가요의 가수이면서 새로운 이국적인 음악을 들려주는 가수이기도 했다. 그는 시대 자체였다.

가장 어렵던 시절이었다. 1945년 한반도는 마침내 식민지에서 해방이 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념갈등과 1950년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인 한국전쟁, 그리고 그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그때가 현인의 전성기였다. 오랜 무명생활을 끝내고 가장 힘들고 어렵던 시절 그는 누구보다 전통의 정서와 닿아 있으며 누구보다 세련된 음악으로 고단하기만 하던 사람들의 삶을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한 시대를 대표하고 위로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행운이며 또한 그 사회에 있어서는 불운이기도 하다. 현인의 이름으로 발표된 주옥같은 히트곡들은 그것을 대변해준다. 얼마나 그는 당시의 대중들에 사랑받고 있었는가.

박재범의 말이 맞다. 모를 것이다. 아마 출연한 대부분의 가수들이 현인과 그의 음악에 대해 전혀 알지도, 알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있었기에 그들도 있다. 그가 직접 가사까지 써서 붙인 최초의 번안히트곡 '베사메무초'처럼 그로 인해 이제까지 없던 전혀 새로운 이국의 음악은 거부감없이 이 땅의 대중과 어우러질 수 있었다. 그런 위에 신중현도 조영남도 한대수도 있었다. 비록 후손이 되어 몇 대 조상까지는 알지 못해도 그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린의 무대는 항상 안정적이다. 현대적인 세련된 창법에 실린 아련함이 오랜 추억을 떠올리는 듯하다. 그녀가 부르는 '서울야곡'에는 노란 줄이 가 있다. 오래된 영사기의 낡은 필름처럼 아련한 너머를 들려준다. 어쿠스틱한 편안한 도입부와 라틴의 격정이 녹아든 전개, 그리고 마침내 터지는 절정까지. 다만 평이하다는 느낌은 있을 수 있겠다. 노래 자체로는 매우 좋은데 경연용으로는 임팩트가 조금 부족했다. 그래도 린의 무대는 항상 기대하고 봐도 좋다.

알리의 무대는 차라리 도발적이었다. 힙합이었다. 원래 힙합이란 기존의 음반을 재생하는 사이 그 여백을 임의로 채워넣는 놀이에서 시작했다. 과감하게 샘플링하고 있었다. '비내리는 고모령'의 가사와 멜로디를 마치 다큐멘터리의 기록영상을 보듯 직접 노래하여 샘플링하고 있었다. 하필 그래서 알리의 노래는 당시의 많은 여가수들이 그러했듯 간드러졌다. 역시 화면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랜 필름처럼 비가 내리는 가운데 그 위에 그들의 이야기가 덧씌워지고 있었다. 다만 그 의도가 적절히 전달되었는가? 무엇보다 랩이 노래의 가사와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와닿지 않았다. 알리가 부른 노래 부분만 따로 떼놓고 본다면 옛스런 평이한 트로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즐거웠다.

박재범은 과연 타고난 춤꾼이다. 목으로도 노래를 부르고 몸으로 노래를 부른다. 목으로도 노래를 연주하고 몸으로도 노래를 연주한다. 달그림자라는 말이 있다. 깊은 밤 밝은 달빛이 마치 그림자처럼 비쳐든다. 달빛이 밝아 그림자가 지고, 어두운 가운데 달빛이 너무나 서러럽도록 밝아 차라리 그림자처럼 보인다. 과거 현인은 천년고도 경주에서 이미 오래전에 망해 사라진 신라의 정취를 그리고 있었다. 이제 박재범은 21세기의 무대에서 오래전 같은 노래를 부르던 선배가수를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는 선배의 노래를 오늘날에 맞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화해 부르며 그 노래를 부르던 그 무렵을 떠올리려 하고 있었다. 낱낱이 해체하여 새로운 집을 짓는 기둥으로 삼고 대들보로 삼는다. 지붕은 기와가 아니다. 벽은 흙벽이 아니다. 콘크리트다. 현대화된 입식주방과 수세식화장실, 샤워기, 그리고 컴퓨터가 놓인 사랑방. 그의 무대를 당분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무척이나 아쉽고 서글프다. 팬이 되었다. 그는 보는 이를 흥분케 한다. 그 에너지를 빨아들인다. 무섭다. 어째서 박재범에 그토록 열광하는지 무대를 통해 이해하게 된다.

성훈은 비로소 자기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 같다. 그는 가수다. 그것도 노래를 아주 잘하는 가수다. 사실 노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는 충분히 자기 목소리만으로도 많은 것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가수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가수다. 퍼포먼스는 그를 위한 수단으로서만 필요하다. 처음 '꿈속의 사랑'의 원곡이던 '夢中人'이 불려지던 상하이의 어느 고급스런 클럽처럼 그는 화려한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춰 가장 애절한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오페라의 한 장면처럼 펼쳐지는 배경 속에 그는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 하지만 꿈속에서치고는 너무 애절하지 않을까? 감정이 너무 직접적으로 후벼파온다. 그는 역시 노래를 잘하는 가수다.

에일리의 '베사메무초'는 신이 내린 선곡이었다. 어서 빨리 무대에 오르고 싶다고 한다. 어서 빨리 무대에 올라 사람들에게 준비해 온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정작 무대에 올라서는 너무 떨린 탓에 준비한 멘트마저 잊고 건너뛰고 말았다. 그 열정과 자신감이 무대에서 그대로 녹아나온다. 저 심연으로부터 치밀어오르는 주체할 수 없은 정열을 넘어선 정염이 그녀의 노래로, 몸짓으로 터져나오려 한다. 섹시했다. 매혹적이었다. 다만 유혹까지 담아내지는 못했다.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무대였다. 그녀의 노래였고 그녀를 위해 준비된 노래였다. 납득했다. '베사메무초'였다.

태민의 '굳세어라 금순아'를 보면서는 태민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알지 못한다. 직접적으로 와닿지는 않는다. 그러나 보고 들어 느껴지는 것이 있다. 당사자에게는 공포이고, 한 다리 건너면 슬픔이고, 그조차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되고, 코미디가 된다. 무겁지만 그러나 처절하지는 않다. 장중하지만 치열하지 않다. 그는 이제 겨우 20대다. 전쟁이 끝나고서도 무려 반세기가 훨씬 넘는 시간이 흘렀다. 가사의 슬픔과 멜로디의 아름다움만을 전하려 한다. 갈수록 노래가 훌륭해진다. 그는 단지 그의 나이에 어울리는 '굳세어라 금순아'를 들려주고 있었다.

록이란 원래 선동이다. 록의 정신은 선동에 있다. 그래서 록스타는 숭배받는다. 그들은 대중을 이끌고 지배하는 위치에 있다. 음악적으로 특별히 대단한 점은 느끼지 못했지만 정신없이 오가는 가운데 어느새 휩쓸리고 마는 자신을 느낀다. 거칠게 두드려대는 퍼커션 소리를 들으면서, 유독 희망찬 가사와 힘있는 멜로디를 들으면서 들뜨지 않는다면 그것은 심장이 없는 것이다. 노브레인의 '서울찬가'는 그런 점에서 그들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 '럭키서울' 역시 당시 해방된 한반도의 인민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쓰여진 노래였다. 그들의 음악에는 희망과 낙천이 있다.

정작 승부를 겨루려는데 따라온 친구를 옆에 세운다. 함께 음악작업을 하던 친구도 아니다. 함께 무대에 섰던 친구도 아니다. 그냥 친한 친구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스스럼없이 전혀 사소하게 무대에 올리고 내린다. 참 경의없다. 그렇게 자연스럽다. 그렇게 설레어한다. 즐긴다. 승부의 결과를 발표하기 전 대기실에서 누가 더 좋네 수다를 떠는 것 또한 그래서 사소하기만 하다. 단지 결과는 궁금하다. 명곡판정단은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을까?

사람은 가도 음악은 남는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지만 예술가는 죽어 작품을 남긴다. 현인은 죽었어도 그의 음악은 여전하다. 여전히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듣고, 그의 노래를 따라부르고, 그와 전혀 다르게 무대를 만들어간다. 그가 간지 벌써 10주기, 그리고 그를 떠나보낸 그날에 후배들이 그와 마찬가지로 그와 전혀 다른 무대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랬던 것처럼 위로받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는 그래서 영원히 우리 안에 살아 있다. 그가 부른 노래가 남아있고 여전히 불려지고 있는 한 그는 살아있는 것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를 따라한다. 한참 어린 박재범의 흉내가 그래서 귀엽고 흐뭇하다. 다시 볼 수 없는 것은 서럽다. 서운하다.

다음주를 기대한다. 윤수일이다.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일 것이다. 이제 박재범의 무대를 볼 수 없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그의 멋진 퍼포먼스를 볼 수 없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다음을 기약한다. 기대한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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