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김윤석의 드라마톡] 구르미 그린 달빛 9회 "마침내 마음의 문을 여는 순간, 예정된 비극을 앞두고"

촌스러울 정도로 악마화된 김헌과 실제 역사의 세도정치와 왕실

▲ 구르미 그린 달빛 ⓒKBS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구르미 그린 달빛. 물론 드라마는 픽션이다. 하지만 굳이 실제의 역사를 가정하고 임금(김승수 분)이 울분을 토하듯 말한 자기 사람이 없는 이유를 말하자면 바로 순조의 아버지 정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정확히 증조할아버지인 영조서부터 시작되고 있었을 것이다. 당쟁이 사라지고 모든 사대부가 임금 앞에 줄서기를 하면서 정작 임금에게 선택의 여지 역시 사라지고 있었다.

세도정치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안동 김씨의 김조순도 그러나 원래는 아직 어린 세자를 걱정하여 정조가 남긴 후견인이었다. 그만큼 사람됨이 뛰어나서 식견과 능력도 훌륭했고, 성품도 강직했으며, 무엇보다 담백하다 싶을 만큼 권력에 대한 욕심도 크지 않았었다. 아직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야 하는 세자를 위해 이보다 더한 안전장치는 없었을 터였다. 실제 순조가 즉위하고 바로 자신의 딸이 순조의 비가 되면서 충분히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상황에서도 정작 김조순은 요직을 거부하고 한직만을 전전하다 고작 영돈녕부사로 세상을 마치고 있었다. 드라마의 권신 김헌(천호진 분)과 확실히 차이나는 부분이다.

문제는 김조순 자신이 아닌 그를 둘러싼 그의 척족들이었다. 더 정확히 왕의 외척이 권력을 독점하고 농단하려는 상황에서도 그를 견제할 세력이 남아있지 않던 당시 조정의 상황이었다. 당장 숙종만 하더라도 노론이 득세하면 남인을 등용하고, 남인이 너무 커졌으면 노론에 힘을 실어주는 등 두 당파의 대립과 갈등을 이용하여 절묘하게 힘의 균형을 맞추고 왕권을 강화하는 수완을 보이고 있었다. 서로 대립하는 당파가 나란히 조정에 있으면 당연히 서로를 쓰러뜨리기 위해 잠시도 서로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늦추지 않았을 것이다. 왕에게 그럴 필요만 있다면 어명이라는 명분 하나로 기꺼이 손발이 되고 사냥개가 되어 줄 든든한 아군이 조정에 둘이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조 이후 탕평으로 조정에서 당파와 당색이 사라지며 사정이 달라지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조정에는 여러 정파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의 당파와는 달리 이들 정파들은 오로지 왕을 정점으로 왕의 의지에 따라 갈라진 가지들에 지나지 않았다. 오로지 왕을 중심으로 줄을 서며 어느 줄에 섰는가로 정파가 나뉘었다. 더구나 순조가 즉위하고 나서는 김조순이란 외척은 어린 왕의 가잔 든든한 후견인이며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다. 김조순이 있기에 어린 나이에도 순조의 왕권은 유지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김조순과 그 일족이 왕의 외척으로 전횡을 일삼고 부정을 저지른다 해도 정작 왕 자신마저 자신의 팔다리를 자르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한 그들을 건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만일 김조순과 그 일족이 조정에서 사라지면 누가 왕인 자신을 위해 울타리가 되고 손과 발이 되어 줄 것인가.

말 그대로다. 아직 당쟁이 남아 있다면 조정에서 김헌의 반대파에게 힘을 실어 그들을 견제하면 된다. 아직 여러 당파가 조정에 공존하고 있다면 김헌이 전횡과 월권을 일삼는 만큼 반대파에 힘을 실어주어 그를 공격하도록 만들면 된다. 명분은 오로지 왕인 자신에게 있다. 그런데 그 명분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조정에 단 하나의 세력만이 남아 있다. 자신의 장인이자,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이고 후견인인 국구 김헌과 그의 당여들만이 남아 있다. 세도정치가 조선의 흑역사로 남게 되는 이유였다. 그동안 여러 문제들에도 조선을 지탱해 오던 감시와 견제의 장치들이 모두 철저히 무력화되고 있었다. 더이상 왕이 사대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던 만큼 왕을 배경으로 둔 외척들 역시 사대부의 반발에 신경쓰지 않아도 됐다.

물론 역사는 역사 드라마는 드라마다. 위에도 썼듯 역사의 김조순과 드라마의 김헌은 전혀 별개의 인물이다. 실제 역사의 김조순은 김헌처럼 권력욕도 크지 않았고, 당여를 모아 왕권에 도전하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김조순과 같은 인물로부터 세도정치라는 어두운 역사가 시작되었는가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외척 김헌은 왕위마저 넘보는 철저한 악역이고, 주인공 세자 이영(박보검 분)은 그에 맞서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할 사명을 가진 인물이다. 그냥 단순한 배경지식이다. 어째서 세도정치 시기 조선의 왕들은 조정에서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는가. 그보다는 왕의 외척인 권문세족들 자신이 원래 왕의 친위세력들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친위집단에만 의지해 정치를 하게 될 때 친위집단의 변질을 통제하기란 거의 불가능해진다. 자신의 권위를 걸어야만 한다.

세자가 홍라온(김유정 분)이 여자인 것을 알았다. 그 사실을 털어놓고 여자인 홍라온에게 고백한다. 그러나 홍라온이 남자이거나 혹은 여자인데 비천한 신분이거나 그들 사이에 놓인 현실의 벽은 높고도 두껍다. 몇몇 개인의 의지로 넘을 수 있는 벽이 아니다. 그래서 주저한다. 세자의 진심을 알면서도, 그 진심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러나 저 문 너머에 있는 현실의 벽 앞에 홍라온은 주저앉고 만다. 사람이 문을 앞에 두고서도 열기를 주저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그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거나, 혹은 모르거나. 그냥 무엇이 있든 극복할 자신이 있거나, 그럴 의지도 용기도 없거나.

이 사람이라면 목숨을 걸어도 좋다. 이 사람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도 좋다. 하지만 아직 이영은 자신의 세자자리를 걸지 않았다. 세자로서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왕의 아들로서 왕실과 나라를 위해 해야만 하는 일들이 너무 많다. 무엇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위험을 무릅쓰며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 세자와 홍라온의 사이를 알고 그를 공격하여 세자를 무력화시키려 한다면 어째야 할까? 홍라온이 여자의 몸으로 법도를 어기고 내시가 된 것이나, 하필 세자가 좋아하는 상대가 한낱 천민에 불과한, 더구나 역적의 자손인 홍라온인 것을 알게 된다면 명분이 중요한 조정에서 그저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까? 아직 자기가 자신의 사랑을 위해서 무엇을 걸어야 하는가 실감하지 못한 때문이다. 그저 무심히 대충 둘러댄 것만으로 자신을 오랫동안 모셔왔던 장내관(이준혁 분)을 속일 수 있었다.

갈수록 오그라든다. 감정들이 너무 적나라하다. 말로 다하지 못하는 마음을 손짓으로 전한다. 홍라온이 어린 영은옹주(허정은 분)을 위해 만든 손짓들이 세자를 위한 말이 되어 그의 눈에 들어와 박힌다. 사랑한다. 함께하고 싶다. 너무나 절절해서 차마 입밖에 내기 민망한 소리들이 손짓을 빌어 소리없이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어둠속에 홍라온에게 전해진다. 홍라온이 단단히 여민 마음의 빗장을 두들겨 부숴 열어 버린다. 하필 그 직전 왕은 세자의 사람을 만들어주기 위해 세자의 국혼을 서두르고 있었다. 같은 일의 반복이다. 김헌이 왕의 장인이었듯 누군가는 세자의 장인이 되고 그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 줄 것이다.

뻔히 비극이 예고된 만남이다. 용기를 내어 문을 열었는데 그 앞에 무언가 무서운 것이 숨어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 그 사실을 모른다. 그저 처음으로 마음의 문을 열어제낀 설렘에 도취되어 그를 만나려 할 뿐이다. 왕명을 거스를 수 없고, 세자라는 운명을 거스를 수 없으며, 맞서기는 커녕 휩쓸리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지켜봐야 한다. 세자의 결혼을. 그리고 그들의 아이를. 서로 다른 그들의 신분이 만들어갈 서로 다른 세계를. 견딜 수 있을까? 얄궂게도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곱게 차려입은 순간 쉽지 않은 운명이 그들의 앞에 기다린다.

김헌에 대한 악마화가 지나쳐 가끔 촌스럽기도 하다. 중전 역시 함부로 내시에게 손찌검을 하며 체통을 떨어뜨리더니, 아예 칼잡이를 데리고 궁으로 들어와 사람까지 눈앞에서 직접 해친다. 세자와 국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노회한 정치인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정치드라마가 아닐 테니까. 악역은 악역인 채로 좋다. 영은공주가 감추고 있던 비밀의 자락이 드러난다.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