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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3.15 10:07

해를 품은 달 "안타까운 설의 죽음, 그러나 설명이 너무 길었다."

윤보경의 죄를 강조하는 도무녀 장씨, 그러나 여전히 그녀를 동정한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어떻게 노비 설(윤승아 분)은 그토록 간절히 지체높은 사대부가의 도련님인 허염(송재희 분)을 마음에 품게 되었던 것일까? 심지어 다른 집에 팔려가고 난 다음에도 그를 잊지 못하고 옛집을 찾는다. 숨어서 지켜보다가는 마침내는 그를 대신해 죽기를 무릎쓴다. 어째서?

물론 원작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드라마에서 죽어가는 윤승아의 입을 빌어 설명한 그대로다. 이름조차 없이 '이년'이라 불리우던 그녀에게 허염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처음으로 '설'이라는 이름을 받음으로써 그녀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낳아주기는 부모가 낳아주었지만 존재하기는 허염으로 인해 존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이가 어미의 옷자락을 쥐고 놓지 않으려는 당연한 집착과도 같다. 각인이다.

문제는 전혀 설득력 없이 마치 스토커처럼 허염의 주위를 맴도는 모습만 보이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고서야 설의 입을 통해 그 내용이 들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곧 죽을 사람인데도 여전히 숨은 남아 있어 저 할 말은 끝까지 다 하고 만다. 더구나 이제껏 허염에게 폐가 될까봐 좋아하면서도 좋아한다는 사실을 감추고 애써 내비치지 않으려던 것과는 달리 이미 죽어가는 상황에 남은 허염에게 마음의 짐이 지워지도록 모든 내용을 털어놓으려 하고 있다. 모순된다.

원작에서는 오히려 끝까지 허염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려 홀로 쓸쓸히 죽어감으로써 그 비극을 심화시키고 있었다. 차라리 허염에게 짐이 될까 죽었다는 사실조차 들리지 않도록 혼자서 쓸쓸히 죽어간다. 내리는 빗속에 그녀가 죽었다는 흔적마저 씻겨간다. 굳이 사랑한다 미안하다 말로써 풀어 전할 필요 없이 수 백 마디 말보다 더 간절하고 진실한 침묵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남편의 날개를 꺾고 남편의 누이마저 죽음에 이르게 했던 민화공주(남보라 분)의 이기적인 사랑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신분의 굴레로 인해 사랑한다는 말조차 전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조차 남기지 못한 설의 사랑이란 얼마나 애닲은가?

그에 비하면 드라마에서는 그래도 한풀이는 하려는 모습이다. 직접적인 만큼 원작에서와 같은 사무치도록 애닲은 느낌은 상당히 덜하다. 무엇보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뜬금없다. 원작을 읽은 사람이라면야 어째서 설이 허염에게 그토록 집착하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만 본 사람이라면 그에 대한 어떤 설명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허염이 위기에 처하자 설이 몸을 던지고 죽을 처지에 놓이며 말로써 시청자마저 당황스럽게 이유를 털어놓고 만다.

아예 처음부터 설에 대해서 분량을 할애해도 좋았을 것이다. 이훤(김수현 분)과 허연우(한가인 분)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가운데 일부를 할애해서 설의 사랑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들려준다. 어느 순간 아무 설명 없이 설이 허염을 대신해 죽더라도, 원작에서처럼 아무런 말도 전하지 못한 채 혼자서 쓸쓸히 죽어가더라도, 그 침묵의 여백을 통해 하지 못한 나머지 말들을 들려준다. 차라리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허염을 욕하고 설을 그렇게 죽게 만든 운명과 조선의 신분사회를 욕한다. 안타깝고 가엾은 마음이 더욱 죽은 그녀를 애닲아 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없었다. 이제까지 아무말 없이 시청자로 하여금 지켜보게만 하다가 한 순간에 폭풍처럼 모든 것을 털어놓고 덜컥 죽고 만다. 그나마 허염의 품에 안겨 자신의 마음은 전하고 죽을 수 있었다. 허염이 안타까워하는 모습은 보며 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설은 그 순간 행복했을까? 자신의 죽음에 오히려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래도 마음은 전했다 만족해하며 죽었을까? 비극도 희석된다. 하다못해 설이 아닌 설의 주위에서 그녀의 사랑을 대신 전해주었다면. 설은 끝내 침묵함으로써 비극을 온몸으로 받는다. 허염이 대신 울어주기에 시청자가 울어줄 여지도 줄어든다. 원작에서는 참으로 저미도록 아픈 사랑이었건만 그같은 애닲음이 덜하다.

역시나 소설인 원작을 드라마로 각색하는데 따른 어려움일 것이다. 단순히 문장으로 쓰여진 것을 영상으로 옮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차라리 저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드러내는 용기도 필요하지 않았을까? 중전 윤보경(김민서 분)의 이야기의 비중이 늘어난 대신 설과 민화공주의 이야기의 비중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분량만 줄어든 것이 아니라 그 분량으로 인한 이야기의 치밀한 구성이나 논리적 개연성 또한 많은 부분 희생해야 했다. 이훤과 허연우의 사랑은 물론 설과 민화공주의 서로 다른 사랑 또한 원작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정작 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원작에 충실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과감하게 그런 것들을 포기하지도 못하고 어정쩡함이 어설픔을 만든다. 감동을 줄인다.

하여튼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장 가엾은 것은 언제나 중전 윤보경일 것이다. 아버지 윤대형(김응수 분)이 자신과 왕을 저버리려 함을 안다. 그래도 왕이다. 남편이다. 아내로써 윤보경은 남편 이훤에게 그 사실을 알리려 발걸음을 서두른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허연우와 더불어 한가롭게 자치기를 하고 있는 이훤의 모습이었다. 어떤 아내가 그 장면에서 눈이 돌지 않을까? 그나마 허연우의 머리끄댕이를 잡지 않은 것만으로도 중전으로서 품위를 지킨 것이라 할 수 있다.서러움은 원망이 되고 원망은 한이 된다. 한은 독이 된다.

순간 윤보경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만다. 예전 임시도무녀를 맡던 이를 불러 그녀로부터 이훤을 저주한 사실을 듣고서도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넘기고 마는 것은 그래서다. 무슨 상관이겠는가. 아버지도 자신을 버리고 남편도 자신을 버렸다. 그녀는 껍데기다. 중전이라는 지고한 신분조차 한낱 허울에 불과하다. 그녀가 굳이 허연우를 저주하는 주술을 요구하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 주술의 제물로 자신을 쓰려 한다. 참으로 그녀의 인생이 고단하다. 그런데 거기에 대고 도무녀 장씨(전미선 분)는 흑주술을 역으로 부수며 오히려 일갈하고 만다.

"너는 네가 피해자라고만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 또한 가혹하기는 마찬가지다. 왕조차 입을 다물었다. 죽은 선왕 또한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으로써 외면하고 있었다. 도무녀 장씨는 어떠할까? 당시 윤보경의 나이는 고작 허연우 또래에 불과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 있을까? 그럼에도 바랐다. 왕의 곁에 있기를. 화려한 구중궁궐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이 되어 왕의 가까운 곳에 머물기를. 남편이기에 그가 자신을 돌아보기를 바랐다. 잘못일까? 그녀가 허연우를 죽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허연우를 죽인 것도 아니고 아버지 윤대형의 계획을 알았다고 그것을 말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허연우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바로 얼마전까지도 그녀를 포함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허연우가 이미 죽었다 굳게 여기고 있었다. 이미 죽은 사람인데 그 자리를 대신하려 한다고 해서 무엇이 큰 문제가 되겠는가? 결혼한 것도 아니고 단지 약혼만 했다가 끝난 사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으면 그를 사랑하면 안되는 것일까? 허연우를 죽은 것으로 만들어 빼돌린 것이 도무녀 장씨인데 정작 죽었다고 여기고 그녀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윤보경을 비난하는 것이 우습다.

결국은 윤보경에 대한 연민 때문일 것이다. 원작에서도 가엾었는데 드라마에서는 더 가엾다. 원작에서는 그나마 이름조차 없었지만 드라마에서는 이름도 있고 주체적인 의지도 주어지고 있다. 사랑받고 싶어하고 사랑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원망하고 질투하며 절망하고 좌절한다. 악역으로써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해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오히려 속시원하다는 느낌보다는 안쓰럽다는 동정의 감정부터 갖게 된다. 그렇게 윤보경의 희생을 딛고 이훤과 허연우는 마냥 행복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일부러 악역을 만들려 한다. 얼마나 효과적인가는 모르겠지만. 허연우를 향해 흑주술을 가하는 장면에서조차 자신을 제물로 삼는 모습에서 애잔함을 더한다.

어쨌든 드라마가 점입가경을 이루고 있다. 한 번에 휘몰아친다. 양명군(정일우 분)을 앞세운 윤대형 일파의 반역모의가 구체화되면서 어느새 민화공주가 과거 저지른 죄업마저 허염에게 알려지게 된다. 설은 죽고 민화공주는 절망에 빠지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왕실의 가장 어른으로 반란에 걸림돌이 될 왕대비 윤씨(김영애 분)마저 독살당한다. 원작에서는 지나가는 몇 마디로 끝나는 장면이었는데 독을 먹고 죽는 과정이 상당히 구체적이다. 잘못된 사랑과 집착이 결국은 자기를 망치고 주위를 망치고 만다. 자신의 가문을 위해 끌어들인 윤대형으로 인해 아들이 죽고 자신이 죽고 장차 손자마저 죽을 위험에 놓인다. 추하지만 그 마음이 애처롭다. 모든 악의에는 비극이 따른다. 자기 자신이든. 혹은 자기로부터 비롯된 것이든.

하여튼 제대로 신파였을 것이다. 액션도 그다지 치열하다거나 처절한 느낌이 없었다. 어설픈 액션에 이은 지나치게 긴 고백과 죽음. 지루해지고 있었다. 설의 이루지 못할 사랑과 그 사랑을 위한 죽음이 무척이나 애처로워야 했지만 밀이 길어지며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감정이 고조될수록 그 시간은 짧은 것이 좋다. 고조된 감정은 쉽게 피로해진다. 연출의 실수였다. 물론 대본의 실수이기도 했다. 윤승아의 연기는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민화공주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민화공주의 사랑에 대해서도 설 만큼이나 보다 비중을 두어 다룰 필요가 있었다. 어떤 결말이 될 것인가? 양명군은 또한 어찌될 것인가? 윤보경의 최후는 그리고? 왕이란 외로운 자리다. 모두가 잔인하고 모두가 그래서 슬프다. 이훤의 냉정함이 가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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