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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2.27 19:01

무신 "남의 것에 대한 동경과 주변부문화, 한국사극의 오랜 열등감을 보다!"

드라마란 단지 드라마일 뿐이라는 이유...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오래전 그런 고민들을 하던 때가 있었다. 과연 '한국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한국적인 무협과 한국적인 판타지와 한국적인 액션과 한국적인 로맨스... 그래서 심지어 그렇게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째서 한국의 역사에는 중국의 무협이나 일본의 전국시대, 유럽의 봉건시대와 같은 것들이 없었는가. 유럽의 귀족문화도 미국의 서부시대도 없었다. 부럽고 부끄럽다.

한 마디로 전혀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그 단초는 우연히 어느 커뮤니티에서 깊은 고민 없이 내뱉은 한 마디 때문이었다.

"조선에는 대신 사단칠정논쟁과 호락논쟁이 있지 않았는가?"

하기는 조선후기 노론과 남인이 첨예하게 부딪혔던 예송논쟁만 하더라도 유럽에서는 서로 내전으로까지 번지고 말았을 매우 중대한 정치적 의제를 담고 있었다. 왕이란 사대부인가? 사대부와는 다른 특별한 존재인가? 왕이 되었어도 여전히 그는 사적으로 차자일 뿐인가? 아니면 왕이 되었으니 종통을 물려받았으므로 장자의 예우를 해주어야 하는가? 물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기는 했지만 그조차 서로 명분과 논리로써 대결한 결과였었다.

조선은 유럽과 다르다. 중국과 일본과도 다르다. 일찌감치 중앙집권이 발달했다. 중앙의 통제력이 지방의 말단에까지 확실하게 미치고 있었다. 귀신조차도 억울함을 풀려 하면 관리를 찾아가 하소연하던 사회였다. 사병을 보유할 수 없어 사대부들도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첨예한 이론과 근거로써 다른 사대부를 설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송시열이 노론의 거두로서 당시의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가장 강력한 논리를 구사하던 당대의 석학이었던 때문이었다. 그런데 굳이 조선에서 중국이나 일본에서와 같은 액션의 전통을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지만 바로 그것이 중심부문화와 주변부문화의 차이인 것이다. 고려시대 고려인은 자신들의 왕이 당나라 황제의 사생아라 주장하고 있었다. 기자가 동쪽으로 와서 조선의 왕이 되었고 자신들은 그 후손이라 여기고 과시하려 했었다. 중심부 문화란 홀로 오롯이 존재한다. 주변부 문화란 그 중심부 문화를 의식하며 그에 종속되어 존재한다. 중심부 문화를 의식하여 그를 닮고자 하고 그와 닮은 부분을 찾고자 한다. 로마가 정작 자신들에 의해 정복되었지만 문화적으로는 한참 선진문명이었던 그리스의 그것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신화체계를 재구성한 것이 그 예일 것이다. 곧잘 로마의 신들은 그리스의 신들과 혼동된다. 그들은 서로 다른 문명과 신화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19세기는 유럽의 세기였다. 20세기는 미국의 세기였다. 20세기 말 일본의 기세가 무서울 때 전세계적으로 일본문화의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19세기 이후 세계는 유럽을 닮고자 했고 그것을 근대화라 부르며 시대적 당위로까지 여기고 있었다. 20세기의 화두는 미국이었다. 미국과 닮은 것이 선이고 정의였다. 소젖보다는 우유가 낫고, 우유보다는 밀크가 낫다. 한복은 촌스럽고 양복은 세련되다. 한식은 서민음식이고 양식이야 말로 품격있는 고급문화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은 과연 자기 안에서 그와 닮은 부분이 얼마나 있는가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19세기 일본인들이 유럽의 봉건시대와 닮은 에도시대의 막번체제를 자랑스러워하고 심지어 일본인들이 유럽인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사람마저 나오고 있던 이유였다. 굳이 일부 재야학자들이 한국인의 뿌리를 메소포타미아에서 찾으려는 이유와도 닮아 있다. 유럽과 닮았으니 자랑스럽고 유럽과 가까이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대견하다. '한국적'이란 말은 바로 그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한국'에도 이와 같은 '한국적'인 닮은 것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있지도 않은 무공을 만들어냈다. 굳이 억지로 유럽문명의 전통이 담긴 판타지의 체계에 전통의 것들을 끼워넣기 시작했다. 비슷하게 만들어 놓고 감탄한다. 정말 대단하다. 정작 우리의 역사이며 우리의 문화인데 그것은 우리 자신에 속해 있지 않다. 유럽을 닮고, 미국을 닮고, 일본을 닮고, 중국을 닮는다. 거기에서 자부심을 찾는다. 이를테면 고려시대 있지도 않았던 원형경기장을 만들고 그 안에서 고려시대 없었던 노예들을 동원한 격구를 가장한 검투를 재현하며 즐거워하는 것이 바로 그 한 예일 것이다.

PD가 참고했다는 미국드라마 <스파르타쿠스>는 무려 천 년도 더 넘은 기원전 1세기의 로마제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정작 MBC의 한국드라마 <무신>은 13세기의 고려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당연히 시대가 다르니 가치관도 다르다. 기원전은 충분히 사람의 목숨을 도락의 수단으로 삼을 만한 야만에 가까운 시대였다. 그리고 13세기의 고려라면 이미 중국을 통해 다양한 선진적인 철학과 사상들이 유입되면서 사람들의 의식이 많이 깨어 있을 무렵이었다. 그런데도 13세기의 고려가 그보다 무려 1300년이나 전인 기원전의 로마를 닮으려 한다. 13세기 고려에서 기원전의 로마 노예가 격구의 형태를 빌어 기원전의 노예검투를 벌인다.

그래서 '막부'인 것이다. 일본은 선진국이다. 많은 분야에서 우리보다 한참 앞선 선진문명이다. 과거 우리는 저들의 식민지가 되어 지배를 받은 경험까지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일본에는 막부라는 것이 있었다. 우리 역사에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중국에서 쓰이던 원래의 막부의 뜻은 우리나에도 있었다. 그러나 분명 드라마에서 쓰이고 있는 막부란 무사정권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써 일본에서도 에도시대에나 정립된 개념이었다. 당연히 당시 고려에서는 최씨정권을 막부라 칭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일본에 있었던 막부와 유사한 것이 고려에서도 있었으니 우리나라도 대단하지 않았는가. 홈페이지에는 그것을 실제 자랑삼아 앞세우고 있었다.

아마 시청률은 그다지 높지 않지만 드라마 <무신>을 보면서 사람들이 그 액션과 연출에 만족감을 드러내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고종 4년 흥왕사 승려들을 중심으로 한 반란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도망친 노비의 자식인 김준(김주혁 분)과 월아(홍아름 분)이 잡혀오고, 다시 김준이 도망친 노예의 자식인 것이 밝혀지며 가혹한 축성장의 공역장으로 보내진다. 살아남기 위해 김준은 삶과 죽음이 오가는 격구에 자원하게 되고 격구장에서 부상에도 무릎쓰고 분투하여 마침내 최후의 승자가 되어 기회를 손에 넣게 된다. 로마군에 부족이 멸망당하고 포로가 되어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미국의 인기드라마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와 많이 닮아 있다. 덕분에 드라마의 김준과 그 모티브를 제공한 역사상의 김인준과는 전혀 별개의 인물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재미있다. 재미있는 드라마로부터 배워왔다.

그만큼 서구의 역사와 전통에 익숙해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들 나름의 문법과 연출방식에 익숙하다. 그와 닮은 것을 찾는다. 그와 비슷한 것을 즐긴다. 이제까지 우리나라에 없던 것이다. 미국드라마의 그것과 닮아 있어 더 재미있다. 굳이 당시 쓰이던 노비가 아닌 노예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유였다. 격구장에서 무사들이 쓰는 투구마저 로마의 그것을 닮아 있다. 그것을 요구하는 대중이 있고 그것을 충족시켜주는 작가가 있다.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 드라마들이 만들어지고 소비되어진다. 드라마로서.

언제부터인가 필자가 한국의 역사드라마를 잘 보지 않게 된 이유일 것이다. 그나마 조선시대는 낫다. 아니 조선시대에조차 중국의 무협을 그대로 베껴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끔 보면 조선을 배경으로 한 것인지 단지 복장과 용어만 조선의 그것을 차용한 것인지 헷갈리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조선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말할 것도 없다. 복식은 시대를 무시하고 개념은 공간을 거스른다. 기존의 다른 나라 다른 문명의 역사와 전통이 그로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필자는 역사에 대해 관심이 무척 많다. 때로는 그것을 보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역사에 대한 자부심까지 강하다.

물론 그렇다. 드라마는 단지 드라마일 뿐이다. 드라마로서만 즐긴다. 하지만 그 메커니즘에 대한 것이다. 어째서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인데도 그 내용은 역사와 거리를 두고 있는가. 전혀 실제의 역사와 전통에 뿌리를 두지 않고 다른 것에 눈을 돌리고 그를 탐하려고만 하는가. 어째서 그런 것들이 단지 드라마로서 생산되고 소비되어지고 있는가.

비단 <무신>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경쟁방송사의 <광개토대왕> 역시 그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작년 방영한 MBC의 <계백>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 그렇지 않은 드라마가 드물다. 오롯한 우리의 역사와 문화와 가치를 담은 역사드라마가 아닌 이미 다른 나라의 역사와 문화와 가치관에 깊이 영향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을 위한 드라마로서 소비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이유다. 단지 그것은 대중의 욕구와 추구만을 위해 봉사한다.

아무튼 우리 역사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하는 필자로서 그다지 달갑지 않은 부분일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우리 역사 나름이 멋이 있다. 우리만의 나름의 맛이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드라마를 통해 보여지는 것은 전혀 생소한 남의 것들이다. 그것이 우리 것인양 혼동되어 받아들여진다. 그것에 만족하며 즐거워한다. 하기는 한반도는 원래 주변부였다.

어쨌거나 드라마 자체는 재미있다. 재미있을만한 것을 다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고증을 무시하고 우리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지 않는다면 상당히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드라마다. 역사가 아니라 판타지라 생각하면 무척 만족스럽게 볼 수 있다. 그것이 문제다. 그럼에도 역사드라마를 앞에 내세우고 있다. 불만스러운 이유다. 여전히 판타지일 뿐이라 생각한다. 가상의 시대와 공간, 인물을 배경으로 소재로 삼은 판타지 드라마로서는 상당한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 로마와 닮았고 일본과 닮았다. 매우 흥미롭다.

여전히 고민한다. 한국적인 것에 대해서. 하지만 그것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찾아야 하는 것일 게다. 기록을 통해서. 보여지는 실제를 통해서. 막연한 바람이 아니다. 다른 것에 대한 동경이나 부러움이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끄러워한다. 어째서 우리는 저들과 다른가. 기원전의 로마와 13세기의 고려, 막부는 일본에서도 기형적인 정치체제였다. 그래도 드라마는 본다.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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