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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6.03.16 07:05

[김윤석의 드라마톡] 육룡이 나르샤 48회 "이방원의 웃음과 이성계의 웃음, 권력과 인간"

죽은 조영규만이 홀로 우는 이방원을 위로하는 이유

▲ 육룡이 나르샤 ⓒSBS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육룡이 나르샤. 권력이란 그래서 고독한 것이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자신마저 어느새 권력을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린다. 자신이 권력을 가진 것인지, 아니면 권력에 자신이 삼켜진 것인지. 그럼에도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권력이다. 모든 것을 잃고 모두를 희생해서라도 반드시 가지고 싶은 것이 바로 권력이라는 것이다.

불과 하루 사이에 무려 두 명이나, 그것도 스승과 형제를 살해한 충격에 괴로워하는 이방원을 곁에서 위로한 것이 죽은 조영규(민성욱 분)였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쩌면 무휼(윤균상 분)이 자신을 떠날 지 모른다. 자신에게서 등돌릴지 모른다. 두려움이다. 살아있는 모두는 자신을 두려워하거나 혹은 자신이 두려워해야 한다. 아무 두려움도 근심도 없이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죽은 사람 뿐이다.

비로소 이성계(천호진 분)도 그것을 깨닫는다. 지존의 자리에 오르고서도 정작 정도전(김명민 분) 등 측근들에 둘러싸여 권력이 가지는 비정함과 지독함을 미처 경험하지 못했었다. 눈물을 흘리며 차라리 죽여달라 진심을 말하는 와중에도 이지란(박해수 분)의 간곡한 설득에 아버지가 흔들리는 듯 싶자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리고 만다. 자기 손으로 스승을 살해했다는 죄책감도, 어린 동생을 직접 칼로 베어 죽였다는 비참함도, 심지어 아버지로부터 거부당하고 있다는 비감한 현실마저 곧 손에 지게 될 권력에 대한 환희에 가리고 만다. 

차라리 허탈하다. 그런 것이 권력이었는가. 그토록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일구어낸 새나라와 새나라의 왕이라는 자리가 고작 그런 의미였는가. 더이상 지켜야 할 것이 없다. 가져야 할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들이 아들을 죽였다. 자신이 세운 나라에서 왕인 자신의 의지로 세운 어린 세자가 왕위에 욕심을 낸 다른 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지금의 나라를 세우고 자신을 왕위에 올린, 자신에게 처음으로 새로운 나라와 왕위에 대한 꿈을 보여주었던 평생의 동지이자 소중한 친구가 그를 스승이라 부르던 자신의 아들에 의해 죽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새나라만 세우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여겼는데. 자기가 왕위에 올라 그저 믿고 맡기면 모든 것이 뜻한대로 이루어질 것이라 여겼었는데.

부질없다. 어떤 원망보다 분노보다 더 시리다. 체념이다. 포기다. 그깟 새나라다. 그깟 왕위다. 그깟 백성들이다. 아들들은 이미 제 욕심들에 겨워 아비인 자신마저 저버리고 피를 나눈 어린 형제의 목숨을 빼앗는데 힘을 모으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을 향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칼을 겨누고 있었다. 또 하나 오랜 전우이자 피를 나눈 형제와 같던 이지란의 간곡한 만류와 설득마저 더이상 의미를 잃는다. 이런 모습을 보자고 그동안 그토록 많은 피를 흘려왔던 것이 아니었다. 그토록 많은 죽음과 죄업을 쌓아 왔던 것이 아니었다. 그 대가였다. 그 결과였다. 괴물을 본다. 어쩌면 자신의 헛된 꿈이 만들어낸 괴물이었다. 아들이 아니었다. 더이상 아들의 모습을 한 전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무언가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자초한 것이었다. 자신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만일 알았다면. 만일 권력이란 그런 것이란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러면 달라졌을까? 그러면 무어라도 크게 달라졌을까? 그랬더라면 허튼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꿈을 꾸었더라도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괴물이 되어 있는 자신을 본다. 괴물을 막기 위해서는 자신 역시 괴물이 되어야 한다. 먼저 죽은 세자의 생모 신덕왕후가 말한 것처럼 자신의 손으로 이방원을 죽여야 했었다. 죽이지 못하더라도 감히 왕위에 욕심을 내지 못하도록 나락으로 떨어뜨렸어야 했다. 바로 지금 이방원의 목에 겨눈 자신의 칼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설사 이방원을 죽이더라도 그것 뿐이다. 자신의 나라는 끝났다. 자신의 꿈도 끝났다. 자신의 삶도 존재도 모두 끝이 났다.

자신에 대한 환멸과 모멸을 끝까지 끌어안고 살아간다. 나아간다. 고민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갈등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스승인 정도전을 여전히 존경하며 사랑하고 있었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을 형이라 믿고 따르는 어린 동생에 대한 정도 있었다. 아버지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로부터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결론은 하나였다. 자신이 권력을 가져야 한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자신이 권력을 가져야만 한다. 권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은 의미가 없다. 죽는 것만도 못하다. 진심이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자신을 죽여달라. 아니라면 자신에게 아버지가 가진 권력을 내어달라.

형제마저 자신을 두려워한다. 아버지는 자신을 타인 보듯 보고, 숙부라 따르던 이는 자신을 혐오의 눈으로 보고, 형은 자신을 두려워하여 지레 겁을 내며 물러선다. 바로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길이다. 그동안 자신이 해 온 일들이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다. 머뭇거릴 수도 없다. 그래서 아버지가 여전히 자신을 거부하더라는 말에 바로 어린 동생을 찾아가 직접 칼을 휘두르고 피를 묻혔던 것이었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끄는 것은 의미가 없다. 뒤를 돌아보고 물러서는 것도 의미가 없다. 어차피 앞으로 가야만 한다면 멈추지 말고 가야만 한다. 이제와서 죄업을 하나나 둘 더한다고 무언가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홀로 눈물을 흘린다. 홀로 괴로워하며 몸부림친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무휼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연희(정유미 분)의 죽음을 듣는다. 이방지(변요한 분)와 분이(신세경 분)의 소식도 듣는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갈라지게 된 운명들이다. 하지만 역시 그렇다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 선택하라 한다면 결국 자신은 지금의 이 길을 선택할 것이다. 그렇기에 더 가혹하게 받아들이고, 더 참혹하게 인내하며, 자신이 선택한 길을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다. 숙부인 이지란 앞에서 이지란 자신과 심지어 아버지의 목숨마저 들먹이며 협박하는 것은 그런 절박함이다. 외롭고 고단한 처절함이다. 더이상 자신에게 돌아갈 곳이 없다. 아마 그래서 이방원은 전작 '뿌리깊은 나무'에서 아들 세종 이도에게 그토록 가혹하게 왕이 가져야 할 지옥의 마음을 가르쳤던 것은 아닐까.

백성의 삶은 바로 살아가는 것에 있다. 결국 저들의 싸움이다. 저들끼리 죽고 죽이는 싸움이다. 저들끼리 싸워서 한 쪽이 이기면 끝나는 싸움이다. 자기들끼리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이미 모든 싸움이 끝난 이상 괜히 자신의 목숨까지 내버릴 필요는 없다. 정도전이 죽은 것을 확인한 순간 분이는 오라비 이방지를 찾아 애써 무휼과의 싸움을 뜯어말린다. 손자 무휼을 위해 이방원의 거사를 돕기는 했지만 정도전이 죽고 모든 싸움이 끝난 이상 굳이 손자인 무휼이 또래인 이방지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을 지켜보고 싶지 않다. 냉정할 정도로 철저히 중립을 지킨다. 백성에게는 백성의 길이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굳이 정도전의 유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팔복아범은 어쩔 수 없이 그들과 얽힐 수밖에 없는 민초의 애닲음이다. 그럼에도 그들에 기대고 그들에 의지하며 현실을 헤쳐나가야 한다.

정도전의 유언과는 달리 이방지는 끝내 복수를 결심한다. 사랑하는 연희가 죽었고, 지켜야 했던 정도전마저 지키지 못했다. 어머니와 만났다. 어머니 무명의 무극 연향(전미선 분)과 만나 어차피 정도전과 추구하는 것이 완전히 같은 이방원을 제거할 모의를 꾸민다. 어제까지 적이었지만 이제 정도전이 죽은 이상 이방원이 새로운 적으로 그들 앞에 섰다. 정도전마저 죽고 원망을 돌릴 상대를 찾던 척사광(한예리 분) 역시 이 모든 비극의 근원으로 무명을 지목한다. 아마 무휼에 대한 남다른 감정이 그런 결론에 이르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모든 살아갈 희망을 잃은 그녀에게는 아무거라도 살아갈 이유가 필요했다. 복수도 그 한 가지다. 복수를 위해 살아가는 동안에는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방지와 무휼, 척사광이 다시 만나 대결을 벌일 시간이 다가온다.

과연 정도전은 욕망을 몰랐다. 인간의 욕망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기에 그 욕망에 지고 말았다. 이방원은 욕망을 안다. 누구보다 강한 욕망을 지녔다. 그래서 어쩌면 정도전처럼 다른 사람의 욕망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만이 욕망할 수 있다. 오로지 자신만이 욕망해야만 한다. 그것이 왕이다. 홀로 욕망하며 그 욕망마저 대의로 삼는다. 다른 사람과 욕망을 나누고 싶지 않은 탐욕과 집착이 오히려 다른 사람의 욕망을 제거하고 만다. 기왕에 권력을 가졌는데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사병이며 땅이며 남겨둘 이유가 없다. 이방원이 무명을 그대로 놔둘 수 없는 이유다. 육산선생(안석환 분)의 너무 큰 오판이었다. 이방원의 욕망은 어느 누구보다 크고 강렬하다. 자신마저 삼켜버릴 만큼.

그럼에도 어째서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려 애쓰는가. 아마 모를 것이다. 이방원 자신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가져야만 하는 것이 권력이다. 가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권력이다. 아무리 궁리하고 고민해도 결국 답은 하나다. 권력을 가져야겠다. 아버지도, 형제도, 사랑하는 모두를 저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인간의 참혹함이다. 무심함이 더 슬프고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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